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10 성 하슈딸 교회

10. 성 하슈딸 교회당 (Kostel sv. Haštala)

성 아네슈까 수도원 앞 좁은 마당에서 남동쪽의 아네슈까 거리를 지나 하슈딸 광장(Haštalské náměstí)에 있는 성 하슈딸 교회당(라틴어로 Castellus)로 가자. 이 교회는 프라하의 제일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이고, 나중에 바로크식으로 개축되었음에도 부분적으로 외부와 내부가 14세기의 본래 고딕식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이 교회당의 역사는 프라하의 루터파 교도들과 신 우트라퀴스트들의종교개혁 시대와 관련이 있다. 첫 후스파 시대에 양종성찬 교회에 이 교회당이 속하였지만 16세기 후반부터 루터파 목사인 드라죠프의 M. 사무엘 마르띠니우스(M. Samuel Martinius z Dražova)가 이 곳에서 활동한다(1639년 색스니에서 망명 중 사망).

드라죠프의 마르띠니우스는 프라하 대학에서 마틴 루터와 얀 후스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하였다. 반 합스부르크 봉기 시대에 그는 개혁파의 저항파 주동자들과의 협상에서 우트라퀴스트 교의회의 주요 고문(顧問)이기도 하였다. 결국 그가 1575년부터 체코 신앙고백의 내용을 소개하였던 프리드리히 팔츠끼(Fridrich Falcký)가 새롭게 왕으로 선출되면서 교의회와 왕 사이의 연락책도 맡게 되었다. 교리상으로 그는 루터파의 신학자로 분류되며 체코 형제단의 교리를 날카롭게 반박하였다. 빌라 호라 전투의 패배로 프라하의 동료들과 함께 색스니의 피르나로 피신하고 그 곳에서 망명 교회를 세운다. 1631년 가을 파사우(Passau)의 프라하 공격 때 몇몇 망명자들과 함께 귀향하고, 모스떼츠까 탑(Mostecká věž : II/7, IV/4)에서 처형당한 11명의 두개골을 모아 경건하게 장례식을 치룬다. 그리고 1632년 루터파 교회인 살바또르 교회(Kostel U Salvátora) 납골당에 안치시킨다 (슐릭 백작의 유골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마르띠니우스가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을 때에 우트라퀴스트의 행정관으로 선출되었었지만 곧바로 색스니의 망명길로 돌아가야했다. 그 곳에서 신학자로서의 작업을 계속함은 물론 형제단과 얀 아모스 꼬멘스끼와도 논쟁을 계속하였다.

합스부르크의 반개혁 당시 성 하슈딸 교회당은 대화재의 희생양이 되고 1689년 바로크식으로 재건된다. 교회의 북쪽 측면 지붕은 가는 기둥들과 함께 프라하 고딕 건축물의 귀중한 유산으로 전해져 오고있다.
교회 건물을 뒤로 하고 하슈딸 광장에서 북쪽으로 리브나 거리(Rybná ulice)를 돌아 들로우하 거리(Dlouhá unice)를 만나서 왼편으로 돌아보자. 100미터정도 걸어 내려오면 레볼루츠니 거리(Revoluční třída)가 나온다. 신호등을 건너 왼쪽으로 꺾어진다; 50미터쯤 내려오면 오른편에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가 있다. 이 곳에서 작은 광장쪽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개혁의 과거가 오늘에까지 남아있는 다른 교회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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