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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한인교회 | 체코 교회와 함께 호흡하는 한인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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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배우고 갑니다”
슬로바키아 교회 청년들, 동안교회와 교류 중 한국 방문길
김보현 기자 bhkim@kidokongbo.com [조회수 : 83]
국내 대기업들의 진출등으로 관심 지역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슬로바키아지역 교회의 차세대 지도자들이 한국교회 배우기에 나섰다.
평북노회 동안교회(김형준목사 시무) 산하 청년대학부 회원들은 대륙별 국가별로 단기 선교사역을 위해 온 ‘암미(내 백성)’ 프로젝트를 전개해 오고 있는데 지난 2003년과 2004년 두 해에 걸쳐 동구 지역을 방문해 펼쳤던 ‘암미유럽’팀 사역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슬로바키아 교회방문단이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
목회자와 청년 학생 평신도 지도자 등 다양하게 구성된 방문단은 지난 2일 입국해 ‘얌미 유럽 제3기팀(팀장:김선영)의 인솔로 11일간의 일정으로 동 교회 대학부가 경부 영주지역에서 전개한 농촌선교봉사활동 참여하는 것으로 한국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이어 국내 주요 기독교 유적지와 순교 현장들을 둘러보며 다양한 종교 문화적 환경 속에 성장해 온 한국교회의 뿌리와 성장의 동력을 확인하는 한편 다양한 선교단체를 방문, 한국교회의 선교 현주소를 확인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특히 지난 8일에는 본보를 방문, 60년 전통의 대표적 기독교 언론으로 성장한 기독공보를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 언론의 현주소에 대한 소개를 받고 한국교회의 역사와 기독공보의 현황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는 한편, 언론 매체 간의 공식적인 교류 협력의 가능성들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짧은 일정 속에서도 한국교회를 배우기 위해 분주한 일정을 보낸 이들은 9일에는 체코에 파송돼 사역 중인 이종실선교사를후원하는 등 동구 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온 여전도회전국연합회를 방문해 한국교회 내 여성들의 활동 현황과 선교 여성들의 비전을 나누기도 했으며, 12일 출국했다.
총 6명의 현지인이 동참한 한국교회 방문단은 이종실선교사의 장남 이현우군(프라하대 재학)이 통역 봉사 등을 위해 동행했으며 방문단 명단은 다음과 같다.
▲수아 카타리나목사(마르틴교회 시무)▲미할릭 토마스(고등학교 종교교사ㆍ기독교잡지 편집인) ▲카롤 피구라(교회학교 교사ㆍ가구회사 대표) ▲피구로바 양카(가구디자이너) ▲야나 쿠슈미레코바(철도국 근무ㆍ찬야리더) ▲트카츠 마르틴(고교 재학)
동안교회 단기선교팀의 두 차례 동구 방문의 답방형식으로 방한한 슬로바이키아 교회 청년들이 본보를 방문해 한국교회의 언론 현황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이날 방문에는 동안교회 선교팀인 암미유럽 3기팀이 동행했다.
입력 : 2005년 08월 10일 16:09:06 / 수정 : 2005년 08월 10일 16: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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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121
본문: 누가복음 10장 29-37
제목:
<본문>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자료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 27키로미터였고 걸어서 약 여섯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해발 750미터이고 여리고는 해저 250미터여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려면 해발 총 1000미터를 넘어가는 셈입니다.
가끔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분들께서는 이 길이 대충 어떠할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리적인 조건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주로 내리막길 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 길은 두 도시를 오가는 길에서 여행자들이 겪는 마지막 장애물이 아닙니다.
물건을 팔고 이익을 남긴 돈을 가지고 그리고 특별히 구입한 물건을 가지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돌아 옵니다.
가장 물건이 많고 가장 값이 저렴한 물건들이 있는 곳은 수도나 대도시입니다; 이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방에서 살면서 빨리 부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좋은 생각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 강도들이던 간에 아니면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단체이던 간에 오늘날
주저함이 없이 테러를 자행하는 사람에 대해 그리고 자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간단히 말씀드려 이들 모두가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폭행하는
그런데 어떤사람, 그는 분명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여행을 하다가 강도를 만나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거반 죽게 때렸습니다.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고 길에 쓰러졌습니다. 이 상황을 누가는 <반쯤 죽여놓았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순찰하는 경찰도, 긴급구조대도 없었고 그를 도울 수 있는 어떤 기관도 없었습니다.
거반 죽게된 여행자는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의 혹시 있을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부상당한 여행자는 왜 상황에 의존하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여행길이 이니었기에 그의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그를 도와줄 사람이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압니다.
고장난 자동차가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차를 세울 시간이 없고 그리고 자동차 수리할 줄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차를 세우고 그를 도와줍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일상의 경험이 오늘 본문의 상황을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연히 제사장이 그 부근을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회당의 제사장은 여리고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일주일 일하고 몇 주간 휴가를 보냈습니다.
회당 일로 지쳤고 게다가 힘든 여행 길이 더욱 그를 피곤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거반 죽게된 여행자를 보았을 때 그를 피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놀랄 수도 있고 아니면 놀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사장, 유대사회의 특별한 계층의 구성원인 제사장은 거룩한 것을 취급하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거반 죽게 되어 누워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에 의해 제사장은 돕지않았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는 여행객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십시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도움을 받을 그의 희망은 점점 적어졌습니다.
해는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도움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반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할 다른 여행자가 가까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레위 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예수님 당시에 낮은 지위의 제사장 계층이었습니다. 오늘날 체코교회 안에 있는 디아코니아 조직에 해당되는 그런 계층이었습니다.
레위 인들도 제사장들 처럼 교대로 근무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레위인도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으며 매우 지치고 피곤해 있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 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 만큼 업무가 과중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은 얼마든지 부상당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렇지 못했습니다.
거반 죽게 된 사람 가까이 가서 그를 보고도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태야“, 아니면 „누군가가 그를 도와 주겠지“ 아마 레위 인은 그렇게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두 번째 희망이 빠르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들이 오고 가고 있을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아마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간 자신의 생들이 주마관등처럼 스처지나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강도에 대한 원망, 자기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을 존경하였던 유대인으로서 그가 자신의 종교지도자들을 후회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최소한 그는 분명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잠시 후에 도움의 손길이 다가 왔습니다.
끄랄리쯔까 성경은 <사마리딴>이라고 번역되어있는 <사마잔> (우리 한국 번역에는 사마리아인)이 그 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인에 대해서는 히브리어 성경인 구약 전체가 아닌 단지 모세 오경에만 잠깐 언급될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멸시하였고 심지어 이방인들 보다 도 더 못한 부류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단 한 줄 일지라도 그들에 관해 기록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증오는 이성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욕으로 생각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로부터 받은 음식이나 물건들은 돼지고기와 같이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인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강도 만난 유대인도 분명히 사마리아 인들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만진다면 유대인은 곧 부정한(더러워진)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의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 사마리아 인은 매우 사려깊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위험에 처한 이웃에 대한 착한 사랑은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반 죽게 된 사람곁에 가까이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싸매주고 자신의 나귀에 그를 앉혀서 그를 돌보아 줄 수 있는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튿날 상태가 조금 나아졌을 때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고 들어갈 비용을 미리 지불하였습니다.
맡긴 두 데나리온은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당시에 1/12 데나리온이 하루치 식대였습니다.
이 사마리아 인을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예루살렘과 여리고로 자주 오가는 상인이었습니다.
그가 주막을 잘 알고 있었고 주막 주인과의 좋은 관계가 그 증거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인과 그가 상반된 모습으로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고 있었고, 그래서 당장 처리해야 되는 긴급한 일이 없었기에 도움을 줄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그에 비해 사마리아 인은 장사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자신의 고객들과 신속하게 정확하게 약속을 지켜야 되는 것은 장사를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기대하지 않던 상황에서 그는 거반 죽게된 사람이 자신의 편안함과 이익보다 우선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비교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을 돕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보다 도 못하게 여기는 사마리아 인이 유대인을 도왔습니다.
도움 받은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어쩌면 그가 도움을 받아야만 되는 그런 처지가 아니었더라면 부정 탄다고 믿는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주막에 누워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람의 도움으로 지금 그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구사일생한 것은 바로 그 사마이라 인의 사랑과 선행 덕분입니다.
그런 경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과거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주막을 떠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중요합니다.
제사장과 레위 인의 행위입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삶에서 그와 같은 행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어디까지 입니까?
누가 이웃입니까?
모든 사람입니까? 아니면 단지 우리들, 같은 민족,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까?
사람들의 관계는 사람이 무언가 응답을 해야 되는 상황을 만듭니다.
동시에 이웃에 대해 도울 만한 가치가 있다 없다 판단하지 않고 우리들 각자의 태도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생각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질문하지 않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고 있는지, 상심한 이들 누구에게나 내가 이웃이 되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랑은 편견 없이 모든 경계선을 넘어갑니다.
종교, 민족, 인종의 차별 없이 모든 이들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자비를 베풀라. 그것은 실천에 대한 분명한 강조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단지 그 고통을 함께 느낀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용기있고 실질적인 도움과 자신의 편안함과 시간의 포기와 물질적인 손실을 요구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실천을 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며 사랑의 실천을 위한 힘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의 길로 이끌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 없이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며 힘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사랑의 우리의 삶을 전해 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집으로 돌아가시 길에 생각하실 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9장 52-56절
52 그는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는데, 그들이 가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53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54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주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55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사랑의 사람,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었습니다.
제일 먼저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을 거부한 직후에 사마리아 인이 상처 입은 유대인을 치료하기 위해 받아들입니다.
편견이 무너지고 가치없는 경계선들이 끊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증언의 학교입니다.
두번째 묵상의 말씀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삶의 문제를 율법이 해결한다는 믿음안에 살았습니다.
강도만난 여행자들의 예는 율법이 절망적인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구원은 기대하지 않게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사마리아인에게서 왔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가 사마리아인이고, 우리들은 거반 죽게된 강도만난 사람들로 우리들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으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구원에 대한 복음의 소식입니다.
사마리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도울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그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람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다시 생각해야될 아주 헛된 희망에 대한
상징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기때문입니다.
아멘
금주섭 목사님은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장로교회를 회원으로하는 세계선교협의회(CWM) 선교교육국장입니다.
19.9.2004
Text: 1 J 4,7-12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안에 온전히 이루느리라
하나님은 사랑이다 – 성경에 이해하기 쉽지 않는 많은 비유들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와 비유는 우리들이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인들의 삶의 자리와 경험에 얻은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
많은 성경귀절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는 이 말씀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체코에서 (특별히 체코개혁교인들에게) 성경 말씀들을 그림대신 벽에 붙여 놓것이 하나의 습관이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매일같이 눕고 일어나도록 침대 위에 말씀을 붙여놓거나 아니면 들어오고 나가면서 중요한 전달사항을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현관문에 붙여 놓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벽에 걸어두거나 붙여두는 성경 귀절 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한마디 말씀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바다처럼 명쾌하게 가장 근본적이고 마지막까지 남을 우주의 진리이며, 가장 본질적인 의미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이 필요로 하는 오직 한가지와 그 의미는 사랑하는 것이입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직장과 일상생활의 새로운 회기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우리들은 학업과 새로운 과제들에 전념할 것이며, 휴가기간이 끝나고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인생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감정이 아니라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작은 일로 매일의 삶의 노력으로 가능하며, 사랑하는 것은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에 의미와 나아갈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신학을 공부할 필요도, 대학입시자격시험을 치를 필요도 주일학교를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들도 이 말씀을 알고 그리고 실천합니다. (어쩌면 실천을 하는데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 보다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 이 말씀으로 모든 종교와 교회들의 경계선에 도달하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요한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 사회적 지위, 출신, 지식, 영적인 능력과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사랑은 전 세계에 모든 문화와 종교들에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은 모든 이들 가까이 계시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간략하게 줄인 말입니다.
모든 줄인 말처럼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EU처럼 – 어디서나 누구나 바로 EU가 유럽연합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일부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들께 그게 무슨뜻이며 EU의 근본정신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말할 것입니다.
줄인 말의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줄인 말은 마치 암호와 같습니다.
줄인말은 남용될 수도 있고 바르게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 역사에서 그것이 몇 번이나 바르게 해석되고 얼마나 남용되었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몇몇 사람들이 교회가 어떻게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알았을 때, 그래서 그에대해 그들이 말하려고 할 때, „비판하지
마시오, 여러분들의 지도자들을 공격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침묵을 강요당하였습니다.
수없이 이 말씀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회의 아름다운 외모로서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이 뜻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안에서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다른 이야기를 즐기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이 즐기는 이야기의 줄인 말은 오늘날 베슬란입니다.
베슬란은 러시아 도시로 테러리스트들이 인질로 어린이들과 심지어 갓난아이들까지 붙잡고 있던 곳이며, 수십명의 어린이들이 공포에 떨고 죽음을 당한 곳이 베슬란입니다.
새 학년이 시작되던 베슬란, 벨슬란은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세상을 줄인 말입니다.
난폭하고 무자비한 세상, 사랑이 없는 세상. 그곳에 사랑이 없으니 하나님도 없습니까?
그러나 진심으로 우리들이 그 질문을 할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요한이 어떻게 기록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9, 10절 일부)
여기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악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악과 만나고 있습니다.
사랑은 피를 흘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잘 압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악과 싸우지만 악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 어떤 살기 좋은 섬과 악이 없는 세상 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들을 죄인들을 위해
보내고 그들과 한 식탁에 앉아 먹고 마셨으며 그들을 용서하고 소망을 주셨으며 그들을 대신해서 죽으셨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최후까지 남을 진리의 말씀으로 (모든이들에게 다가가는) 쉽게 걸어가고 쉽게 뛰어갈 수 있는 그런 넓은 길이 아닙니다.
복음이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말할 때, 복음은 우리들이 선한 뜻을 언제 어디서나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리고 언제나
사랑의 음성을 우리들이 듣게 되거나 아니면 우리들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우리들에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한 뜻도 사랑의 음성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없는 곳을 단지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언가 결핍된 곳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에 정복당한 우리들은 그곳에 파송을 받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여러분들에게 줄 것이 없는 사람들, 우리들의 사랑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자들로서 우리들이 받은 그 사랑을 전합시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현관문 앞에 적어두기도 하고
아니면 교회당 벽에 적어 놓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 아들 이야기에 대한 응답이며 그의 길에 동참하라는 초청임을 우리들은 압니다.
그 이상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들이 실천하는 것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요 새로운 힘을 공급 받는 휴게소 입니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뺀다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줄인 말이 아니라 우리의 목표입니다.
부활의 약속이 있는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사랑에 다다르게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