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끌리멘트 개혁 교회 (Evangelický kostel U Klimenta)
원래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교 회당이었던 성 끌리멘트(sv. Kliment) 교회는 프라하 근교의 우예즈드(Újezd) 마을에 있었다. 우예즈드는 블라디슬라프 1세가 1165년 독일인 이주자들도 소집한 곳이기도 하다. 까렐 4세 집권 당시 이 마을은 프라하 노베 므녜스또(Nové Město) 구역 (신시가)으로 통합된다. 소 교회당은 고딕 양식의 교회로 공사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건물 후진(後陣)의 둥근 천장과 그 안의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대화재를 겪고 교회는 완전한 고딕식 건축물로 재건된다. 본당 회중석(會衆席)의 아치는 야겔론 왕조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개혁시대 이전 1407년부터 성 끌리멘트 교회의 목사는 얀 쁘로띠바(Jan Protiva)로, 베들레헴 채플의 첫 담임 목사(1394-96)이기도 하였다. 이는 얀 후스보다도 6년 앞 선 것이다. 위클리프 교리 논쟁때에는 반대파에 가담하였고, 이는 곧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반 후스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하에서 후스파가 승리하게 되자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교회는 계속하여 양종성찬 목사들에 의하여 움직였다.
후스파 시대 후기에는 교회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나뽀지취(Na Poříčí) 거리의 성 뻬뜨르 교회의 우크라퀴스트 성직자들도 번갈아가며 이 교회를 맡았다. 빌라호라 전투 이후 양종성찬파 마지막 목사였던 또비아쉬 알베르뚜스(Tobiáš Albertus)는 1621년 12월 프라하에서 추방당한다. 교회는 재가톨릭화되며 반개혁주의 때에는 이 교회의 의미도 하락하게 된다. 요세프 개혁 때 교회와 그 옆에 있던 묘지 모두가 없어지고 곡물 저장 창고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프란띠셱 요세프 1세에 의한 종교 관용령(1861년 4월 8일)이 내려지기 전인 1850년 프라하 관용 교회는 아주 황폐해진 이 교회 건물을 27.500 즐라띠를 주고 구입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 기금모금과 끌리멘트 교회의 새로운 일들은 특히 의욕적이었던 베드지흐 빌렘 꼬슈트(Bedřich Vilém Košut) 목사가 담당하였다. (그때까지 개혁교회는 말라 스뜨라나(Malá Strana)의 예수회 정원에 있는 성 미할 구 예수회 수도원(sv. Michal) 건물의 홀을 빌려 모임을 가지곤 하였다. 현재 체코 정부 기관이 들어서 있다.)
B. V. 꼬슈트(B.V. Košut)는 관용 교회 목사 국내 세대에 속한다. 체르닐로바에 있는 교회 출신이고 슬로바키아에서 공부하였다(모드라에서 신학을, 쁘레슈뻬르크에서 법을 공부하였다). 1847년 프라하 개혁교회의 목사로 임명되면서 신념이 확고한 목사 및 조직책으로서 (심지어 20명의 가톨릭 신부들을 포섭하기도 한다) 활동한다. 1848년에는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프라하 시에 사용되지 않던 구시가의 성 미꿀라쉬 (sv. Mikuláš) 교회당 건물을, 이후에는 신시가지에 있는 성 까렐 보로메이스끼 교회당 (sv. Karla Boromejského)을 사용토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1850년에는 개인 소유주로부터 성 끌리멘트 교회 건물을 구입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가 설교할 때나 강연, 혹은 체코 형제 전도사지에 기고할 때도 체코 개혁의 정신적 유산을 불러 일으키곤 하였다. – 이르하지의 미할 학교의 루터교 교수인 Lic.J.루쥐츠까 (Lic. J. Růžička)와 함께 체코 관용의 교회의 연합과 체코 개혁교회 신학부 설립에 힘썼다. – 그리고 그는 사명감과 애국에 대한 열망으로 구교도 세력과 세속적 권력에 대항하였다. 1852년 체포되어 1853년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로 이송된다. 1857년 출소한 이후 프라하로의 귀향이 금지되어 포리니에서 개혁 목사직 수행을 받아들인다. 1861년 체코 개혁 교회 내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었지만 정식 인준은 받지 못하고, 1891년 독일에 있던 아들 곁에서 숨을 거둔다. – 꼬슈트 이래로 끌리멘트 교회에서는 뛰어난 목사들이 활동하였다. 이들 중 한 명이 1894년부터 활동하였던 요세프 소우첵 (Dr. Josef Souček) 박사로, 두 개혁 교회가 연합된 이 후 1918년 첫 체코 형제개혁교회 대표 모임의 장로로 선출된다.
1918년부터 끌리멘트 교회는 체코 형제개혁 교단의 소속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1975-80년까지 프라하시의 도움을 받아 고고학 연구팀과 함께 대대적인 공사를 하게 된다. 1990년 오늘날의 온화한 형태로 건물 정면도 공사한다. 1578년 (1575년 체코 신앙고백 이후) 부터 교회 정문 현관에 새겨져 있는 성서 말씀으로 지난 개혁의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이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공동번역)’ 1장 24절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다 (Slovo Páně zůstává na věky). 이후 1606년, 1609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두 묘비는 체코 형제단에 입교하였던 흐라데쉰 출신 귀족부인들의 유적이다.
1609년에 만들어진 교회의 성구 보관실 문의 오래된 부조물도 귀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벽에는 14세기부터 희귀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있는 앱스(교회당 내부의 반원형 부분:역자 주)가 있었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못 박히고 부활하신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다; 뒷편에는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하는 세 천사가 그려져 있다.
교회로부터 50미터 정도 내려오면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 18번지에 끌리멘트 교회 목사관 및 일반 주거지 건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