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4.24)

2013년 4월 24일 오늘의 말씀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편 23절)

(이에 베드로가)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사도행전 4장 9-10절)
묵상
우리나라의 집들이나 집안 물건들을 보면
창문 문양, 도자기 그릇, 옷, 베게, 돗자리 …등에 
“복(福)” “길()자를 문양으로 많이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체코의 가정들은 “영원(věcnost)”를 사용합니다.
부엌의 접시들, 목욕탕의 용품들을 보면 “비예쯔노스뜨(영원)”라는 단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과 “영원”은 기대하는 것은 비슷한것 같지만 
그 의미를 보면 한국과 체코의 다른 문화와 의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은 건강하고 재물이 넉넉해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복과 길을 사용하는 뜻은 현재 보다 더 충족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영원”은 건강이 현재 처럼 계속 지속되고, 
물건들이 낡아지지 않아 계속 사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모든 것이 현재의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인과 체코인의 “복”에 대한 개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재보다 더 충족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복을 생각하고 있다면 
현재를 감사하는 마음은 상대적으로 적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보다 더 진보하려면 현재의 상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상태가 비천한 모습일지라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모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비록 비천하고 힘든 현재의 모습일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죽이고 무신론을 선포하지만
하나님은 죽지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자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도덕적 수준이나 선행이나 스스로 깨달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표현이 현재의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표현인 감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인간들도 자녀에게도 가장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당신의 음성이 저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이 새벽입니다.
당신은 제가 시련을 견딜 줄 알고
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저의 능력과 열심이 부족함이 아니라
당신의 은혜로 얻는 저의 희망이 족하여
이 시련을 주심니다.
시련을 당할 수록
어떻게 당신이 일하실지 너무 기대되어
내 가슴이 뛰는 이 새벽입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감사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의 삶을 나의 목표로 삼게되니 감사
힘들고 어려운 체코 동역자들과 그 교회들을 버려두시지 않을 줄 믿고 감사

하버드 신경외과 의사의 체험기 – 나는 천국을 보았다

▲  이븐 알렉산더 박사는 <나는 천국을 보았다>를 통해 자신의 임사체험이 “뇌가 꺼져도 의식이 계속 존재한다는 결정적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의 삶이 육체나 뇌의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게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www.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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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귀신 이야기는 무서웠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죽음 이후에도 어떤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해서다. 어떤 안도감을 느낀다고 할까.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 임사체험(臨死體驗)이 곧잘 관심을 끄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김영사’가 내놓은 <나는 천국을 보았다>는 강력한 상품성을 갖고 있다. ‘임사체험’ 주인공이 ‘하필’ 뇌의학 권위자이자 신경외과 전문의다. 지난해 10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이 사람의 ‘사후세계 체험기’를 표지기사로 실었다는 점만 봐도 그 뉴스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저자 이름은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 의학박사로 하버드 메디컬 스쿨에서 교수와 의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과학 학술지에 150여 편이 넘는 논문을 게재했고, 국제 의학 컨퍼런스에서 200회 이상 연구 발표를 하는 등 뇌의학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은 인물이라고 한다. 저자 표현대로 “과학에 헌신하는 삶”을 산 이가 뇌사 상태에서 영적 세계를 여행한 내용을 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과학에 헌신하는 삶을 산 이가 임사체험”

▲  <나는 천국을 보았다>의 이븐 알렉산더 박사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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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미네이터2>는 용광로에 스스로 몸을 던진 기계 인간의 최후를 한줄기 빛마저 완전히 사라지는 암전으로 표현했다.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저자에게는 죽음이란 걸 가장 ‘정직하게’ 묘사한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애당초 의식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뇌”란 확고한 ‘고집’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몸이 죽은 후에도 우리의 무언가가 살아남는다는 담론 속에 일말의 진실성이 있을 수 있음을 단 한 순간도 마음을 열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임사체험은 “뇌에 기반한 현상” 또는 “뇌가 만들어낸 환각”이었으며, 그저 아직은 알 수 없는 이야기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저자가 스스로 ‘N of 1(단 하나의 사례)’이 된 것은 2008년 11월. “성인이 자연발생적으로 걸리는 비율은 연간 천만 명 중의 한 명 꼴 이하”인 대장균성 박테리아성 뇌막염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7일 째에 이르러 다시 깨어나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동안 저자의 뇌는 “잘못된 방식으로 작동한 것이 아니라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또는 “인간의 고유한 면을 담당한다고 설명하는 그 부분은 완전히 나가 버린 상태”였다고 한다. “대뇌 신피질이 이미 꺼져버린 상태”를 엑스레이 사진, 병원 기록, 신경 기록 등 모든 의학적 자료들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저자는 특히 강조하고 있다.

“뇌가 꺼져도 의식 존재한다는 결정적 증거”

저자가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의학적으로 뇌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임사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임사체험이 뇌가 만들어내는 환각이라면, 그 환각을 만들어내는 뇌가 완전히 멈춘 상황에서는 논리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의식에 관한 과학적 금기를 깬 사건”이란 설명이다.

“내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의 내용이 아니라, 의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모든 것을 단순한 망상이라고 주장하기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또한 자신의 경험이 여타 임사체험과도 차이점이 있다고 강조한다. “보고된 임사체험의 상당수는 잠시 동안 심장이 멈췄을 때 발생”했지만 자신의 경우는 달랐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다른 임사체험과 달리 “지상에서의 내 정체성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임사체험이 “물리적 뇌의 한계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의 세계와 직면한 것”으로 “뇌가 꺼져도 의식이 계속 존재한다는 결정적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의 삶이 육체나 뇌의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게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자궁”

▲  최근 김영사가 내놓은 <나는 천국을 보았다>. 하버드 신경외과 의사의 ‘사후세계 체험기’를 담고 있다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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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있었을 때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물도 아니었다. 나는 사람이나 동물 이전의, 그 이하의 어떤 것이었다. 나는 그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적갈색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주시하는 의식 그 자체였다.”

저자의 임사체험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처음에는 “이따금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리기도 하는” 무서운 곳이었지만, 얼마 후 빛의 세계로 들어갔고 이어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가장 이상하고, 가장 아름다운 세상”에 놓이게 됐다고 한다. 중간 중간 상세한 묘사도 인상적이다.

“검푸른 하늘 사이로 뭉게뭉게 피어오른 분홍색과 흰색의 큰 구름들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 구름들보다 한참이나 위에서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투명한 구체 모양의 존재들이 활 모양을 그리며 하늘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그 뒤로 기다란 선을 남겼다.”

이어 저자는 “나비 날개 위의 안내자”를 만나 “그대는 사랑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저자의 임사체험은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그는 “자궁 속의 태아가 존재하는 것과 유사했다”면서 “태아는 말없이 영양을 공급해주는 태반과 더불어 자궁 속을 떠다니는데, 태반이 연결해주는 어머니는 사방에 있으면서도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전하고 있다.

서구 의학자로서 ‘자기 반성’ 돋보여

▲  영화 <터미네이터2>는 용광로에 스스로 몸을 던진 기계 인간의 ‘죽음’을 한줄기 빛마저 완전히 사라지는 암전으로 표현했다
ⓒ 세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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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자는 임사체험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나 얼굴을 내비치는 사람들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였다”며 영적인 세계를 확신하게 된 배경에 종교적 ‘과거’와 무관함을 강조한다. 그 곳은 ‘완전한 실제(Ultra-Real)’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확신을 갖는 두 가지 이유로 “첫째는 내가 관문과 중심 근원에 있었을 때 가르침을 준 존재들이 나에게 이것을 보여줬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그것을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꼽고 있다. 과학적 또는 의학적 논증을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다소 실망스럽게 읽히는 대목이다. 결국 믿음의 문제로 ‘다시 한 번’ 귀결되는 셈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성급하게 덮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서구 의학자로서의 ‘오만’에 대한 자기반성이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물리적 영역에만 토대를 둔 과학적 방법론이 지난 400년간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라며 “내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과학과 내가 저 너머에서 배운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이 모순된다고 믿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실재로서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자의 결론에는 오히려 힘이 실린다. “뇌로부터 구속된 세상에 살다보니 그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렸다”는 글은 ‘안도감’을 주기 충분하다. 죽음 이후에도 어떤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세계적인 뇌의학 권위자의 말이니 말이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4.23)

2013년 4월 23일 오늘의 말씀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편 119편 130절)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히브리서 2장 1절)
묵상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어본 경험들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삶을 어둠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살기는 살지만 죄와 무분별함과 죽음의 그림자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무지 판단력이 없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조정할 힘마저 없이
무엇에 홀린듯 되는대로 감정에 이끌려 사는 삶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욕망을 인생의 목표로삼고 
자기 성찰 없이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삶도 있습니다.
모두 어둠 속을 걸어가는 인생의 모습들입니다.
갑자기 어둠 속에 갇히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둠을 밝히는 불을 찾습니다.
촛불을 붙이거나 손전등을 찾습니다.
인생의 어둠에 갇힌 사람들 역시 빛을 찾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둠을 밝히는 빛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이어서
빛 아닌 것을 빛으로 삼으며 어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어둠을 비추는 빛을 경험한 
특히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어둠에 갇힌 사람들이 이 빛을 찾게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것입니다.
요즈음 처럼 인쇄물이나 시청각자료가 발달되지 못한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가슴에 새기어 기억하는 것입니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눈과 감각을 자극하는 시청각기재가 발달된 오늘날도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욱 어렵지만
그 당시에도 귀로만 듣고 가슴에 새기어 기억하는 것이 어려워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인간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 몸은 십자가에 죽고 다시 부활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죄 용서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읽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활자가 아니라 우리의 어두운 심령을 비추는 영입니다.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임재와 그 능력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천들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 인생은 원래부터 당신을 거부하는 질병에 걸려있습니다.
이 질병은 인생의 어둠을 
어둠으로 보지 못하는 중병으로 발전됩니다.
욕망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성장하면 죽음을 낳는다는
당신의 말씀처럼 우리 인생은 그렇게 어둠 속을 걷고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매일같이 당신의 말씀으로
저를 권고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제 양심을 가책하고 죄를 깨닫지 않게하면
저는 어둠 속을 헤메는 인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저에게는 두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어둠을 비추는 빛인 당신의 말씀이 
저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당신의 말씀이 저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것이 저의 의지로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당신께 소원으로 간구합니다.
당신의 말씀이 나를 붙잡아
내 인생이 당신과 사람들 앞에서 
큰 실수함이 없이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4.22)

2013년 4월 22일 오늘의 말씀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위기 26장 12절)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로새서 1장 19절)
묵상
하나님은 “나는 너희 중에 행하겠다”고 
자신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에덴)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 (창 3:8)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것” (계 21:3)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행하시는 길을 
찾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때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행하시며 인도하였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길을 우리들 가운데 만드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행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지금 바로 여기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
주님,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당신입니다.
내가 당신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당신은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용서와 사랑의 보혈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당신을 벗어나도
당신의 용서의 사랑이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그 사랑에 눈물이 흐르는 새벽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이 있게하시니 감사

꼬빌리시 새벽묵상 (2013.04.19)

2013년 4월 19일 오늘의 말씀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레위기 19장 14절,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것은 
더러움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7-8절, 표준새번역)
묵상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앞을 보지 못한다고 그 길에 장애물을 두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구원의 반열에 불러주신 사람들의 모습이 그래서는 안될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모습이 성도인 나 자신안에 없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모이는 모임인 교회는 
이런 모습이 없는지 질문하게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익명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대형교회를 
찾는 다고합니다.
조그마한 해외의 한인교회에 발을 들여놓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교인들이 뒤에서 수근거리는 것이 싫다고 합니다.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대화하려하지 않고 
불만과 불평을 뒤에서 늘어놓습니다.
마치 듣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별의별 험담을 합니다.
사실을 침소봉대 하고, 없는 것조차 보태지지기도 합니다. 
장애물을 만들어놓고 넘어지게 만들고, 결국 분쟁을 일으킵니다.
분쟁이 생기면 그때부터 불구경하듯 남의 이야기 하듯 비판합니다.
모든 분쟁의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이것이 소위 성도들이 모이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국가조찬기도회에 모이는 분들을 보면 
우리나라 고위공직자들 가운데 성도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요즈음 신조어가 “강남 크리스천”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실세들 가운데 “강남 크리스천”들이 많은데서
나오는 신조어입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부정부패의 비리에 얽힌 인물들 가운데
“강남 크리스천”들이 등장합니다.
인사청문회에서 낙마한 인물들 가운데도 성도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것은 더러움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죄를 짓지 않는 다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붉은 주홍빛같은 죄를 지었을 지라도
죄를 지은 사실때문에 죄인으로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회개가 있다면 용서와 사랑으로 용납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이며 교회는 바로 이 정의를 세상 속에 세워나가야 합니다.
우리 꼬빌리시 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입니다.
자신있게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한 죄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고 용서하는 은혜가 있는 곳은 오직 교회 밖에 없습니다.
잘못을 끝까지 낙인찍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기도
주님,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가
저의 심령 깊은 곳을 비출때
비로서 나는 죄인임을 알게됩니다.
당신의 은혜는
죄로 얼룩진 나의 마음을 찌릅니다.
그러나 신통하게도
아프지만 시원하고 통쾌합니다.
막힌 눈물샘이 터집니다.
막힌 가슴이 열립니다.
참된 회개는 치유이며 
용서의 은혜의 물꼬를 트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회개를 하고
서로 용서와 용납으로 막힌담을 무너트리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개인과 교회와 사회와 민족 가운데 
일어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교우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섬기게 하시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