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2 히베른의 집, 화폐주조소 부꼬이 성

2. 히베른의 집, 화폐 주조소 부꼬이 성
(Dům „U Hybernů“, Někdejší mincovna Buquoyský palác)

화약탑 건너 편 공화국 광장 동쪽으로 제정 양식의 거대한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이는 히베른의 집(U Hybernů)이다. 이는 1355년 까렐 4세가 로마에서의 대관식을 마치고 암브로시오 전례를 따르는 베네딕트 수도회를 위하여 성 암브로시우스 교회와 수도원이 있던 자리이다. 후스의 종교 개혁 운동 초기에 이 교회가 중요한 의미를 얻은 이유는 1419년 초 바츨라프 4세가 후스주의 신봉자들의 요구에 따라 이 교회에서의 양종 성찬을 허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만 해도 양종 성찬은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와 왕정(Kralův dvůr)의 북쪽에 위치하였던 성 베네딕트 교회에서만이 가능하였다. 그 이후 성 베네딕트 교회는 철거되었고, 단지 지금은 거리 이름으로 교회에 관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베네딕트 거리- Benediktská ulice))

1차 후스 전쟁 시대에 암브로시오 베네딕트회 사람들은 프라하에서 추방 당하였다. 이단 형상들을 모두 없애고 프라하 내 교회의 조각상들과 그림들을 불태운 지그문트의 십자군 원정대를 막고, 프라하인들을 돕기 위하여 후스 급진파들은 1420년 성 암브로시아 교회 앞에서 집회를 가진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구시가와 신시가에서 후스파들의 큰 집회가 열리곤 하였다.

이후 뽀뎨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 왕은 암브로시오 수도원을 프란치스코회에 기증한다. 그러나 이들은 블라디슬라프 2세가 집권하였을 무렵인 프라하 전쟁시대에 성찬잔에 대한 설교로 1583년 프라하로부터 추방당한다. 반종교개혁 시기였던 1630년 수도원은 히베르인들 (아일랜드 – 라틴어로 히베르니아 Hibernia, 여기서 히베른 이란 이름도 파생되어 나옴.) 이라 불리웠던 아일랜드의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을 위하여 재건되었다. 요세핀 개혁 당시, 수도원은 해체되고, 암브로시아 교회는 이단으로 배척당하였다. 1789년 부터는 체코 극장으로 이 곳이 활용되기도 하였는데 이라섹의 소설 „F.L.Věk“을 극화한 작품에서 유명해진 바츨라프 트함(Václav Thám)과 춤의 명인 부토(Butteau)도 또한 이 곳에서 공연 하였었다.

화약탑(Prašná brana)을 지나 첼레뜨나 거리(Celetná ulice)로 가보자. 이 곳에서부터 구시가 광장을 지나 프라하 다리를 건너 소지구외 흐라차니까지 이르는, 체코 지배자들이 지나다닌 王道(Královská cesta)가 시작된다. 한 100미터쯤 지나 왼편에 있는 36/587번지 집 앞에서 멈추어보자. (이 집은 아케이드와 거리쪽으로 난 발코니가 있고, 마치 그 집의 과거를 말해 주는 듯 군사들과 그의 대장의 조각상이 있다. )

원래 고딕식 집이었던 벨플로비츠의 집은 1409년 바츨라프 4세가 왕정으로 편입시켜 체코 왕비들의 궁정(Dvůr českých královen)으로 탈바꿈하였다. 후스중의 시대 초기에는 구시가로 편입되고, 1420년부터는 후스의 주조소(husitská mincovna)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759년 주조원이었던 라요프의 파흐따(Pachta z Rájova)에 의하여 재시공된 동전 주조소의 벽면에는 오보츠니 뜨르흐 거리쪽으로 이런 현판이 있다. : 이 곳에 후스주의 시대인 1539년부터 1784년까지 동전을 만들던 주조소가 있었다.- 체코 화폐 100년의 기억. (1848년 이 주조소 앞에서 혁명 봉기 초기에 합스부르크 장군이었던 빈디쉬그뢰츠가 프라하 사람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바로 옆 건물은 1403 년부터 체코 영토 출신 학생들을 위한 체코 민족 대학 기숙사(Univerzitní kolej českého národa) 로 쓰였던 곳이다. 이 기숙사는 체코 개혁 당시 양종 성찬 교회의 학생들에게 제공 되었다.

첼레뜨나 거리 반대편으로 바로크 스타일의 집인 25/590번지 집이 있다.: 네 기둥의 집. (U čtyř sloupů) 이 집은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및 신학자였던 독일-이탈리아 계인 베르나르드 볼자노(Bernard Bolzano)가 살았고, 삶을 마감한 (1848년)곳이기도 하다.
그는 프라하 대학에서 계몽주의 신학 교수였으며, 독일과 체코 대학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보헤미즘’을 주창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체코 땅 안에서 두 개의 민족이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첼레뜨나 거리를 따라 약 100미터정도 내려오다 보면 20/562호 집이 있다. 이 곳은 빌라 호라 전투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랑스 전투 사령관이었던 부꼬이 백작이 소유하였던 부꼬이 성(Buquoyský palác)이다. 부꼬이는 운명적인 빌라 호라 전투에서 황실 군대장으로 있었다. 신교도들을 누르고 승리로서 얻은 여러 재산중에 이 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1762년 이 집은 대학의 소유가 된다. 1880년부터 이 곳에 왕립 체코 교육 학회가 자리 잡는다. 몇몇 정보들에 의하면 이 집은 체코 개혁 당시 체코 형제단의 큰 후원자이자 리또미슐 지역 영주였던 뽀스뚜삐체의 보후슬라프(Bohuslav z Postupic)의 소유였다 한다. 형제단 교리에 관한 협의를 위하여 루까쉬와 바츨라프 끄라쏘니츠(Lukáš a Václav Krasonický) 형제가 지도하는 형제단의 임원들과 그리고 대학 교수들과 전문가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와 함께 이 집에서 모임이 열렸다. 1504년 새해 첫 날, 모임은 이루어졌지만 별 진전은 없었다. 그 밖에 여러 해 동안 다양한 회의가 이 집에서 진행 되었었다. 1547년, 시 당국 대표들이 독일의 슈말칼덴 신교연합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페르디난드 1세의 도움을 거절했을 때, 중요한 회의도 이 곳에서 열린다. 뮐베르그 전투에서의 승리 후 페르디난드는 꼬스떽의 재산까지 몰수해 버림으로서 그를 응징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집도 그 때 몰수당한다. 17세기 초에는 프리드리히 팔츠끼가 집권하던 무렵 체코 왕실의 부총리를 역임하였던 미할로비체의 보후슬라프 (Bohuslav z Michalovic)가 이 집을 소유하였었다. 그리고 반합스부르크 봉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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