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5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5.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Kostel Panny Marie před Týnem)
첼레뜨나 거리(Celetná ulice)에서 북동쪽 지역에 있는 오른쪽편의 구시가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까지 걸어간다. 여기서 회랑이 있는 두개의 고딕건물 뒤로 띤 앞의 마리아 교회당의 거대한 탑이 우뚝 솟아 있다. 당시 고딕 교회당의 중심적이고 대표적인 프라하 성당으로 까렐 4세가 1365년에 세웠다. (1511년에 완성됨) 앞에서 이야기했듯이(I/2) 1360-69년에 독일 개혁교회 설교가 콘라드 발트하우저(Konrad Waldhauser)와 그가 죽은후 끄로므녜지쉬의 얀 밀리츠(Jan Milič z Kroměříže)가 이 교회에서 활동을 – 얀 밀리츠는 당시 일이(Jilji) 교회서부터 신부였다 (I/7) – 하였다.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과 교황의 면죄부 판매 문제에 대해 대학에서 논쟁이 일어났던 시대에 얀 후스(Jan Hus) 선생과 야꼬우벡(Jakoubek) 선생이 이 성당의 설교자들이었다. 면죄부 판매 시위를 벌렸던 후스의 젊은 추종자 세 사람이 띤 교회당입구 모퉁이에서 처형당하였다. (I/8).

띤 성당은 체코 종교개혁시대에 가장 유명한 후스파 교회당이었다. 당시 후스파의 가장 높은 공식기관인 „돌르니 꼰지스또즈(dolní konzistoř)“(I/3)가 띤 교회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카톨릭파의 가장 높은 공식기관인 „호르니 꼰지스또즈(horní konzistoř)“는 프라하 성의 성 비뜨 성당에 위치하고 있었다. 1427년부터 두 기관의 교회의 대감독으로 체코국가 회의가 1435년에 선발한 얀 로끼차나 (Jan Rokycana) 선생이 1427년부터 띤 앞의 마리아 교회의 행정 관리자 및 수석 설교자가 되었다. 1436년에 로끼차나는 띤 교회로부터 바젤에서 열린 공의회에 후스파 협상 사절로 파송되었다. 바젤 공의회에서 그는 양종성찬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고 1437년에 다시 한번 더 발표하였다.

띤 성당에서 얀 로끼차나 선생의 장례식이 있었다.(1471) 후에 여기서 1484년 부터 후스파 신부로 임명된 미란돌라의 루찌안(Lucian z Mirandoly) 비숍의 장례식이 있었다.(1493) 1601년 여기서 루돌프 2세 황제 시대에 유명한 덴마크 천문학자 개혁파 티코 브라헤 (Tycho Brahe)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후에 귀족들의 반란 (* 번역자 주 – 30년 전쟁의 시작) 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당한 대학 총장 얀 예세니우스 박사 (Dr. Jan Jesenius)가 설교를 하였다. 티코 브라헤의 무덤이 오늘날까지 교회당의 중앙 제단 앞 오른쪽 기둥 옆에 보존되고있다.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 1457-1471)의 통치시대에 띤 성당 지붕의 중앙부에 움푹들어간 곳에 금 성찬잔과 그 아래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한다“라고 씌여있는 왕의 형상이 놓여있었다. 반 종교개혁 시대에 이 후스파 심볼들이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성모 마리아 형상으로 교체되었다. 성모 마리아상 뒤의 금으로된 후광은 금 성찬잔을 녹여 만든것이다.

개혁파 설교가인 얀 로끼차나 선생을 띤 교회의 설교가로 언급한 것과 관련해서 그의 주도 아래 „그리스도 율법“을 사랑하는 새로운 후스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슬로바니에 있는 새도시 후스파 수도원(III/6)의 관리자인 로끼차나의 조카 제호즈 끄라이치(Řehoř Krajčí)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서클은 다시 초대 사도 교회를 모범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믿음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열성가들은 프라하를 떠나 1457년에 잠베르크의 쿤발트 (Kunvald u Žamberka) 에서 체코 형제단 (Jednota Českých bratří) 이라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먼저 로끼차나를 설득하여 그와 함께 떠나 자신들의 목회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뻬뜨르 헬치쯔끼(Petr Chelčický)의 글들을 접하였고 그리고 이지 왕의 북 체코 통치시대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은 빌라 호라 전투때까지 체코 종교개혁운동의 주요 성당이자 중심이 되었다. 이웃나라 독일에서 1519년 얀 후스 선생의 종교개혁 유산을 이어받은 새로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등장이후 프라하에서 루터의 추종자 토마스 뮌쩌(Tomáš Müntzer)가 환영을 받았다. 1521년 베들레헴 채플(I/8)과 띤 성당에서 독일어로 설교하고 체코어로 통역되었다. 띤 교회에서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몇몇 후스파 설교가들이 번갈아 가면서 설교하였다. 1523년부터 하벨 짜헤라(Havel Cahera)가 그리고 1539년부터 바츨라브 미뜨마넥 (VáclavMitmánek) 박사가 양종성찬파 꼰지스또즈 (* 번역자 주 – 후스개혁파 최고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두 사람들은 페르디난드 1세의 반종교개혁 시대에 프라하에서 추방되었다. 다음으로 1542년부터 후스파 꼰지스또즈의 책임자가된 얀 미스또뽈(Jan Mystopol +1568)이 띤 교회의 유명한 관리자가 되었다. 루돌프 2세 황제 대헌장 발표이후 엘리아쉬 슈드(Eliáš Šúd 1609 – 1614)가 관리자가 되었고 1618년 프리드리흐 팔쯔끼(Fridrich Falcký)를 왕위에 즉위 시킨 이지 디까스뚜스(Jiří Dikastus 1614-1621)가 마지막 관리자였다. 빌라 호라 전투 승리 이후 드레스덴에서 망명자로 생을 마쳤다. (I/3)

[살며 생각하며] 베네쇼브

베네쇼브(Benešov)

얼마 전에 베네쇼브(Benešov)를 다녀왔다. 오전 9시 30분에 약속이 있어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아침 출근시간을 감안하여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8시경 프라하 4, 콩그레스(Kongres)를 지나 1번 고속도로로 진입할 무렵 마주 오는 차선에 시내로 향하는 승용차들이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 줄지어 서있었다. 한참을 달려도 마주 오는 차선에 서있는 차량들의 꼬리가 끝나지 않았다. 프라하 경계를 알리는 큰 아치 조형물을 2-3 키로미터 정도 지나서야 차량 행렬이 끝났다.
도로 보수공사나 교통 사고 없이 이렇게 길게 줄을 지어 서있는 차량 행렬을 10년을 살면서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프라하를 40 키로미터 정도 벗어나 베네쇼브, 린쯔(Linz오스트리아 도시) 표시가 있는 출구를 타고 국도로 들어섰다. 자세히 보지 못하면 지나칠 듯 서있는 국도변의 베네쇼브 지경을 알리는 흰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원을 그리듯 급커브에 좁고 웅덩이가 패인 아스팔트 길을 따라 비스듬하게 하늘을 가르키는듯 땅을 가르키는듯 애매하게 매달려있는 시내 방향 표시 판을 암호 해독하듯 하며 길을 찾았다. 꼬노삐슈떼 (Konopiště) 성과 호수를 몇 차례 찾았을 때 그냥 지나치면서 한번도 들러 보지 않은 도시였다.
베네쇼브는 사자바(Sazava) 강과 신화의 블라닉(Blánik)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13세기 중반에 처음 수도원이 생기면서 차츰 도시로 발전하였다. 후스 전쟁 시대에 얀 쥐쉬까(Jan Žiška)가 이 도시를 정복하였다. 1415년 개혁파의 왕 이지 뽀제브라디(Jiří z Pořebrady)와 황제 실비오 피오코로미니 (Silvio Pioccolomini)와 교황 피우스 2세(Pius II )가 만나 협상을 했던 도시가 바로 이 베네쇼브였다. 이와 같이 체코 보헤미아 역사에서 보듯 베네쇼브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9시 30분 예정된 만남이 교회당에서 시작 되었다. 서로 간단한 인사와 소개를 나누고 시내로 향하던 출근길의 길고 긴 차량 행렬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그 교회 목회자가 „30분 마다 있는 열차로 프라하 중앙역까지 1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승용차로 출근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 그리고 업무 시간이 끝난 젊은 직장인들은 저녁 시간을 대부분 프라하에서 보내고 있어 일과 시간이 끝나면 오히려 베네쇼브 거리는 한가해 진다.“고 그 목회자는 덧붙여 말했다.
역사와 전통이 서려있는 인구 약 10만 명의 작지 않는 도시가 급격하게 가까운 대도시 프라하로 그 생활권이 편입이 되고있다. 그 목회자의 말을 빌리면 비단 베네쇼브뿐만 아니라 대도시에 인근한 중소도시들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경제가 급속하게 붕괴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현상의 주된 원인으로 „소비 지향적인 사회 풍조“를 지적하였다.
1989년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바뀌면서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거칠고 거무틱틱한 화장실 휴지가 부드럽고 하얗게, 이곳 저곳을 드나들며 구입하던 일상용품과 식품을 거대한 창고형 슈퍼마켓에서  ‚한 방에 날리고‘, 주말 오두막집에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텃밭을 일구던 사람들이 주말 심야 극장가로 모여들고, 늦은 시간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던 선술집은 새벽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화려한 까페와 디스코장에 밀려나고, 대중교통이 뜸한 주말에나 움직이던 낡은 승용차들은 업그레이드 되어 아무 때나 시내를 질주하고있다. 그토록 한국 매스컴에서 자주 들어 익숙했던  „향락 산업“  „소비 문화“ 라는 말들을 이 땅 체코에서 다시 듣게 될 그날이 가까이 있음이 느껴진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2003년 11월호 32호나눔터

[살며 생각하며] 나의 친구 나의 목사 이지 슈토렉

이름 없이 프라하의 한국인들을 사랑한
나의 친구 나의 목사

이지 슈토렉을 하나님곁으로 떠나보내며

1994년 2월 설교자가 없어 중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프라하 한인교회 교인 자녀들이 푹 머리 숙이고 카세트 녹음기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던 모습에 해외에서 절대 한인교회 목회는 하지않겠다던 나의 다짐이 무너졌다. 1년이 넘도록 자신들의 목회자를 찾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체코교회로 파송하는 마음으로 보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사실상 이제 교회를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었다.

단지 설교를 하였지만 설교자에게 교인에 대한 신앙적인 보살핌은 자연스럽게 설교와 함께 수반되는 일이다. 체코에 좀 더 깊이 뿌리를 내리려는 조급한 마음으로 그때부터 언어를 익히는 일과 체코교회를 출석하며 교회를 이해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때 체코교회에서 두 사람의 목회자와 한 사람의 평신도와 깊은 교제를 하였다. 그들은 내가 체코교회를 이해하는 관문이 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지 슈토렉 목사였다.

현재 필자가 소속되어 일하는 체코형제개혁교단의 해외교회협력부의 책임자가 선교적인 활동이 가장 왕성한 교단의 대표적인 목회자로 추천을 하여 그와 처음 만난 것이 1995년 가을 무렵 프라하 4지역의 이쥬니 므녜스또에서 열린 주일 저녁 예배였다. 프라하 지역에서 유일하게 슬럼화가 되어가는 프라하 4지역의 이쥬니 므녜스또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감리교회 침례교회 체코형제개혁교회 그리고 카톨릭교회 기독교인들이 연합해서 예배를 드리며 서로 일치하여 자신의 지역을 복음으로 섬기는 선교활동을 하고있었다. 이 에큐메니칼 선교활동의 주창자가 바로 이지 슈토렉 목사였다.

몇 차례 그 예배와 활동에 참석하면서 그를 더 깊이 알게되었다. 카톨릭과 개혁파들 사이의 오랜 종교전쟁으로 분열된 체코 교회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무신론적인 사회에 가까이 가려는 그의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종교적인 도움을 배척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관리하는 수용환자 800명, 의사 직원이 천명이 넘는 대단지 마을을 이루고 있는 프라하 8지역에 있는 보흐니쩨 정신병원과 지역 목회자로서 깊은 신뢰를 형성하여 병원에서 임명한 환자상담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그는 지역사회에 눈에 보이지않게 무신론적인 사회분위기와 기독교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무는 일들을 하고있었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세우는 그의 활동은 역설적이게도 오랫동안 생존을 지상과제로 삼은 소수파 체코개혁 기독교회가 스스로 사회를 향해 쌓아놓았던 벽과 동시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체코교회의 문제를 안팍으로 직시하고 있던 그에게 서로 다른 민족의 기독교회들과의 일치와 연대에 대한 필요성과 그 중요성에 대한 나의 설명이 그리 어렵지않게 이해되었다. 당시 나는 찰스대학의 개혁신학부 박사과정을 하면서 체코형제개혁교단에서 체코교회의 경험과 한국교회의 경험을 상호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프라하 8지역의 꼬빌리시 교회의 담임인 이지 슈토렉 목사와 이웃하고 있는 프라하 7지역의 프라하 연합한인교회(이전 프라하 한인교회) 담임인 오형석 목사에게 두 교회가 한 달에 한번 연합예배를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양쪽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각각 당회와 제직회에 의견을 물어보기로 하였다.

이 제안을 계기로 이지 슈토렉 목사는 체코의 한국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한번은 대우 아비아의 직원의 자녀가 어려운 질병에 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질병 때문에 의료보험 연장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이지 슈토렉 목사는 자기 일처럼 나섰다. 의료보험회사의 책임 있는 사람을 만나 그 자녀를 위해 보험회사가 마련한 특별기금으로 보험처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정을 이끌어 내기까지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그 자녀의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더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단 이 일 만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체코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함께 아파하고 그리고 힘써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그는 언제나 노력하였다.

그는 췌장암이란 판정을 1년 반 전에 받고 금년 6월 28일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년 반 동안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그 시간들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크게 배운 시간이었다. “이 목사, 의사 선생님이 이제부터 내 인생이 이전 보다 더 좋아진대.” 중요한 내장 기관에 퍼진 암을 떼어낼 수 없어 그대로 봉합을 하고 나온 후에 한 그의 농담이었다. 영문을 모른 나는 수술이 잘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 내 인생은 이전 보다 질적으로 훨씬 좋게 될거야.” 매주 월요일마다 검사를 받고 화요일마다 항암치료를 반복하였다. 항암치료로 힘이 들면 쓰러져 누웠다가 다시  한 줌의 힘이라도 생기면 일어나 목회 일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그에게 이전과 다른 일상생활이 있다면 병원에서 치료 받는 일이었다. 질병이 그의 육신을 죽어가게 하였지만 그의 일상생활과 그의 마음과 정신은 더 생동감을 느꼈다. 언제 부턴가 그는 욥기 42장 5절에 나오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는 욥의 고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설교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의 눈으로 이해한 성서의 깊이에서 흘러나왔다. 때로는 마치 누설된 천기를 듣는 것과 같아 전신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언제부턴가 팔 다리의 모든 근육이 풀어져 걷거나 설 수 없게 되어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설교를 하고 성만찬을 집례하고 세상을 떠나기 한달 전 사랑하는 막내딸의 결혼식을 집례하였다. 이미 자신의 시간을 예상한 듯 6월 29일 마지막 주일날로 예정된 결혼식을 한달 앞당긴 것이다. 그 날 결혼식을 마치고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한국인 교우들이 모인 곳을 찾아왔다. 결혼식 때문에 늦어진 예배시간을 사과하였고 딸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언과 같은 몇 마디를 자신의 한국교우들에게 남겼다. “여러분들은 우리 체코교회의 천사들입니다. 이곳은 여러분들의집입니다. 이 교회를 지켜주십시오. 다른 곳으로 떠나지 마십시오.” 세상을 떠난 그 주간 월요일 6월 23일 그는 당회에 참석하여 세시간이 넘게 중요한 일들을 마무리하였다. 마지막으로 당회에 교회 정원에 생길 납골당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안건으로 내어 당회는 그것을 결정하였다. 7월 첫째 주 체코 한국 연합예배 준비를 위해 그와 내가 만난 6월 25일이 마지막 이었다. 그 날 그는 “나는 고향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 보다 한국형제 자매들이 있는 이곳에 남고싶다.”고 하였다.

다음날 그는 숨찬 목소리로 전화를 하였다. 아무래도 7월 첫째주 설교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일단 그 예배를 이번에는 취소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다시 의논하자고 하였다. 그 다음날 그에게 손님이 있어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그의 방에서 나왔다. 그의 목회자요 선생님이었던 분이 방문을 하였다. 그는 그에게 축복기도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날 잠이 든 후 다음날 아침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장례절차를 모두 유언으로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6월 28일 토요일 오전 8시 숨을 거둔 직후 하늘과 땅을 소통하는 야곱의 사다리처럼 세상을 섬기는 그와 우리의 꼬빌리시 교회의 상징인  사다리 탑의 종(* 종 제작은 비뜨 성당의 종을 관리하는 체코의 유명한 종 제작 가문의 마노우쉑이 하였으며 이지 슈토렉 목사는 그 종을 <천사>로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이 종탑과 종은 한국 형제 자매의 헌금으로 세워졌다.)을 오랫동안 크게 울렸다. 천사의 종소리는 밀납처럼 누워있는 그의 침대 위로 평화롭게 그리고 나의 두 눈의 눈물로 흘러내렸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2003년 9월호 제31호 나눔터>

2003년 12월 7일

첫눈이 내린 오늘, 대강절 두번째 주일이었다.
슈토렉 목사가 세상을 떠난 이 후 그리고 다시 담임 목사를 맞이하는 그때까지 이 예배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교회와 달리 많은 부분에 전통에 의해 유지되는 체코교회여서 장로들의 역할이 교회를 운영하는데 충분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목회적인 돌봄의 공백은 곳곳에 나타난다.
이 예배는 체코와 한국 교인들이 함께 선교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엔진역할을 한다.
그러나 슈토렉과 이종실 목사의 선교적 목회적 비전이 그 역할을 견인하였다.
슈토렉 목사의 빈자리가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지난 11월 에큐메니칼 예배때 부터 예배후 간단한 음료수를 준비하였다.
예배후 교우들간의 친교모임을 위해서 이다.
한인 교우들은 이 친교모임이 마치면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 예배 준비위원이 지난 11월 부터 조직되었다.
예창열, 이현우 교우이다.
설교와 예배예전의 준비는 이종실 목사가 그리고 예배찬송가집, 분병분잔 위원, 성경읽기 담당자등 모든 준비는 두 교우들이 한다.

대강절의 기도

  • 연합 예배 (2003년 12월 07일)
  • 살전 3:9-13
  • 설교자: 이종실

031207EK
데살로니가전서 3:9-13
대강절의 기도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Advent는 라틴어 Adventus 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뜻은 “도착, 도래, 강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강림입니다.
그의 강림은 첫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의 첫번째 오심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실 그 때를 기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도 이 신앙을 설교 후에 있을 사도신경을 따라 하는 고백을 할것입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대강절 계절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신다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은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분명한 진리를 외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인간은 우리들의 인생의 마지막이 희망 없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질서와 희망을 향해 가기 보다 무질서와 혼돈을 향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는 믿음은 우리들에게 더 희망을 주고 삶의 용기를 줍니다.
오직 한 분에게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희망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것은 그들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 희망에 대한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들, 체코인들과 한국인들이 이 꼬빌리시에서 역시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고있습니다..
이 희망의 역사를 재확인 하는 때가 바로 대강절 절기입니다.

오늘 저희들이 들은 말씀은 데살로니카 교회에 보낸 사도의 편지입니다.
오늘 12절 13절 말씀을 요절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 전서 3:12-13)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를 생각하며 그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다시오심을 생각하며 무엇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슷한 기도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사도의 편지가운데도 나타납니다.
 “가
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분별할 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에 순결하고 흠이 없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표준새번역 빌
1:10-11)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안에 있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 바울의 기도를 들을 때 그들은 순결하고 흠이 없는 사람에 대한 말씀 때문에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순결하고 흠이 없는 사람들인지 아닌지 스스로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바울과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날을 준비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5-51절의 말씀입니다.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종이 주인이 돌아오는 시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예상하지 못하는 시간에 돌아옵니다.
성경말씀은 이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마 24:36)
주인이 돌아오는 시간을 알지 못하기에 주인을 기다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종들의 태도는 결정됩니다.

이 비유에서 나쁜 종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기 동료를 때리고 술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놀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이전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주인이 늦게 온다고 하여”
그가 주인은 틀림없이 늦게 올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는 주인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의 동료를 때리고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길 때 그의 마음에 있는 생각은 “나는 그가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사랑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쁜 종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처음에 바울이 주의 날을 기다리는 매일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였습니다.

“하
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 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과 같이, 색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 이런 일에 탈선을 하거나, 자기
형제자매를 해하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에도 말하고 경고한 대로, 주님께서는 이런 모든 일을 징벌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4:3-7)
이 말씀은 예수님의 나쁜 종 비유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색욕에 빠지거나
다른 형제들을 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주인이 늦게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중심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을 주신 그 분을 만날 시간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 놓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돌아오는 것을 염려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우리들이 완전하고 흠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종과 같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 우리가 나쁜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착한 종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기도가 갖고 있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되는 한가지는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는 교회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과 갖는 특별한 관계 안에서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나다.
그러므로 12절에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으로서 중요한 것은 단지 흠이 없는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인들 사이에 광신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종말을 생각했을 때 그들은 눈에 보이는 매일의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종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신의 장소를 소중하게 여김으로서 그리고 신실한 섬김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루며 자신의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매우 다양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는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드려야할 올바른 기도입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이 기도로 우리는 대강절을 맞이합니다.
이바울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만들고 우리는 매일 매일 이 기도를 드림으로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억하는 대강절을 보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