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살바또르 개혁교회 교회당
(Evangelický kostel U Salvátora)
띤 거리 (Týnská ulice) 코너에서 북쪽 구시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쪽 후스 동상 방향으로 서쪽 파지슈까 거리(Pařížská ulice)까지 걸어간다. 여기서 약 100 미터 정도 거리를 따라 걸어가다가 오른 쪽으로 돌아 꼬스떼츠나 거리(Kostečná)로 들어선다. 들어서면 바로 제일 큰 프라하 개혁교회 교회당 우 살바또라 (U Salvátora : 라틴어로 salvator는 구원이란 뜻이다)가 서 있다. 이 건물의 역사 역시 체코 귀족 반란과 구시가 광장의 처형과 관련되어 있다.(I/4)
독일 르네상스 고딕 양식의 원래 교회당은 1611-1614년에 프라하 독일 루터교인 루돌프의 „황제 칙령“ (1609) 발표 직 후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루터교회 교인의 대표는 요하킴 안드레아스 쉴릭(Joachim Andreas Schlick – 체코이름은 Šlik 이다)이 되었다.
슐릭의 가문 문양은 오늘날 까지 교회당 지붕 뒷편에 보존되고 있다. 부유한 은광 소유자인 야히모브와 북서 체코의 몇몇 영주들이 이 가문에 속하였다. 이와 같이 체코 루터교인들이 사용할 대표적인 루터교 교회당의 건축에 해외에 많은 개혁 교도들이 헌금을 하였다.
슐릭은 체코의 독일 개혁교회 교인의 대표로서 반 합스부르크 귀족 반란의 지도자 가운데 속하였다. 프리드리흐 팔쯔끼(Fridrich Falcký)의 짧은 정복기간에 (1619-1620) 최고 높은 재판관이었다. 그래서 빌라호라(백산전투) 이 후 처형 귀족 명단에 첫번째로 그의 이름이 올랐다.(I/4) 당시 살바또르의 목사는 다빋 리빠흐(David Lippach)였다. 그는 1621년 6월 21일 구시가 광장 처형에서 슐릭과 다른 4명의 독일 귀족을 목회자로 그들을 돌보는 것을 허락 받았다.
일반적으로 교회당이 건축되면 어떤 성인에게 봉헌되어 교회당 이름을 그 성인의 이름으로 명명한다. 그러나 이 개혁교회 교회당은 성인이 아닌 구원자에게 봉헌하여 교회당 높은 지붕에 라틴어로 구원, 예수그리스도가 적혀있는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 교회당 동쪽 끝에 쑥 내민 반원형의 부분에 사도행전 4장 12절을 인용하여 기록하였습니다:
Non enim est in alio aliquo salus –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축복하는 구원자의 그림 뒤에 봉헌 상징: Sacrum DNORO(Domino nostro) Salvatori totius mundi Christo – 우리의 주,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께 드립니다. 반대편의 인용은 이사야 49:23: Reges erunt nutricii tui –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의 프라하 개혁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빌라호라 전쟁 시대를 거쳐 리빠흐 목사가 추방을 당하는 1622년까지 살바또르 교회당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 기간 중에 신자들은 슐릭의 시신과 구시가 광장 처형 후 경고로 12명의 핵심 귀족들의 머리와 함께 교각 탑에 매달려 있던 그의 머리를 가족이 끌어 내리도록 허락 받아 교회당의 무덤에 묻었다.(IV/4)
반 종교개혁 초기에 프라하에서 쫒겨난 살바또르 교회의 목회자와 대부분의 교인들(독일인들과 체코인들)은 루터교인들이 그들에게 성 얀 교회당을 사용하도록 빌려준 드레스덴의 섹슨 족 지역에서 피난처를 발견하였다.후에 그들의 망명 교회의 후손들이 드레스덴에 프라하 살바또르 전통과 관련해서 „Erlöserkirche“ – 구원자의 교회 – 이름을 지은 자신들의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빌라 호라 전쟁과 반종교개혁 선언 이후 살바또르 교회당은 이웃하는 바울회 수도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30년 전쟁중에 1631년에 색슨족의 종교개혁교도 군대가 프라하를 점령하자 많은 이주 개혁교도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교각 탑에 매달려 있던 처형당한 귀족들의 잘려나간 머리를 장례 지내고 살바또르 교회당의 무덤에 묻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이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고 20세기에 수리를 하면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17세기 말에 바울 수도사들이 바로크 양식의 교회당을 인수하여 자신의 수도원과 왼쪽 갤러리를 계단 통로로 연결시켰다. 요셉 2세때 수도원을 취소한 후 자신의 거주지로 하면서 교회당 공간을 국가 주화 제작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관용의 칙령 발표 이후 1781년에 다른 프라하 루터 교인들이 다시 개혁교회 소유로 교회당을 얻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00년이 지난 뒤, 개혁교회 칙령(1861. 4. 8)이 발표된 후 프라하의 개혁 루터교회 교회당으로 돌려 받았다. (그 무렵 이 교회의 유명한 교인으로 역사가 프란티쉑 빨라쯔끼(František Palacký)가 있다.)
1918년에 체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들이 체코형제 개혁교단으로 통합된 뒤 살바또르 교회는 총회 예배와 대에 전체교회들의 도움으로 교회당이 수리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