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의 목자

  • 연합 예배 (2004년 05월 02일)
  • 요10:22-30
  • 설교자: 드로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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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22-30 /  (설교: 드로빅)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진짜 양을 치는 목자를 제 눈으로 딱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트랜스카파시언 산자락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노인이었습니다.

색 바랜 비옷을 입고있었고 큰 지팡이를 짚고 이리 저리 다니면서 양들을 에게 무언가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의 하루의 모습을 길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목자와 양떼들이 어디에선가 나타났었고 잠시 후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갔습니다.

멍멍짓는 양몰이 개가 짓는 소리와 양들의 울음소리로 양떼들은 길을 안내 받습니다.

부유한 서방 문명의 사람에게 이것은 낯설은 장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 장면은 매일 일어났던 일이며 이 장면으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첫번째 우리의 반응는 왜 양들인가? 질문 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아주 바보 같은 짐승 양에게 비교하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빠르게 변하는 오늘날에 탄력성있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현대 개신교 기독교인들은 아마 다른 짐승에 비교해야 되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입니다.

사자는 우렁찬 목소리, 힘이 있고 빠르고 날렵해서 스스로 먹이를 취합니다.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눈으로 보통 자연 속에서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양은 떼를 지어 삽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입니다.

중세 교회의 권력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킨 종교개혁은 많은 교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 안에서 교회 일치와 연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목자의 말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목자의 말씀입니다.

교회에 대한 그리고 교회를 위한 말씀입니다.

해방의 말씀입니다.

정복하려는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더 빠른 템포에 적응하도록하는 채찍으로부터 인간 자신의 독재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인 것을 아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우리를 부르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속에서 우리를 부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은 우리 인생의 첫 출발부터 지금까지 있었습니다.

그 음성에 대한 응답이 오늘 자신의 자녀들이 세례받기 원하는 부모님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세례를 원하는 삶일 수 있습니다.

이 목자의 음성에 우리는 모든 방법으로 응답을 합니다.

신자의 삶으로 이 음성을 분별하는 것을 배웁니다.

어떤 지도자의 음성이 아닙니다.

종교 지도자의 음성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부르는 음성은 우리를 아는 선한 목자의 음성입니다.

우리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이 음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각계 각층 모든 민족들에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과 양 무리들의 그림이 사용되고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내하도록 부르심을 듣고 선한 목자를 뒤따르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는 동서남북에서 자신의 교회를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두번째, 자신의 손에 있는 우리를 빼앗기지 않는 목자의 안전함입니다.

성경에서 손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능력의 비유입니다.

의지할 수 있는 안정되고 견고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는지 아닌지 불확신에서 오는 흔들림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님의 안정성과 견고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모든 인간을 수용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불완전한 사람도 받아들입니다.

이 본문을 처음으로 읽은 독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였는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오클레스 황제시대에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적들로 둘러쌓였습니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교회의 양들의 확신과 자기이해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유럽의 우리 기독교인들은 1, 2세기의 기독교의 전환의 시기와 같은 그러한 박해로 위협을 받지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다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이웃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는 목자에 대해 다양하게 왜곡되고 뒤틀린 우리들의 이해입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다른 희생들에 대해 단지 한가지만 선택하고 강조하거나 아니면 다른 것들을 거부하던 당시에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종류의 수박겉핥기식의 지식과 우리 목자의 음성에 건성으로 순복하는 것이 우리를 위협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한분 목자를 뒤따르는것을 아는일에 대한 게으름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내 옆에 검은 양이 있을 때 그리고 다른 울음소리로 양이 매애애 울 때 그때 우리는 위협을 받습니다.

세번째로 목자는 크신 분입니다.

교사와 도덕가의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19세기에 있었던 신앙고백의 논쟁은 바로 오늘 본문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에서 발전된것입니다.

양과 양떼들과 관련해서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은 곧 하나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하나이십니다.

이 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되심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우크라이나 트랜스카파시언 산의 목자가 양떼를 이끌 때 이리 저리 아무데나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언제나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옮겨다닙니다.

양들이 배고프지않도록 데리고 다닙니다.

안전한 목초지에서 쉬도록 데리고 다닙니다.

우리의 목자는 우리들을 어디론가 인도합니다.

배부르게 합니다.

우리들의 목자는 하나님 나라의 길을 아십니다.

우리들은 그의 양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압니다.

그러나 목자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길로 언제나 인도하실 것입니다.

어두운 미래와 좌절을 경험케하는 것들과 대면하면서 우리는 기독교신자들로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 나라로 가고 있음을 압니다.

부활절기에 사도행전을 봉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경험한 염려와 기쁨들은 우리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섬김과 예배와 증언의 공동체가 결국 승리함을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배웁니다.

하나님의 손이 강함을 초대교회로부터 배웁니다.

초대교회에 임한 그 능력의 손이 바로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음을 우리들은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도마를 위한 변명

  • 한인 예배 (2004년 04월 25일)
  • 요 20:19-31
  • 설교자: 빠벨 뽀꼬르니

040428

이사야 53장

요한복음 20: 19-31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 때부터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친구들을, 동료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는 도마는 그들이 확인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기 시작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직접 만져보고 싶어했습니다. .

도마는 회의론자와 의심 많은 모든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교황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왜 그 자리에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는지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도마가 제자들의 모임을 소홀히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그 도마를 변호하고자 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구요?

다른 제자들을 한번 살펴 보십시요 : 그들의 믿음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시고  성령을 주시며 세상으로 그들을 보내십니다. –
그런데 그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난 그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해 또다시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숨어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두 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들의 기쁨은 무엇 이었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과 평강의 축복은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어떻게 행했습니까?

그들이 정말 믿음이 있었는지 대해서는 쓰여있지 않지만, 우리는 다만 그랬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들에게선 그 믿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도마가 왜 믿어야 합니까?

이 제자들이 교회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 입니까?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그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어쩌면 그 제자들이 도마를 전혀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의심이 많은 도마를 그 모임에 계속 끼워 주었고, 다음 주일에  모두 함께했던 것은 성령의 열매인지도 모릅니다.

도마는 그 때까지 12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서만 등장합니다. 앞에 잘 나타나지도 않았고, (베드로나 요한 처럼) 특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쌍둥이“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가 정말 쌍둥이 형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누구와 비슷하게 생겨서
그렇게 불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도마는 어쩌면 다른 사도들에게 그림자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쌍둥이가 자기만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 도마가 자신의 의심 때문에 이제 얼굴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의 의심은 그에게는 약점이기도 하고 강점이기도 했습니다.

의심은 약점이지만 자신이 인정하고 고백한 의심은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숨겨놓는 의심은 우리의 내면을 약하게 만들고,

우리를 넘어뜨리며, 사람을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물건처럼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나타낸 의심은 의심을 풀려고 하는 마음의 표현이며, 용기와 내면의 힘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솔직함의 표현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기도 합니다.

해서는 안되는 말을,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할 때도 많습니다. 

아우구스틴 교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 도마는 우리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럼, 도마의 의심은 과연 무엇에 관한 것이었을까요?

도마는 무엇에 대해 의심했습니까?

무엇을 믿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까?

다른 동료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까?

그 분이 정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까?

도마는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보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만약 도마가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그랬다면, 제 생각엔 도마는 오히려 못자국이 다 나아 상처가 하나도 없는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을 겁니다.

그 분이 진짜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했다면 오히려 도마는 자신이 아는 얼굴을 보고 아는 음성을 듣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도마가 정말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했다면,  살과 뼈로 된 그 사람을 오히려 한번 안아보고 싶어했을 겁니다. – 그렇다면 왜 도마는 자신의 손을 예수님의 상처 난 곳에 직접 넣어보기를 원했을까요? 

제 생각에 거기에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사야서 53장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채찍질을 당하고 고통을 당한 하나님의 종, 그 분에게 난 상처로 우리가 나음을 받고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도마는 단지 살아있는 시신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자신의 구세주를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마가 그 이상의 다른 뭔가를 원했을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마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 도마는 예수님이 과연 누군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마 때문에 다시 찾아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그 의심을 풀어주십니다. 도마가 믿음에 대해 싸우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도마에 대해 마찬가지 입니다.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보다는 믿는 자가 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계십니까?

우리의 개인적인 의심들과 질문들에 대답해 주시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각자의 개성 속에서 찾고 계십니까?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한가지 유일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못자국 난 상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각자 개성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길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동일한 한가지 입니다.  – 동일한 하나의 믿음입니다. : 바로 예수님이 받은 상처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상처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의 어리석은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되며,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도마는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대답합니다. :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

그것은 도마의 외침이기도 하며 동시에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 회의론자에 의심이 많았던 그 도마가 요한 복음을 통틀어 최고의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아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항상 다른 사도들의 그림자 속에 있었던 것 같은 도마가 그러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도마는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고 서로 연결시켜준, 알파와 오메가를 찾아낸 첫 번째 사람인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도마가 정말 자신의 손가락을 예수님 손바닥의 못자국에 넣어봤는지, 자신의 손을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봤는지는 더 이상 말해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닌 것 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시며 말씀을 마치십니다.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귀로 듣는 것으로 충분한 것을 눈으로 보아도 만족하지 않다는 설교자의 회의를 듣는 것 같고 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들에 대한 시몬 벤 라뀌쉬 랍비의 깨달음을 듣는 것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산에서 번개와 지진을 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나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구약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로 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런 경험을 전혀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런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람이 있을까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세지입니다. 자신의 의문들과 의심을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직접 만져보지 않아도, 보지 못해도 믿음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 믿음은 그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보다  과거에 누구를 믿었었는지, 또 지금은  누구를 믿고 있는 것인지 하는 사실에 달려있습니다. 아멘. 

교회오는 길 너무 편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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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월 26일 수년간의 공사끝에 지하철(Metro) C선 확장구간이 개통을 하였습니다.

박물관(바츨라프 광장 말동상, muzeum)역과 중앙역(hlavni nadrazi)에서 15분
그리고 홀레쇼비체역(nadrazi holesovice)에서 10분이면 이제 교회까지 오게되었습니다.

기존의 지하철 C선은 Haje 에서 Nadrazi holesovice까지 운행되었던 것이 Nadrazi holesovice에서 Kobylisy Ladvi 두 역이 연장되어 오늘 개통되었습니다.

교회에 오시려면,

Kobylisy 에서 하차해서 열차 진행방향으로 나오면 전차 역이 바로 역앞에 있습니다. 전차역을 가로건너 전차진행방향(즉 왼쪽으로) 인도를 따라 1-2분걸으면 공중전화가 나오고 공중전화 옆에 Dum Bible(체코 성서공회)건물이 나옵니다.

인도를 따라 오다가 공중전화와 둠 비블레 사이 골목길 (nahorni)을 따라(즉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올라오면 학교 울타리를 따라 난 u skolske zahrady 골목길이 나옵니다. 그길을 오른쪽으로 따라 1-2분 걸으면 눈앞에 사다리 모양의 종탑이 나옵니다. 그 종탑이 있는 건물이 교회입니다.

교회 주소는 U skolske zahrady 1번지 입니다.
이종실 목사 핸드폰 604 668 061
교회 사무실 284 689 370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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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법] 체코 형법

체코 형법

형법은 법조항 140/1961번에서 찾을 수 있다.
1.형법은 체코 공화국 사회의 안전을 위해, 체코 국민의 권리보장을 위한 법이다. 2.형사 범죄는 사회에 위협적인 행위로써, 형법은 형사 범죄에 대한 종류,특징에 대해 다루고 있다. 3.형사 범죄 종류에 속하더라도 사회에 위험하지 않으면 형사 범죄에서 면제된다 4.범죄자는 아래 항목을 저지르면 형사 범죄를 고의로 저지른것으로 이해된다. 가)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물건, 사람..)을 고의로 해아려 했을 때 나)자신의 행위가 법적으로 어긋나는 것을 알고도 고의로 형사 범죄를 행했을 때 5.형사 범죄에 대한 준비도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형사 처벌의 수준은 그 범죄의 위험함을 판단하여 정한다. 6.형사 범죄를 준비하고 있었던 범죄자는 만약 형사 범죄 준비도중 포기를 하거나, 형사 범죄를 행하기 직전 경찰에 알리면 형사 처벌에서 면죄 될 수 있다. 7.형사 범죄에 대해 경찰에 알려야 하며, 만약 범죄자가 군인이라면 자신의 상관에게 알릴 수 있다. 8.형사 범죄에 대한 시도는 사회에 위험한 행위로 인식되며, 고발될 경우 바로 형사 처벌이 내려진다. 형사 처벌에 대한 정도는 형사 범죄의 위험성이 판단된 후에 정해진다. 형사 범죄를 시도하고 있었던 범죄자는 만약 형사 범죄 시도 중 중도포기를 하거나, 형사 범죄를 행하기 직전 경찰에 알리면 형사 처벌에서 면죄 될 수 있다. 형사 범죄에 대해 경찰에 알려야 하며, 만약 범죄자가 군인이라면 자신의 상관에게 알릴 수 있다. 9. 범죄자는 형사 범죄를 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10.만약 형사 범죄에 범죄자 외 또 다른 사람이 개입했을 경우 그 사람도 범죄자로 인식한다. 11.형사 범죄에 범죄자 외에 개입한 또 다른 사람들은 여러가지 종류로 구분하는데, 형사 범죄를 총감독한 사람, 형사 범죄에 도움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도움을 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12.범죄자가 만약 15세가 안된 미성년자면 형사 처벌에서 제외된다. 13.범죄자가 만약 정신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면 형사 처벌에서 제외된다. 14.자신이 방어를 위해서 형사 범죄를 행했다면 형사 범죄가 아니다. 15.무기를 소유 할 수 있는 사람-경찰-은 경우에 따라 무기를 사용 할 수 있으며, 법에 어긋나지 않게 무기를 사용했다면 형사 범죄가 아니다. 16.형법은체코 공화국 안에서만 일어난 형사 범죄들만 다룬다. 17. 형법은 체코 공화국 소속인 배, 비행기에서 일어난 형사 범죄들도 다룬다. 18.형법은 체코국민이 외국에서 범한 형사 범죄도다룬다. 19.형법은 체코 공화국 Trvaly pobyt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체코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행한 형사 범죄를 다룬다. 20.형사 처벌은 사회를 형사 범죄에서 보호하고자, 형사 범죄를 행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것이다. 21.형사 처벌을 받는 범죄자라도 그의 품위를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 22.만약 범죄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신이 행한 결과를 책임지는 자세를 갖춘다면 형사 범죄의 위험정도를 감안하여 형사 처벌을 종료 할수 있다. 23.재판소가 형사 처벌을 종료 시킨다면 범죄자는 무죄로 인식된다. 24.형사 처벌은 다음 종류가 있다. 가) 구금 나) 사회봉사 다) 학위 취소 라) 군직위 해재 마) 사회 활동 금지 바) 재산권 행사 금지 사) 벌금 아) 추방
형사 범죄에는 다음 종류가 있다.
1.반역죄 – 체코 국민이 다른 외국의 힘에 합세하여 체코 공화국에 해가 되는 행위를 할 경우. 2.테러 3.사보타주, 태업 4.간첩 5.외국 군대와의 협력 6.전쟁중 반역 7.불법 무기거래 8.살인 9.위조지패 발행 등등,

동안교회 암미유럽을 다녀와서

동안교회 암미유럽을 다녀와서

덕분에 무리 없이 잘 다녀왔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구요, 떠나기 전부터 했었던 수많은 훈련과 공부가 이번 사역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했었음을 가서 직접 부딪히면서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여전히 정리작업 중이기에 이 보고서를 통해서 다 알려드릴 수 없는 부분이 있네요. 뭐랄까 단순한 일정상에서 일어났던 일들만 작성되었구요, 구체적으로 청년들을 만나거나 목사님을 만나면서 이루어진 사건 사건들을 모두 기록하기에는 지금 조금 무리가 있는 듯 싶어서 일단 작업된내용만이라도 보여드리는 게 필요하다 싶어서 이렇게 띄웁니다.

떠나기 전에 했던 수많은 훈련과 공부, 정말 학교 다니는 것보다 더 심한 강도로 행하지 않았나 싶구요, 그 공부 덕분에 순간순간 맞닥뜨린 질문들에 지혜롭게 대답할 수도 있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 폴란드 청년들과 마음을 함께 공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더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는데, 우리가 방문하는 이것들이 체코와 슬로바키아 목사님들, 그리고 교역자들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갔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현재 너무나 위축되어 있는 사람들, 무엇보다 공산권 하에 있으면서 위축당했던 그 감정이 아직 그대로 살아 있으며, “기독인”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사회에서 “이상한 사람들” 취급받고 아직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기독인”이라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의 요청은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회복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쓰고 싶다구요…. 무엇보다 한 번 기독교가 휩쓸고 갔기에 너무나 조심스럽게 한발짝씩 떼려고 하며, 지금 당장엔 “교회”란 존재가 생존한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곳도 상당합니다. 아니,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사상 기반에 있었던 것은 바로 “세속적인 가치관이 교회 가운데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교회가 선택했을 때, 그 부흥했던 유럽교회가 무너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강조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즐거움”에 탐닉해 있었을 때 교회는 일시에 무너지고 분열되는 현상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현지 교회 목사님들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오가는 과정 가운데에서 그들은 우리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답니다. ; 기독교역사 100년밖에 안된 곳에서 이토록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 모습이 충격적이라네요. 제 생각엔 “열심”은 전해주되, 한 번 부흥했다 사라진 그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이 무엇보다 우리 한국 교회 현실 가운데에서는 필요한 듯 싶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만 전하려고 했는데 길어졌네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생각을 실천하는 그 곳에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다는 사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기심” 혹은 “집단 이기주의” 그리고 “세속적 가치관”이 나에게 없는지 매일 매일, 매 순간마다 돌아보는 내가 그리고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이만 줄일께요.

손 은 진 (편집 주: 서울 동안교회 청년 12명이 프라하 꼬빌리시교회 이종실 목사의 지도아래 체코와 슬로바키아 교회 청년들과 2월에 약 두주간의 교류활동을 마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