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나의 친구 나의 목사 이지 슈토렉

이름 없이 프라하의 한국인들을 사랑한
나의 친구 나의 목사

이지 슈토렉을 하나님곁으로 떠나보내며

1994년 2월 설교자가 없어 중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프라하 한인교회 교인 자녀들이 푹 머리 숙이고 카세트 녹음기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던 모습에 해외에서 절대 한인교회 목회는 하지않겠다던 나의 다짐이 무너졌다. 1년이 넘도록 자신들의 목회자를 찾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체코교회로 파송하는 마음으로 보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사실상 이제 교회를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었다.

단지 설교를 하였지만 설교자에게 교인에 대한 신앙적인 보살핌은 자연스럽게 설교와 함께 수반되는 일이다. 체코에 좀 더 깊이 뿌리를 내리려는 조급한 마음으로 그때부터 언어를 익히는 일과 체코교회를 출석하며 교회를 이해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때 체코교회에서 두 사람의 목회자와 한 사람의 평신도와 깊은 교제를 하였다. 그들은 내가 체코교회를 이해하는 관문이 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지 슈토렉 목사였다.

현재 필자가 소속되어 일하는 체코형제개혁교단의 해외교회협력부의 책임자가 선교적인 활동이 가장 왕성한 교단의 대표적인 목회자로 추천을 하여 그와 처음 만난 것이 1995년 가을 무렵 프라하 4지역의 이쥬니 므녜스또에서 열린 주일 저녁 예배였다. 프라하 지역에서 유일하게 슬럼화가 되어가는 프라하 4지역의 이쥬니 므녜스또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감리교회 침례교회 체코형제개혁교회 그리고 카톨릭교회 기독교인들이 연합해서 예배를 드리며 서로 일치하여 자신의 지역을 복음으로 섬기는 선교활동을 하고있었다. 이 에큐메니칼 선교활동의 주창자가 바로 이지 슈토렉 목사였다.

몇 차례 그 예배와 활동에 참석하면서 그를 더 깊이 알게되었다. 카톨릭과 개혁파들 사이의 오랜 종교전쟁으로 분열된 체코 교회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무신론적인 사회에 가까이 가려는 그의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종교적인 도움을 배척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관리하는 수용환자 800명, 의사 직원이 천명이 넘는 대단지 마을을 이루고 있는 프라하 8지역에 있는 보흐니쩨 정신병원과 지역 목회자로서 깊은 신뢰를 형성하여 병원에서 임명한 환자상담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그는 지역사회에 눈에 보이지않게 무신론적인 사회분위기와 기독교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무는 일들을 하고있었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세우는 그의 활동은 역설적이게도 오랫동안 생존을 지상과제로 삼은 소수파 체코개혁 기독교회가 스스로 사회를 향해 쌓아놓았던 벽과 동시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체코교회의 문제를 안팍으로 직시하고 있던 그에게 서로 다른 민족의 기독교회들과의 일치와 연대에 대한 필요성과 그 중요성에 대한 나의 설명이 그리 어렵지않게 이해되었다. 당시 나는 찰스대학의 개혁신학부 박사과정을 하면서 체코형제개혁교단에서 체코교회의 경험과 한국교회의 경험을 상호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프라하 8지역의 꼬빌리시 교회의 담임인 이지 슈토렉 목사와 이웃하고 있는 프라하 7지역의 프라하 연합한인교회(이전 프라하 한인교회) 담임인 오형석 목사에게 두 교회가 한 달에 한번 연합예배를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양쪽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각각 당회와 제직회에 의견을 물어보기로 하였다.

이 제안을 계기로 이지 슈토렉 목사는 체코의 한국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한번은 대우 아비아의 직원의 자녀가 어려운 질병에 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질병 때문에 의료보험 연장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이지 슈토렉 목사는 자기 일처럼 나섰다. 의료보험회사의 책임 있는 사람을 만나 그 자녀를 위해 보험회사가 마련한 특별기금으로 보험처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정을 이끌어 내기까지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그 자녀의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더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단 이 일 만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체코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함께 아파하고 그리고 힘써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그는 언제나 노력하였다.

그는 췌장암이란 판정을 1년 반 전에 받고 금년 6월 28일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년 반 동안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그 시간들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크게 배운 시간이었다. “이 목사, 의사 선생님이 이제부터 내 인생이 이전 보다 더 좋아진대.” 중요한 내장 기관에 퍼진 암을 떼어낼 수 없어 그대로 봉합을 하고 나온 후에 한 그의 농담이었다. 영문을 모른 나는 수술이 잘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 내 인생은 이전 보다 질적으로 훨씬 좋게 될거야.” 매주 월요일마다 검사를 받고 화요일마다 항암치료를 반복하였다. 항암치료로 힘이 들면 쓰러져 누웠다가 다시  한 줌의 힘이라도 생기면 일어나 목회 일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그에게 이전과 다른 일상생활이 있다면 병원에서 치료 받는 일이었다. 질병이 그의 육신을 죽어가게 하였지만 그의 일상생활과 그의 마음과 정신은 더 생동감을 느꼈다. 언제 부턴가 그는 욥기 42장 5절에 나오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는 욥의 고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설교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의 눈으로 이해한 성서의 깊이에서 흘러나왔다. 때로는 마치 누설된 천기를 듣는 것과 같아 전신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언제부턴가 팔 다리의 모든 근육이 풀어져 걷거나 설 수 없게 되어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설교를 하고 성만찬을 집례하고 세상을 떠나기 한달 전 사랑하는 막내딸의 결혼식을 집례하였다. 이미 자신의 시간을 예상한 듯 6월 29일 마지막 주일날로 예정된 결혼식을 한달 앞당긴 것이다. 그 날 결혼식을 마치고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한국인 교우들이 모인 곳을 찾아왔다. 결혼식 때문에 늦어진 예배시간을 사과하였고 딸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언과 같은 몇 마디를 자신의 한국교우들에게 남겼다. “여러분들은 우리 체코교회의 천사들입니다. 이곳은 여러분들의집입니다. 이 교회를 지켜주십시오. 다른 곳으로 떠나지 마십시오.” 세상을 떠난 그 주간 월요일 6월 23일 그는 당회에 참석하여 세시간이 넘게 중요한 일들을 마무리하였다. 마지막으로 당회에 교회 정원에 생길 납골당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안건으로 내어 당회는 그것을 결정하였다. 7월 첫째 주 체코 한국 연합예배 준비를 위해 그와 내가 만난 6월 25일이 마지막 이었다. 그 날 그는 “나는 고향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 보다 한국형제 자매들이 있는 이곳에 남고싶다.”고 하였다.

다음날 그는 숨찬 목소리로 전화를 하였다. 아무래도 7월 첫째주 설교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일단 그 예배를 이번에는 취소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다시 의논하자고 하였다. 그 다음날 그에게 손님이 있어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그의 방에서 나왔다. 그의 목회자요 선생님이었던 분이 방문을 하였다. 그는 그에게 축복기도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날 잠이 든 후 다음날 아침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장례절차를 모두 유언으로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6월 28일 토요일 오전 8시 숨을 거둔 직후 하늘과 땅을 소통하는 야곱의 사다리처럼 세상을 섬기는 그와 우리의 꼬빌리시 교회의 상징인  사다리 탑의 종(* 종 제작은 비뜨 성당의 종을 관리하는 체코의 유명한 종 제작 가문의 마노우쉑이 하였으며 이지 슈토렉 목사는 그 종을 <천사>로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이 종탑과 종은 한국 형제 자매의 헌금으로 세워졌다.)을 오랫동안 크게 울렸다. 천사의 종소리는 밀납처럼 누워있는 그의 침대 위로 평화롭게 그리고 나의 두 눈의 눈물로 흘러내렸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2003년 9월호 제31호 나눔터>

2003년 12월 7일

첫눈이 내린 오늘, 대강절 두번째 주일이었다.
슈토렉 목사가 세상을 떠난 이 후 그리고 다시 담임 목사를 맞이하는 그때까지 이 예배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교회와 달리 많은 부분에 전통에 의해 유지되는 체코교회여서 장로들의 역할이 교회를 운영하는데 충분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목회적인 돌봄의 공백은 곳곳에 나타난다.
이 예배는 체코와 한국 교인들이 함께 선교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엔진역할을 한다.
그러나 슈토렉과 이종실 목사의 선교적 목회적 비전이 그 역할을 견인하였다.
슈토렉 목사의 빈자리가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지난 11월 에큐메니칼 예배때 부터 예배후 간단한 음료수를 준비하였다.
예배후 교우들간의 친교모임을 위해서 이다.
한인 교우들은 이 친교모임이 마치면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 예배 준비위원이 지난 11월 부터 조직되었다.
예창열, 이현우 교우이다.
설교와 예배예전의 준비는 이종실 목사가 그리고 예배찬송가집, 분병분잔 위원, 성경읽기 담당자등 모든 준비는 두 교우들이 한다.

대강절의 기도

  • 연합 예배 (2003년 12월 07일)
  • 살전 3:9-13
  • 설교자: 이종실

031207EK
데살로니가전서 3:9-13
대강절의 기도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Advent는 라틴어 Adventus 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뜻은 “도착, 도래, 강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강림입니다.
그의 강림은 첫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의 첫번째 오심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실 그 때를 기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도 이 신앙을 설교 후에 있을 사도신경을 따라 하는 고백을 할것입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대강절 계절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신다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은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분명한 진리를 외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인간은 우리들의 인생의 마지막이 희망 없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질서와 희망을 향해 가기 보다 무질서와 혼돈을 향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는 믿음은 우리들에게 더 희망을 주고 삶의 용기를 줍니다.
오직 한 분에게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희망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것은 그들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 희망에 대한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들, 체코인들과 한국인들이 이 꼬빌리시에서 역시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고있습니다..
이 희망의 역사를 재확인 하는 때가 바로 대강절 절기입니다.

오늘 저희들이 들은 말씀은 데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사도의 편지입니다.
오늘 12절 13절 말씀을 요절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 전서 3:12-13)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를 생각하며 그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다시오심을 생각하며 무엇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슷한 기도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사도의 편지가운데도 나타납니다.
 “가
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표준새번역 빌
1:10-11)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안에 있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 바울의 기도를 들을 때 그들은 순결하고 흠이 없는 사람에 대한 말씀 때문에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순결하고 흠이 없는 사람들인지 아닌지 스스로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바울과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5-51절의 말씀입니다.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종이 주인이 돌아오는 시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예상하지 못하는 시간에 돌아옵니다.
성경말씀은 이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마 24:36)
주인이 돌아오는 시간을 알지 못하기에 주인을 기다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종들의 태도는 결정됩니다.

이 비유에서 나쁜 종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기 동료를 때리고 술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놀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이전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주인이 늦게 온다고 하여”
그가 주인은 틀림없이 늦게 올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는 주인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의 동료를 때리고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길 때 그의 마음에 있는 생각은 “나는 그가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사랑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쁜 종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처음에 바울이 주의 날을 기다리는 매일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였습니다.

“하
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 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과 같이, 색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 이런 일에 탈선을 하거나, 자기
형제자매를 해하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에도 말하고 경고한 대로, 주님께서는 이런 모든 일을 징벌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4:3-7)
이 말씀은 예수님의 나쁜 종 비유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색욕에 빠지거나
다른 형제들을 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주인이 늦게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중심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을 주신 그 분을 만날 시간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 놓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돌아오는 것을 염려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우리들이 완전하고 흠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종과 같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 우리가 나쁜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착한 종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기도가 갖고 있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되는 한가지는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는 교회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과 갖는 특별한 관계 안에서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나다.
그러므로 12절에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으로서 중요한 것은 단지 흠이 없는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인들 사이에 광신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종말을 생각했을 때 그들은 눈에 보이는 매일의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종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신의 장소를 소중하게 여김으로서 그리고 신실한 섬김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루며 자신의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매우 다양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는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드려야할 올바른 기도입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이 기도로 우리는 대강절을 맞이합니다.
이바울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만들고 우리는 매일 매일 이 기도를 드림으로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억하는 대강절을 보내십시다.

열린 무덤

  • 연합 예배 (2003년 11월 02일)
  • 요 11:32-44
  • 설교자: 드로빅

오늘 설교본문은 요한복음 11장 32-44절 입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설교>

람을 위하고 인간을 위한 길을 향하시는 예수님이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실 정보만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팔레스틴의 지리로부터 무엇인가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초적인 정보입니다. 데가볼리는
해석하면 열번째 도시라는 뜻으로 독립된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에 속하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땅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왕래가 많은 무역도로로 발전된 헬라 도시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그 도시들은 각 나라의 매우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종교가 달랐고 관습과 전통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 도시들은 이방나라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다양한 의견과 생각들이 만나는 것에 대한 소식을 전합니다. 그 다양성의 한가운데 예수님이 서계십니다.

이 번주에 체코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신 가족들이 묻힌 곳을 돌아봅니다. 그것은 종교와 관련되기도 하고 관련이 없기도 합니다. 일년에 한번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부모와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시에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는 기회도 가질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메멘또 모리”가 들려옵니다. 이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현실은 우리의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십니다. 나사로의 무덤입니다. 매우 사랑하던 이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이예수님의 통분하는 마음에 대한 표현을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치 나사로의 죽음에서 자신의 운명 죽음과 파멸과 무덤의 권세를 만난 것 처럼. 마치 인간의 불신앙과 절망에 대해
분노인 것 같은 그런 분노입니다.

나사로 이야기는 죽은 지 나흘이되었는데 다시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생물학적인 질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시 살아났습니다. 흙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로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했던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장례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읽은대로
굴속에 넣어두고 돌로 막았습니다. 어두운 장소는 공허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죽음과 파멸의 권세가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
덮쳤습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님과의 관계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죄는 우리를 고립시키고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우리를 무덤의
동굴로 고립시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놓으라” 인간의 생각에 그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 죽은
자의 가장 가까운 사람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냥
둡시다.” “살아 있는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오” 아마 그렇게 그녀는 말하길 원했을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놀라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열린 무덤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결과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납니다. 살아서 관계가 회복됩니다. 공동체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돌을 밀어내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수의를 입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셨습니다.


시 살아난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우리들을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도록 우리들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셨습니다. 공동체는 단순한 삶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공동체,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거룩한 공회인 모든 기독교인들의 공동체 교회입니다. 호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시간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고립시키는 돌, 우리를 구속하는 수의, 얼굴을 가리는 수건은 예수의 승리로 벗겨졌습니다. 공동체로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거룩한 공회, 거룩한 공동체는 우리들에게 열려있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부활하여 다시 삽니다. 열려진 거룩한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가까운 이들의 무덤 곁에 서있습니다.


리스도와의 공동체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우리들은 성만찬에 참여합니다. 떡과 잔을 감사드리며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들과 여기 이미 함께 하지 못하고 이미 하늘 예루살렘 영원한 집에 가신 분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들의 순례의 마지막 여정을 바라봅니다.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여 보이는 저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을 확인합니다. 성만찬의
참예로 새롭게 새롭게 산자와 죽은자의 주님을 만납니다.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

  • 연합 예배 (2003년 10월 05일)
  • 골 1:24-29
  • 설교자: 이종실

031005ek
골로새서 1:24-29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

<본문>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로새라는 도시는 오늘날 터어키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우리교회 처럼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읽은 설교 본문입니다.

골로새 1장 1절에 이글을 쓴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은 고난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박해와 다양한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난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 기쁨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았다고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다 더 극적인 표현을 씁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24)
이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충분하지않았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에 나도 동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죄의 속죄를 위한 고난입니까?
아닙니다. 죄의 속죄를 위한 고난은 완전히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었고 바울이 동참해야될 여지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 사실을 이 서신서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죄를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홀로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홀로 고난을 당하셨고 그리고 홀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홀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죄를 위한 대속의 사역은 완전히 그리스도의 일이며 인간이 그 사역에 동참할 조그마한 여지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해 먼저 바울의 고난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을 위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25절에 사도 바울의 사명은 “너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에대해 28, 2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것은 설교의 사명과 교회를 세우는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말씀을 위한 그리고 세워져야할 교회를 위한 고난이었다고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첫번째는 이세상에 교회가 세워질 때 고난이 뒤따르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당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성도의 교제를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 어려움 그리고 고통을 예상해야만 합니다.
만약 교회가 이세상과 다른 것이 없다면, 교회가 세워질 때 고난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말합니다.

두번째로 교회를 세우기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인간의 계획과 노력으로 교회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시작하셨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일에 우리를 초대하였고 그리고 함께 일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복음의 선포와 교회의 설립과 성장과 완성을 위해 고난을 당한 그리스도의 그의 몸된 교회에 대해 우리,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냉담하지않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교회가 어떤 기쁨을 주는가?
나에게 교회가 유익하고 유익하지 못한 점이 무엇인가?
교회 안에서의 나의 봉사와 섬김이 자신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교회를 위해서인가?
혹시 이것이 교회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질문은 아닙니까?

본문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으면서 그토록 수고한 설교와 교회의 설립은 구체적으로 이세상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앞에서 언급한대로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비밀>로 표현되어있습니다.

사전에 비밀(祕密) 이란 단어를 ①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 ②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 ③언어나 문자 따위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전할 수 없는 깊은 뜻 등등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신비를 어떻게 설명해야합니까?
이 질문은 정확하게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비가 무엇이 아니라 누구라고 규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7절에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개인으로 규정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사명으로서 그가 이루려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우리가 전파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될 때 그리스도는 더 이상 삶의 과거의 존재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개인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과 만납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사람들 사이에 만남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우리들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여기서 너희들은 누구입니까?
21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원수되어 이 너희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 아래 놓였습니다.
그것은 죄인들 너희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죄인들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전파된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활동에 의하여 우리들과 만나고 우리들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는 구속을 받았고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신곳 어디에나 죄용서가 있기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신 사람들과 화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해는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그리스도가 세울 때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화해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죄 용서 없이 하나님과의 화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가 있는 곳에 참된 희망을 정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영광의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희망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희망을 가지기 위해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반복을 거듭할수록 사람들은 결코 분명해지지 않는 미래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희망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한편 동시에 우리들은 자신을 기만하는 어떤 것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등을 돌리고 하나님과 화해하지않은 죄의 짐을 짐지면서 우리는 참된 소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참으로 죄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가져올 소망입니다.
우리들이 그와 함께 있을 때 소망을 얻을 것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신자는 구원의 완성을 향합니다.
설교와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는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지로만 남지않고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추구하게합니다.

28절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완전한 자라는 단어는 흠과 결함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만 오히려 이 단어는 성숙한 어른을 의미합니다.

거듭나 크리스쳔이 되는 경우 그것은 우리가 처음 태어날 때 젖먹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린아이에 머물러있다면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와 같은 내가 아무리 불타는 열심이 있어도 그 열심은 교회 안에서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생활은 완성을 향한 끝없는 행진입니다.
성장은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기대되고 성숙은 신자들이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2절에서 자신의 노력이 신자들의 성숙인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랑으로 결속되어 마음에 격려를 받음으로써, 풍부하고도 완전한 이해력을 갖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골 2장)

설교는 이 한가지 목표를 향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왜 교회당이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매주 만나 무엇을 해야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있습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가 여기서 이 장소 야곱의 사다리 교회당에서 전파되어야 합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가 언제나 이곳에서 모든이들에게 들려져야합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와 세상과의 만남이 여기서 일어나야 합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와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인간이 여기서 연결되어야 합니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깨달은 과정을 통하여 함께 걸어가며 연합하여 완성을 추구하는 신자로서 영광의 소망을 함께 향하여 갑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의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그의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표준새번역 골 2: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