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의 꿈과 특징 소개, 찾아오는 길, 보흐니쩨 선교보고 등 읽을만합니다. 12월 2일 토요일 바자회 안내가 있습니다.
프라하 한인교회 | 체코 교회와 함께 호흡하는 한인 공동체

우리교회의 꿈과 특징 소개, 찾아오는 길, 보흐니쩨 선교보고 등 읽을만합니다. 12월 2일 토요일 바자회 안내가 있습니다.
061119
본문:사도행전 2장 1~13절
제목: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교회
<성경>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설교>
지난 주일에 읽었던 1장 말씀가운데서 13절부터 15절말씀까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들이 묵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와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 /이들은 모두, 여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에 힘썼다.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백이십 명쯤이었다.>
한번 여러분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들은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긴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긴장은 없던
긴장이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계실 때 부터 불거졌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옥의 땔감처럼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그들에 대한 편견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백이십명은 마음에 큰 상처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 조차 형성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이십명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불과 얼마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고 사형에 처할 만큼 중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재판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친 사람도 그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악의 세력에 패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고 자기를 합리화 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다윗왕국의 옛 영화를 가져올 정치적
메시야라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고집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대하고 의지했던 부활하신 예수님마저 이제
훌쩍 하늘로 올라가시자 그들은 희망을 상실하였고 절망을 맛보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 스스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토록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이들은 서로 대화하기 힘든 사람들이었고 더구나 이 모임이 예루살렘 사회와 소통이 가능하지 못할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한 자리에 모여있지만 마치 모래알처럼 나뉘어져있고 깨진 질그릇처럼 마음들이 산산히 부서져있는
이들 백이십명이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는 놀랍고 신비한 현상이 있는 성령강림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때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2~4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날 성령이 강림하시던날 한 마음으로 힘써 기도하던 백이십명 신도들이 성령충만함으로 성령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방언>란
(체코어 성경번역을 보면 그 의미가)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던 다른나라 언어입니다.
오늘 본문을 꼼꼼이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방언으로 말하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로 생각을
하는데 오늘 본문 5절부터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와서 살았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 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서,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보십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2:5~8)
이것은 오순절날 성령강림으로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교회가 탄생할 때 동시에 나타난 성령의 기적을
통해 세상속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 본문은 우리들에게 잘 보여줍니다. 교회가 있는 사회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교회를 둘러쌓고 있는 인간사회는 의사소통의 부재로 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의사소통의 수단이 언어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외에서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한국말(일본말)입니다. 그러나 같은 한국말(일본말)을 해도 말이 잘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고
오해가 생기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반면에 정말 표현능력이 제한된 외국어로 외국인들과 대화를 할 때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의 도구는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언어 뒤에 있는 마음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은 언어가 틀려 서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엄청난 정치 사회 경제적인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어를 배경으로 하는 마음이 서로 통하지 않아서 싸우는 것입니다.
어머니 태에서 응아~하고 갓 태어난 아기처럼 이제 이 세상에 교회가 탄생하자 마자 그 교회와 예루살렘 사회가 말이 통하고 말
뒤에 숨어있는 마음이 통해서 의사소통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대화가 통하지 않던 이웃과 세상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자기들끼리만 교제하고 사회와 격리된 문화를 가지고 신앙인의 언어가 자기들끼리의 암호
내지는 은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인간의 현실과 자꾸 멀어져만 가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들의
언어와 복음이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 소통하고 있는지 아니면 너무 떨어져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회와 그토록 잘 통하던 교회의 언어가 이해할 수 없는 자신들의 언어로 변한 것이 고린도교회의 방언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은 그 뜻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이었습니다. 오순절 방언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했는데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역작용을 낳았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방언을 함으로써 의사소통에 방해를 받고, 대화의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이들은 방언이 제일이다 다른 은사가 더 낫다 하면서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 18절과 19절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의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단절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잘 알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복음이 잘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이지 슈토렉 목사님께서 체코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반종교개혁의 박해와 사회주의의 통제를 경험한
체코교회는 경계심과 염려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데 모든 관심을 기울여 자발적으로 게토화 되었고 그
결과 사회에서 교회의 신뢰를 상실하였다> 1620년부터 1 9 1 8년까지 지속된 반종교개혁시기의 극심한 박해를 견디고
1945년부터 1989년까지 사회주의의 통제를 받으면서 오랫동안 자신의 믿음을 다른사람에게 전하여 새교인을 영접해 본 경험이 없이
교회의 생존이 지금까지 그들의 지상 과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인들이 서로 결혼을 하여 교회는 거의
친인척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사회와 대화가 단절된 교회입니다.
처음에 저는 체코에와서 몇 년동안 체코선교를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되는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게토화되고 폐쇄된 체코교회에
주목하였습니다. 체코선교는 다른 나라와 달리 먼저 사회의 섬처럼 존재하는 체코교회가 사회와 소통할 수 있도록 교회의 벽을 허무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 가능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주위의 체코 슬로바키아 모든
교회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먼저 체코에서 활동하신 미국과 서유럽 선교사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체코교회와 교회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깊이 파트너십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체코사회의 소수인 개신교이지만 그 중에서도 90퍼센트 이상의 교세를
차지하고 있는 주류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체코개혁교회와 함께 일하도록 저를 이끌어주셨고 더욱이 그 교단 소속의 꼬빌리시 교회에
한국인들을 비롯해서 일본교우들 그리고 다른 나라교우들을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보다 한 세기 먼저 시작한
종교개혁의 시발 교회이자 개신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체코교회와 소통하도록 많은 교회들과 크리스쳔들이 있지만 왜 하나님은
교회역사도 짧은 아시아인인 우리들을 불러주셨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비록 미약해 보이지만 우리의 헌신은 상상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사도요 전도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무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발길이 닿았던
곳은 지중해 연안이었으며 그의 최종 전도지 목표는 이탈리아의 로마였습니다. 저희들이 한국에서 체코에 온 거리에 비하면 불과
얼마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은 전세계를 복음으로 뒤덮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바울은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던 것 입니다. 그는 모두 한 지역 혹은 한 점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일했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온 세계를 위해 일한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는 사실 한가지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을 이룬 백이십명의 신도들의 처지가 우리들과 많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깨어지고, 연약하고, 상처투성이에, 공감이 가는 어떤것도 없고, 각자가 자기의 성을 쌓으며 살았던 이들 백이십명의
신도들처럼 우리들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공통분모도 없고 심지어 일과 관계속에서 힘들고 참기 어려운 갈등들이 생길 수 있고
그렇다고 서로 피하고 살아갈 수 없는 어쩌면 감옥생활과 같은 그런 이민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무기력한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도구가 되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백이십명 신도들처럼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한곳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며 기도하며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도시입니까? 불과 한달 전에 자신들이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박해했던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머리에 못보다 더 날카로운 가시관을 쓰고 채찍에 맞으면서 피를 흘리며 시청 앞마당에서
사형장소인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셨던 그 길이 바로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습니다. 그 길 위에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 뿌려진 예수님의
피가 아직도 마르지 않고 지워지지 않은 그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수치와 죄를 기억하게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머무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의 성령은 바로 그곳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아픔을 주고, 우리의 허물과 부끄러운 수치와 죄와 고통을
기억하게 하는 우리 땅 우리의 도시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체코와 나아가 동유럽교회를 회복하고 복음을 널리 전세계에
전파하시기 위해 우리를 그 장소 한 가운데 (바로 이곳에)이미 불러모아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땅에서 한 곳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은 올바른 교회를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 성령은 바람처럼 불처럼 강물처럼 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고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방언을 하고, 방언을 통역 하고, 예언을 하고,
귀신을 제압하고,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신앙이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들은 경험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체험이 있는
신자가 되어 모든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크게 말하고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교회의 꿈과 특징을 소개하는 글, 찾아오는 길, 지난주일 설교요약, 김도훈의 편지와 답장, 수요기도회가 금요일로 변경되는 소식, 함께 생각을 나눌만한 짧은 글, 우리교회를 향한 새로운 선교비전의 도전을 가져올 편지, 중보기도와 함께, 교회 소식이 담겨있습니다.
교회주보는 우리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교제의 장입니다. 신앙간증, 기도제목, 생각을 하게하는 좋은 글들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땅끝까지이르러/ (29) 내가 좋아하는 체코 이름(姓) (11)
체코의 많은 이름들 가운데 “페인(Peyn)”이란 이름을 나는 좋아한다. 이 이름은 체코에서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희귀성(稀貴姓)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 매니아를 아마 “폐인”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그 비슷한 발음의 이름이다. “페인”은 원래 18세기 무렵 영국에서 온 선교사의 이름을 체코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자신의 선교지에 묻혀, 그의 이름이 이제는 체코의 많은 이름(姓)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우리 꼬빌리시 교회가 보흐니쩨 정신병원 호스피체에서 상담자 한 사람을 파송 하였다. 남편은 의사이고 두 아기의 어머니이다. 그들은 프라하 2구역에 있는 비노흐라드 교회 신실한 교인이다. 그녀의 이름이 “렌까 페이노바” 이다. “렌까”는 이름이고 “페이노바”는 성(姓)이다. 다른 서구의 나라들 처럼 체코에서도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자의 성(姓)을 따른다. 그러나 체코에서는 남자의 성(姓)에 여성을 표시하는 “~오바”를 붙인다. 그녀가 결혼하여 따른 남편의 이름이 바로 영국 선교사의 후예들의 이름인 “페인”이다.
한 선교사가 선교지에 묻혀 자신의 이름의 가계(家系)를 이룬 것이 이 땅에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나의 이름도 그처럼 체코 교회역사에 올라 갈 수 있을까?” “나도 그처럼 나의 후손들이 대대로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을까?” “아시아의 유색인종으로서 유럽의 백인사회에서, 이제 기독교의 역사가 갓 200년이 넘는 한국의 기독교인으로서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기독교 문명의 사회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것이 체코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추어질까?” “영국인 선교사를 바라보는 체코인들의 시각이 한국인 선교사에게도 같을까?”
주후 80년대부터 체코에 정착한 유대인 디아스포라, 800년대에 그리스 정교회 선교사들의 선교, 중세시대에 로마 카톨릭의 국교, 로마 카톨릭의 십자군과 후스 개혁파들의 전쟁, 후스 개혁파들의 강온파 노선들의 전쟁, 기독교를 전면적으로 부인한 공산정권의 통치, 양차 세계전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기독교 문명에 대해 절망하는 체코교회, 사회주의체제 아래서 기독교 문명 재건을 시도한 체코교회, 지금도 재정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체코교회 – 기독교에 대해 온갖 풍상을 겪고 반기독교의 무신론적인 사회로 뒤돌아 앉은 체코사회이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는 사회이니 아시아 출신의 기독교 선교사는 이 사회에 가장 싫어하는 요소들만 갖춘 셈이다.
그러나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천신만고 끝에 이제 간신히 반기독교의 무신론 사회의 껍질을 뚫을 수 있는 방도를 찾고 준비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제 함께 그 두꺼운 껍질을 뚫고 복음을 심어야 할 일꾼이 필요하다. 체코한국기독협회에서 계획하는 신학연구소(선교센터)에서 그리고 한국문화 소개를 매개로 지역교회들에게 “오픈 하우스” 프로그램을 정착시켜 나갈 수 있는 일꾼이 필요하다. 이 지면을 빌어 공개적으로 구애(求愛)를 하고싶다. 체코선교를 위한 한국의 “페인”을 간절히 찾고 있다.
해외생활의 긴장이 장기화될 때 알게 모르게 변화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문득 문득 발견할 때 마다 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7) 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뒤따르려고 노력한다. 선교사가 대과 없이 선교사의 인생을 마치려면 모름지기 사도 바울의 이 가르침을 뼈에 새기고 핏 속에 흐르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하게 된다.
그동안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으로 흐르지 않으면서 객관적으로 선교일반과 체코선교를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건조하고 지루한 글이 되었다. 귀한 지면에 동참하여 부족하지만 체코선교의 삶을 한국교회와 나눌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한 기독공보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준 독자들에게 감사 드리며 아울러 체코교회와 선교를 위해 많은 기도를 부탁 드린다.
땅끝까지이르러/(28) 체코한국 기독협회 (10)
이 글을 쓰던 엊그제 일이다. 프라하의 한 교회 목회자이면서 교단의 목회자 후보를 지도하는 중책을 맡고 있고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병원, 군대, 형무소 등에서 활동하는 목회자들의 협력과 연대를 위한 연합회 구성을 나와 함께 준비하고 있는 친구 목사가 있는데 그가 교인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재 섬기는 교회를 사임하고 군목을 지원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아마 네 명의 자녀를 양육하기에 힘든 경제문제가 원인일 것이라 짐작이 된다. 이처럼 교회의 사명과 그 실천에 의욕을 가지고 시작한 목회자들이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박봉으로 인한(체코 목회자들의 봉급은 정부 문화부 예산으로 편성된다) 경제적인 현실의 어려움 또는 전통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해 좌절하거나 현실과 타협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좌절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목회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뜻과 희망이 꺾기지 않도록 그리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도록 돕기 위해 체코한국기독협회를 설립하였다. 체코교회는 아직 선교의 개념을 폭넓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리적 관점에서 전도와 선교의 개념의 차이를 구분하고, 주로 기독교 사회봉사를 교회의 사명으로 이해하고 있을 정도이다. 일부 오순절 계통의 신앙 공동체(종교를 담당하는 정부 문화부에 교회로 등록을 하지 못한 기독교 단체)쪽에서 노방전도를 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반감으로 그 효과에 아직 많은 이들이 동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체코교회의 현실에서 교회협력 선교를 위해서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선교의 개념을 일깨워주면서 동시에 선교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작업의 필요성을 시간이 흐를수록 절감하고 있다.
내년 4월에 이 단체 산하에 기독교 교류 활동을 전담할 선교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그 개념과 활동 내용에 대해 관계자들과 진지하게 연구를 하고 있다. 선교신학 소개, 서구의 피선교지 교회들의 발전과 그들의 신학과 교회의 경험 소개, 생존이 지상과제였던 체코교회의 개혁신앙의 경험을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그것을 세계교회들과 나누는 일, 체코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찾는 일, “오픈 하우스” 프로그램 개발과 관리와 지원 등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상하는 선교센터는 신학적인 연구기능과 함께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리고 선교를 위한 체코인들과의 접촉방법으로서 “문화”를 활동의 범위에 넣게 되었다. 막상 선교현장에 와서 이미 오래 전부터 서구 선교의 흐름이 목회자의 활동에서 평신도 전문 사역자들의 활동으로 그 중심의 축이 옮겨가게 된 이유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체코 내에서 활동하는 미국과 서유럽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모국어인 영어와 축구, 농구, 야구, 인 라인, 보드 스케이트 등 젊은 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재능을 선교현장에서 활용하고 있는 평신도들이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정보가 넘쳐 나고 동시에 반 기독교적인 정서가 팽배한 체코사회에서의 선교는 직접적인 복음전달 보다 문화와 다른 전문성을 통한 선교현장과의 만남이 반듯이 우선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직접적인 선교가 아닌 영어나 독일어와 같은 자국의 문화를 매개로 선교지에 접근하는 미국과 서구 선교사들의 경험으로부터 한국 선교사인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를 지나치게 수단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면서 선교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경험한 체코와 슬로바키아인들은 책 읽기를 즐거워하고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체코와 한국의 기독교와 문화를 비교함으로써 독자들이 간접적이지만 기독교와 문화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나눔터 +(플러스)”라는 잡지를 체코 한국어로 일년에 두 차례 발간하고 있다. 천부가 인쇄되어 체코와 슬로바키아 전국 교회들, 관심있는 개인들과 단체들 그리고 20여 곳의 정부기관과 주요 도서관들에 배포되고 어느 정도의 여분을 두어 새로운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 인들을 만날 때 활용하기도 한다. 지속적이지 못하고 단발성의 프로그램으로 끝날 때도 많지만 체코인들을 위한 또는 한국인들을 위한 그리고 체코와 한국인들을 모두를 위한 문화행사와 강좌를 다양하게 기획하고 있다. 이 활동들은 체코인들과의 폭 넓은 교류와 접촉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주며 정착되는 프로그램들은 열린교회 “오픈 하우스”를 생각하는 체코교회 목회자들의 목회현장과 연결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