III/1 백설의 성모 마리아 교회

III 신도시 – 남쪽과 남서쪽 코스

1. 백설(雪)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Kostel Panny Marie Sněžné) – 2. 프란띠쉑 빨라쯔끼의 집 (Dům Františka Palackého) – 3. 체코형제개혁교회의 후스의 집과 그의 상징 (Husův dům Českobratrské církve evangelické a jeho symboly) – 4. 예로님 쁘라슈스끼 문화재 안내판이 있는 집 (Dům s pamětní deskou M. Jeronyma Pražského) – 5. 신도시 시청과 구 하나님의 몸 채플 (Novoměstská radnice a někdejší Kaple Božího těla) – 6. 슬로반의 엠마오 수도원 (Emauzský klášter na Slovanech) – 7. 블타바 강변에 있는 프란티쉑 빨라쯔끼 동상 (Pomník Františka Palackého u Vltavy) – 8. 즈데라제에 있는 성 바쯜라프 교회당 (Kostel sv. Václava na Zderaze) – 9. 찌릴과 메또뎨이 교회당 (Kostel sv. Cyrila a Metoděje) – 10. 보이뗴흐 거리의 보이뗴흐 교회당 (Kostel sv. Vojtěcha ve Vojtěšské ulici) – 11. 이르하지 거리의 성 미할 교회당 (Kostel sv. Michala v Jirchářích)

무스텍 지하철 아래 쪽 정거장에서 부터 신도시 후스 추종자인 급진파 지도자 얀 줼리브스끼(Jan Želivský)의 흔적을 따라가는 세 번째 코스가 시작된다. 남동쪽 융만 광장쪽으로 가면 약 100미터쯤에 프라하에서 교회당 높이가 가장 높은 백설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의 높은 벽이 가까이 우리들 앞에 우뚝 솟아있다. 오스트리아 문화원이 있는 사제관 북쪽 문으로 들어가면 교회 앞마당에 도착하게 된다.

1. 백설(白雪)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Kostel Panny Marie Sněžné) 나중에 세워진 교회당 토대 가운데 일부는 까렐 4세가 자신의 체코왕 대관식 때 카르멜 수도회를 위해 1347년에 세웠다. 세 구역의 회중석을 가진 장엄한 양식의 대규모의 고딕교회당 건설을 계획하였다. (프라하 교회당들 가운데 가장 큰규모로 구상된, 길이 100미터 높이 35미터의 교회당이었다. 그러나 1398년 까렐이 죽을 때 까지 완성 완성되지 못하였다.) 로마의 Esquilin의 교회당 건축양식과 관련된 “백설의” 또는 “눈(雪)속의” 성모 마리아라는 교회당 이름은 일반적이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교회당을 세운 사람은 교회당의 좋은 터를 하늘의 뜻으로 알게되는데 8월달에 눈이 쌓인 곳이 바로 그 곳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대교회당 건설은 후스파가 두 파로 나뉘어져 서로 전쟁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카르멜 수도회는 1412년에 위클리프(Viklef)의 사상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일반대중이 좋아했던 베들레헴의 얀 후스 선생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예로님 선생(Mistr Jeronym)의 지도아래 있었던 후스파들은 교회로 강제로 들어가서 교회의 장식을 파괴한 다음에 그들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미꿀라쉬(Mikulaš) 수사를 블타바강에 던졌다. (그러나 그는 어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콘스탄츠에서 후스가 죽은 후 1415년 2월에 프라하 시민들은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에게 그들의 교회에서 양종성찬의 성만찬미사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 다음해에 그들은 양종성찬의 성만찬미사를 요구하러 콘스탄쯔까지 갔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공의회는 예로님 선생에게 화형선고를 하게된다. (1416. 5.30)

양종성찬을 위해 투쟁하던 시대에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이 도망간 교회였던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는 1419년에 후스파의 압력으로 바츨라프 4세가 정기적인 양종성찬 미사를 허락한 프라하의 세개의 교회가운데 하나였다.(II/2) 왕의 명령으로 성 슈떼빤(sv. Štěpán) 설교단을 떠나야했던 얀 줼리브스끼(Jan Želivský)가 이때 이 교회 설교자가 되었다.

줼리브 출신의 얀은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설교자가 되기 전에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사였다.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죽을 때까지 활동하였다. (I/4) 그는 설교를 통해 대담하게 세속화된 교회의 지도계층과 프라하의 타락한 사회상을 비판했다. 그는 욕망이 가득한 프라하의 지배계층을 반대하는 프라하의 하층 계급 시민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첫 번째 프라하 투척사건 이 후( 1419년 7월 30일에 신도시 청사 창문 밖으로 공무원들을 던졌던 사건 III/5) 그는 프라하의 모든 후스파 신자의 지도자가 되었다. 줼리브스끼는 슬퍼하는 군중들의 애도 속에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지그문드(Zikmund)의 십자군이 비쉐흐라드(Vyšehrad) 싸움(1420. 11. 2)에 진 이후 급진적인 따보르(Tábor)파 바츨라프 꼬란다 스따르쉬(Václav Koranda Starší)가 1421년 봄에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후스파 극단주의자 야쿱 블륵(Jakub Vlk)이 이 교회에서 줼리브스끼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조언에 따라 신도시 양종성찬파들이 1434년 봄에 왕의 군대와 구도시의 온건파에 대항하여 싸움을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따보르파와 고아파들과의 연대를 포기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쁘로꼬프 홀리(Prokopa Holý)의 지도아래 이들은 신도시 형제들을 돕기위해 신속하게 왔다. 구도시와 신도시의 싸움에 교회당은 심하게 부서졌고 교회 탑은 구도시의 승리로 파괴 되었다. Vlk신부는 프라하에서 격퇴당하였고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의 신도시 후스파 중심역할은 끝이났다.

급진적인 후스파가 Lipan전투(1434. 5. 30 )에서 패배한 후에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이 교회에 다시 돌아왔고 이 교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수도원도 재건하였다. 그러나 1483년의 프라하 반란 때 교회는 다시 파괴되었다. 그리고 1521년의 후스 기념일에도 교회는 다시 또 파괴되었다.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이 16세기 중반까지 비바람으로 쓰러져 가던 교회당과 수도원을 사용하였다. 1603년에 루돌프(Rudolf) 2세가 폐허가된 건물들의 관리를 독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에게 맡겼다. 그 이후에 수리된 교회당에서 1884년까지 독일어 미사가 진행되었다.

그 후에 세워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건물들 남쪽 앞에 지금까지 큰 수도원 정원이 남아 있다. 이 정원은 1950년에 프라하 시민들에게 개방 되었다. 1990년대 정원이 공원으로 개축되었고 이제는 소음이 많은 도시의 휴식공간이 되었다. 교회 앞 수도원 안 뜰에서 융만 광장까지 서쪽 정문을 통해 나갈 수 있다. 여기는 19세기의 뛰어난 민족 부흥 운동가 요셉 융만(Josef Jungmann)의 동상이 있다. ( 1878년에 조각가 쉬멕(L. Šmek)은 융만을 안락의자에 앉아 펼진 책과 펜을 들고 있는 학자로 만들었다. )

요셉 융만 (+ 1847 )은 시인이며, 문헌학자며 동시에 번역가이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반개혁운동으로 차츰 파괴되는 체코 문화와 특히 체코 언어의 미래를 걱정하여 체코어를 구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하였다. 그가 쓴 글이다 : “체코 민족은 교황을 벗어나는 영광의 시대에 유럽에서 가장 뛰어났지만 예수회가 지배할 때는 이처럼 밑바닥까지 떨어질 때가 없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역사가인 그의 친구 프란띠쉑 빨라쯔끼(František Palacký + 1876) 과 동일 하였다. 빨라쯔끼의 기념 집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하겠다.

융만 동상에서 일방통행의 융만거리로 들어간다. 왼쪽 두 번째의 우 트지 흐로젠(U tří hroznů)이라는 집은 융만이 죽을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집 뒤로 약 100미터 지나가서 왼쪽에 있는 빨라쯔끼 거리로 돌아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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