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25)

2013년 12월 25일 오늘의 말씀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편 66편 12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0장 27-28절)
묵상
오늘 시편 본문은 마치 옛날 빛바랜 사진 한장을 보는것 같습니다.
이 시편이 낭독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수백년 동안 고역의 노예생활을 했던 자신의 조상과 역사를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과거 공산독재시대 속에서 자유를 잃고 살아갔던
체코 교회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자유의 날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않았을 것입니다. 
자유가 억압당하고 있는 북한에서도
진실한 신앙을 붙잡고 있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도
아마 이 말씀을 의지하며 자유없는 고통을 견디고 있을 것입니다.
말못할 인생의 환란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이 말씀을 희망으로 삼고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환난과 고통들은
원인과 이유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들어 의사들의 노력에 의해 질병 하나가 퇴치되면
그 결과 많은 새로운 질병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인간의 과학과 철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고통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환란과 고통은 무궁무진하고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해결하시기 위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의 역사를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그 사건이 “아기 예수 탄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시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안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 분의 음성만을 들으십시요.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은 과학과 이성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또 다른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다른 세상 가치관의 방식을 통합시킵니다.
인간의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역사의 신비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여러분 인생을 위한 크리스마스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베셀레 바노체.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24)

2013년 12월 24일 오늘의 말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68편 20절)
홀연히 수 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2장 13-14절)
묵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모두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할까요?
우리를 위한 크리스마스는 무엇인가요? 
우리 모두는 누구나 예외없이 각자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있습니다.
악한 생각과 온갖 죄악과 거짓 증언과 비방을
날마다 생산하고 있는 우리 마음 (마 15:19)은 우리 스스로 벗을 수 없는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들이 고통과 위기와 염려와 두려움을 수반하고 있어
인생 살이 그 자체가 짐입니다.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짐을 져주시는 분의 탄생입니다.
그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고단한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인생의 짐이 벗어지고
상상하지 못한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가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축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도제목
1. 오직 예수,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의 짐을 벗고 하늘의 평화를 맛보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원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21)

2013년 12월 21일 오늘의 말씀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출애굽기 24장 21절)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
(마가복음 2장 27절 하반절)
묵상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날에 복을 주시기 위해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 복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분명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날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먼저 만드신후에
그 인간을 위해 천지를 창조하신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후에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인간이 삶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감사하며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안식일” 제정 속에 담으셨습니다.
신명기 16장은 이 날을 “함께” 쉬라고 하였습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쉼은 단순히 육신적 정신적 휴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날입니다.
“관계의 회복” 없이 영혼의 참된 쉼은 없습니다.
인간관계의 깨어짐의 근본적인 원인이 “죄” 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우선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안식일은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고린도전서 2장 9절에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고 탄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주님의 날과 그 날의 은혜를 진심으로 갈망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주님의 날이 “노는 날”이 아니라 모든 것을 회복하는 날이 되게 하옵소서.
2. 주님의 날과 예배를 진실로 갈망할 수 있는 심령을 허락하옵소서.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20)

2013년 12월 20일 오늘의 말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디모데전서 4장 16절)
묵상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무언지 모르게 불편함이 느껴집니다.
첫째는 우리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때문에 오늘 본문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 구약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본문에 따르면 신앙생활은 타인의 피드백에 의해
그 진실성이 서로 드러나는 집단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개인구원”으로 오리엔테이션 되어있는 성도들은
오늘 본문들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려고 노력해본 성도들은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비유를 하자면 “강을 건넌후에 타고 온 배를 버리는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맙고 아까워도 강을 건너면 불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의 교리(敎理)로
보수(保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사회구원”과 “개인구원”의 신학적 주장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비유로 설명하자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갓난아기때와 청소년때와 청년의 때와
결혼하였을때의 부모와의 관계성의 그 내용은 달라져야 합니다.
사춘기때의 부모에 대한 반항심을 결혼후에도 지니고 있으면
자녀로서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교리”는 불변의 “천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의 내용은 자신의 믿음안에서 자꾸 성장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 일들을 실천하고 그것에 전심전력을 다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하십시오
발전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바른 믿음은 발전하는 믿음입니다.
기도제목
1. 성장하는 바른 믿음을 가졌는지 자신을 깊이 성찰하십시다.
2. 세상과 가정과 교회에게 영향을 주는 성장하는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주 성령이여 나를 도우소서… 기도하십시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12.19)

2013년 12월 19일 오늘의 말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사야 55장 11절)

두아디아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사도행전 16장 14절)
묵상
우리 기독교의 신앙 가운데 하나가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말은 “무한한 자원” 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준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절 상반절의 말씀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믿음은 “말”로 고백되고 표현됩니다. 
그 믿음의 말은 곧 창조주 하나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것은 물질적 축복이 아닌
바로 이 “하나님의 말”을 담지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은 공허하지않고 그 말속에 “의도(뜻)”와 “실상”이  담겨있습니다.
말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 말”의 중요한 목적은 사람과 피조물에게로의 “전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자들입니다.
말은 씨앗과 같아서 후에 열매가 나타납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의 말이 당장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바로 성도의 말이 그와 같아야합니다.
성도는 “말”을 신중하게 해야합니다.
“나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열매를 맺어주려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어야 가능합니다.
“말”에 조급함을 갖지않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의 담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내 마음에 담지하려면,
성도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이 열어주시기를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이 내 안에서 육화되지 못한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빈껍데기이며
소란하게 굴러가는 빈수레의 소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을 담지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의 말을 담지하는 성도가 되도록 인도하소서.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열어주소서
3. 나의 말이 믿음의 말,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있는 말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