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 한인 예배 (2003년 07월 13일)
  • 시 90:1-17
  • 설교자: 오지훈

2003. 7. 13. (삼위일체 넷째주일)

본문: 시편 90편 1-17절

제목 :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설교자: 오지훈 전도사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풀은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사라지고,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들추어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분노의 위력을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주님의 진노의 위세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체코 형제 교회 성도님들을 만나게 된 것을 참으로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견습 선교사로
파송되어 약 1년이라는 기간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이렇게 여러분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픈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90편입니다. 이 시편의 제목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가 드리는 ‘기도시’ 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드린 이 기도문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세가 드린 기도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영원하신 하나님’, 5절부터
11절에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연약하고 유한한 인생’, 12절에서 17절, 끝까지는 ‘은총을 간구하는 소망’ 크게 이렇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 제가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이것이 1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이 기도 시를 썼을 당시에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광야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였을 겁니다. 광야 생활을 할 때는 편안한 집이 없었습니다. 천막을 치고 텐트 생활을 한 거지요. 1절에 나오는
‘거처’라는 단어는 여행자가 잠시 머무는 장소, 안정감을 느끼는 곳을 의미합니다. 나라와 집, 거주하는 땅 없이,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오직 하나님 만이 거할 곳이라고 모세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아니
언제나 착각을 하고 삽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도 착각을 하고 사는데, 체코인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얘기를 잠시
하면, 1년여의 생활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를 떠나면서 짐을 싸게되었습니다. 근데, 짐을 싸면서 너무나도 머리가 복잡하고 아팠습니다.
왜 이리 쓸데없는 짐이 그리도 많은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가야 하나? 오스트리아에서 겨우 1년밖에 생활을 안했는데도
생각보다 짐이 꽤 있었습니다. 저 역시 착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의 생활이 이제 다 끝났는데,
이곳이 마치 나의 영원한 거처인 양 생활을 했구나! 이것이 저의 작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가
가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곳이 영원한 거처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저부터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모세의 고백처럼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바로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인간들은 티끌에 불과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
맘을 괴롭게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제 맘이 속상해서 심히 괴로워하는 중에 주님께서 이렇게 위로를 하시더군요.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바로 3절이었습니다. 3절에 뭐라고 써 있습니까? ‘너의 인생들은 돌아가라’ 라고 되어 있지요? 그 때 이 말씀이 제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를 지금 괴롭히는 그 사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그 사람,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가 없구나! 왜냐하면, 언젠가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죽을 거지만, 그 사람 역시
죽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맘에 큰 위로가 되더군요. 혹시, 여러분 주변에 누가 여러분을 속상하게 한 일이 있거든, 시편
90편 3절을 깊이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아! 그 사람, 나를 괴롭히고 나의 맘을 상하게 한 그 사람! 언젠가는 티끌로 돌아
갈 거야. 이렇게 한번 맘을 먹어보십시오. 그렇게 맘을 바꾸면 갑자기 그 사람이 불쌍해 질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전보다는 덜할 겁니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자, 곧 영원한 하나님 아래서, 우리는 다 같은 피조물이라는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게 됩니다. 유한한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중 불교는 윤회설을 주장합니다. 돌고 돌고, 또 돌고…. 시간의 끝이
불교에서는 없습니다. 니르바나, 즉 열반에 들어갈 때까지는 불교적 시간관은 계속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시간입니다. 바로, 원적인
시간관입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이와는 현저히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라고 시작됩니다. 처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이 존재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처음과 끝이 명확합니다. 직선적인 시간관을 갖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시간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시간을 뛰어넘으시는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간 또한 친히 창조하고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곳 유럽 지역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처음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영원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전도서 12장 1절부터 2절을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을 기억할 뿐 아니라, 유한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기꺼이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5절부터 12절까지 말씀을 다시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오늘 설교 제목이 뭡니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다 함께 따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여러분! 방금 전에 제가 우리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착각인가 하니,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인양 착각하고 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되십니다. 우리가 늘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착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90편에 전체적인 주제인 ‘시간’과 관계된 착각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생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군생활을 할 때 장교로 생활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남북한으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저는 군대 시절을 휴전선을 지키는 소대장 생활을 하고 중위로 전역항였습니다. 군 시절에
삽질을 비롯하여, 밤에 잠 안자고 함께 근무 서는 병사와 장기두기, 말 지지리도 안 듣는 부하들 열심히 혼내주기 등등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배웠지만, 그 중에 배운 가장 유익하고 좋은 것은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중에 군에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군에서 휴가를 나갈 때, 그냥 휴가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옷도 다리고,
구두도 닦고 모자도 빠빳하게 데리고… 무엇보다도 휴가증이 있어야 휴가를 갈 수 있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부대에서는 병사들 휴가
내보내기 전에 휴가 계획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몇 박 며칠 휴가기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계획서를 제출해야만
제가 내용을 확인하고 휴가증을 주었습니다. 근데 이것을 뭐라고 불렀냐면 꺢캤린宛퉬이라고 불렀습니다. 단어 뜻을 풀어본다면 겣  후
자, 걸음 보 자, 붙여보면 꺏斌?퐚 좀 유식하게 영어를 써서 표현하면  꺕  스텝 플랜  정도 될 겁니다. 꺏米  걷는다 
라는 뜻이죠. 계획서는 이렇게 작성됩니다. 몇 박 며칠 휴가라고 할 경우, 돌아오는 날부터 계획서는 작성됩니다. 즉 복귀일로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작성을 하는 겁니다. 이를 뭐라고 부른다고요? ‘후보 계획’이라고 합니다. 후보계획은 복귀일부터 시작하여 휴가
출발일로 끝나게 됩니다. 이 계획서에서의 시간은 거꾸로 흐릅니다. 어떤 병사는 후보 계획을 알차게 세웁니다. 세세한 시간까지 적어
넣으면서 알차게 세웁니다. 왜냐하면 휴가 시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귀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제대를 얼마 앞둔 말년들은 어떻습니까? 형식적으로 대충 대강 적어서 제출합니다. 휴가를 다녀 온 병사들에게 휴가 기간 잘
보냈느냐 라고 물어보면 후보계획을 잘 세운 병사와 후보계획을 대강 세운 병사의 대답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형식적인
것처럼 보여도 귀한 휴가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한 병사의 시간과 대충대충 후보계획서를 작성한 병사의 시간은 질적으로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한한 인생을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영화속에 수퍼맨만 앞발을 이렇게 내밀고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신속히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삶을 보람 있게 보내려면 우리 모두는 ‘인생의 후보계획’을 잘 작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는 인생의 계획을 ‘지금’이라는 시점을 기준으로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중에는 앞으로 살 날이 지금껏 살아 온 날보다 그리 많지 않은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태어난 것은 순서가 있어도 죽는
것은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 죽을 것인가? 과연 나는 언제 죽을 것인가?

제가 좋아하는 한국의 위인 중에 일제 시대 살았던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분은 일제 암흑기 시절에 어린
학생들을 계몽하는데 애를 쓰신 교육자였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사상가인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었고, 도산 학교 2대 교장을
지내시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거의 도가에 나오는 도사처럼 사신 분입니다. 그분의 기이한 행적 중 이 시간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정하고 사셨습니다. 하루에 잠도 겨우 4시간밖에 주무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식사를 단 한 끼만 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절제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기차를 타고 두 시간 가야 할
거리도 걸어 다니셨다고 합니다. 밤 8시부터 12시까지가 그분의 취침 시간이었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깨어서 활동을 했습니다. 밤
12시에 일어나면 그 한밤 중에 성경 말씀과 여러 서적을 읽고 주로 기도와 묵상을 했습니다. 동이 틀 때까지 말씀을 보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한 도인이었는데, 절제와 규칙적인 생활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자신이 죽기로 작정한 그날에 결국 죽지 못하고 몇
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자기가 정한 기한 내에 죽지 못했습니까? 죽기를 작정하고 하루하루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오래 사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은 하루하루가 종말론적인 삶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똑바로 살기
위한 몸부림이 매일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일 당장 죽는다면? 아니, 이 예배가 끝나자마자 죽는다면? 여러분!
다시 12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 모세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혁 신앙의 숭고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체코 나라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연약함은 더 큰 성숙으로 나아가는 원인이 됩니다. ‘아,
내가 바이올린을 참으로 못하는구나’ 깨닫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열심히 해야지’ 이런 각오와 결심을 갖고 바이올린을 합니다.
근데, ‘아, 난 바이올린을 참 잘해’ 이런 교만한 사람은 오히려 그 이상의 발전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부족함은 우리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 즉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정된 시간을 주셔서 근신하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회 신부였던 헨리 나우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한데, 이런 내용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가장 큰 선물이다” 죽음이 선물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유한함을 깨닫고 겸손히 그분께 나아갈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유한함, 즉 허무함을 깨달을 때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13절에서 17절을 제가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이 단락은 앞에서 살핀 두 단락의 내용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 단락 6절을 살펴보면, 우리 인생의
덧없음을 뜨거운 태양 아래 금방 시들어가는 풀의 꽃에 비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분위기가 강렬한 소망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급작스러운 반전은 하나님의 시간을 깨닫는 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흔히 신학에서는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나는 크로노스 적인 시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 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라는 것은 시간의 양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카이로스의 시간은 시간의 질적인 개념입니다. 크로노스는 그냥 일상적인
시간입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카이로스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학교 수업 시간을 상상해 봅시다. 그것도 밥을 방금 먹은 오후의 첫 수업시간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시간은
졸음도 오고, 매우 졸린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이 크로노스적인 시간입니다. 학생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흘러가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업 마칠 즈음이 되어 교수님이 시한폭탄을 투척하는 발언을 합니다. 이런 말씀을 합니다.
“자, 다음 주 이 시간에 시험을 보도록 하겠다. 그 시험에서 점수가 시원찮은 학생은 모두 낙제시키마!”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졸음을 깹니다. 그것도 그냥 깨는 것이 아니라 확 깹니다. 그 때부터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의미 없던 시간이 의미가
생깁니다. 무의미하던 시간이, 양적인 시간이 질적인 시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교수님의 선포 이후, 학생들에게는 시험 보는 그
날까지 일분일초가 소중한 시간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다함께 고린도 후서 6장 1절에서 2절을 한 목소리로 찾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시간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전반부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은총을 소망하며 간구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고 그에 반하여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한계를 지닌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만든 지혜가 그에게 이러한 소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주님의 은총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혼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모세의 기도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한 기도입니다. 모세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라는 표현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바로 ‘우리’ 입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은 이후의 시간, 즉 카이로스 적인 시간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시간은
‘나’를 넘어서는 시간입니다. 나를 넘어서 그것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미국 영화중에 ‘나홀로 집에(Home
Alone)’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아주 어린 꼬마애가 크리스마스 휴가기간 동안 집에 혼자 남겨져 집을 지킨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전 그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나홀로 천국에(Heaven Alone)’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에 있는 사람들은 ‘나홀로 천국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천국에(Heaven All Together)’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 누가 복음 19장 8절에 삭개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을 만난 ‘그 시간’ 이후, 그 ‘하나님의 시간’에 삭개오는 이런 놀라운 선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과거에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다가 비로소 남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 즉,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그림을 보러 미술관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뭉크가
누군지는 몰라도 공포 영화 ‘스크림’을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절규’라는 작품은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런 그림입니다. (표현을 해준다.) 아무튼, 그런 그림을 그린 화가인데, 이 화가의 그림을 쭉 감상하는 중에 말년에 그린 작품 중
하나가 제게 너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작품은 마침, 전시실 출구 나가는 곳 끝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그의 인생
여정을 헤아린 미술관의 사려깊은 공간배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작품 제목은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입니다. 그림을
보면 왼편에는 뭉크자신보다 커다란 괘종시계가 있습니다. 그 괘종시계에 시침과 분침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가운데에 늙은 노년의
뭉크가 두 팔을 내리고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고 그냥 서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그 방 뒤편에는 하얀
문이 열려 있고 그 사이에는 무수한 그림들이 걸려 있습니다. 뒤에 걸려있는 그림들이 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 자신이 화가였으니까요. 문이 하얀 것은 아마 천국을 향하는 자신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머리 속으로 상상해 보십시오. 늙은 뭉크가 손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축 내려놓고 있습니다. 옆에는 시계가 있는데 시간은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침대가 있습니다. 침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성경에도 죽음을 ‘잔다’ 라고 말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괘종시계에 시간이 명확히 나와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침대, 바로 죽음은 직시하지만 언제 죽을지
시간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뭉크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았기에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어두운 면,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 소외감, 죽음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이 특별히 제게 와 닿았던 것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중에 12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에게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시간의 유한함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의 삶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는 그분의 지혜입니다.

끝으로

어느 무명 시인의 시 한편을 낭랑한 목소리로 낭송하겠습니다. 바로 저의 시입니다.

제목 : 장례식 연습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난 자리에 눕는다

이미 지나가 버린

아직 남아 있는

곧 다가올 나도 모르는

수많은 일들을

살그머니 내려놓고서

난 자리에 눕는다

오늘 이것만큼은

반드시

해내리라 다짐했건만

끝내는 못 끝낸 일들

아쉬워하며 후회하며

반듯이 

자리에 눕는다

다리를 뻗고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고

하루 동안

지은 죄

그분께 아뢰며

그 나라에 가고픈

마음 속

깊은 열망 되뇌며

엄숙하고, 고요하게

오늘도

자리에 눕는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풀과 같이 연약한 우리를 기억하시고 극진히 사랑하셔서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간 감사드릴 것은 우리에게 시간의 귀중함을 깨닫게 해주셔서 우리를 겸손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영원한 주님을 붙들고
매일 매일 살게 도와주소서. 모세의 기도처럼, 우리에게 우리 날 세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참
지혜란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임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주님을 모시고 우리에게 허락한 시간 속에서 나
혼자가 아니라,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였던 모세처럼 그렇게 기도하며 살게 도와주세요.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오지훈 전도사는 장로회 신학대학(광나루) 신대원에 재학중 오스트리아 단기선교사 1년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십계명,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2)

  • 한인 예배 (2003년 07월 06일)
  • 출 20:12-17
  • 설교자: 이종실

030706 (삼위일체 셋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0:12-17
제목: 십계명,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2)

<본문>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찌니라
14 간음하지 말찌니라
15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설교>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십계명 후반부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에 거듭 강조를 하였던 것은 십계명은 맹목적으로 지키고 따라야 하는 율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응답하는 방법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마가복음 12장 29-31절에 나오는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서기관이 질문하였습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십계명의 첫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입니다.
이 부분을 지난 주에 저희들이 함께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웃사랑의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웃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십계명의 다섯번째 계명부터 마지막 열번째 계명이 이에 대해 언급하고있습니다.

오늘 언급할 여섯개의 계명은 그 하나 하나가 별도의 설교의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웃사랑의 방법으로서 전체를 하나로 뭉뚱그려 그 중심되는 흐름과 원리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에 다섯번째 계명이 나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12절)

이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십계명의 전반부에 포함시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관계성의 특별한 의미 때문입니다.
부모는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실 때 언제나 그 비유로 부모를 비유하였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설명할 때에도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이처럼 부모는 이세상에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번째 계명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앞의 네 계명과는 구별이 되고 오히려 뒤따라 나오는 계명으로 부모라는 인간관계가 다른 인간사이의 관계로 그 범위가 넓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맺는 첫번째 인간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시고 그 가정을 통해서 결정해주신 관계입니다.
이것을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의 관계는 마치 부모와 자녀의 관계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회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과 우리들의 관계역시 무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인간관계를 자기 의지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결정된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계명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에서 공경이란 단어는 “무겁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누구를 무겁게 여기는 것, 중요하게 대하는 것이 공경한다는 히브리 낱말의 본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공경한다는 말은 누구를 가볍게 보거나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것입니다.
여기서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 나이 많아 힘이 없어 누군가가 돌보아 주어야 하는 부모를 말합니다.
부모가 아직 젊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자녀들이 부모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부모의 재물 때문입니다.
부모가 재물이 있으면 자녀들이 서로 모시고 살려고 합니다.
부모님들의 고민은 늙어서 어떻게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않게 살면서 자녀들로부터 못 볼꼴 보지않고 살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 입니다만, 이번 IOC 총회 때문에 많은 행사들이 있어 체코의 젊은 한국 청년들이 봉사를 하였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신문 방송 기자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양도 없고 시간도 안지키는 사람들이 국장 직위를 가진 분 앞에서 시간도 칼같이 지키고 태도도 보통 때와 다른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재물이든 권력이든 힘이 있는 사람을 누구나 무겁게 생각할 줄 압니다.

그러나 오늘 다섯번째 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나이 들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어버이를 잘 모셔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족 이기주의에서 부모를 이해는 것도 오늘의 계명을 제한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염치도 없고 수치심도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자신의 가문의 확장과 영광이 이어지게 하는 것을 임무로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는 사회를 이어가는 뿌리입니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생의 과정에서 바뀌면서 사회는 이어져 갑니다.
우리 인간은 부모 없이 인간 사회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대대로 부모를 통해 전해지는 인간사회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영향으로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나 홀로 우리 가정 홀로 제 힘만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보시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를 본문은 특별히 밝히고 있지않습니다.
예를들어 부모가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들은 자신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하지않았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번째 계명은 우리가 부모라 부르는 나이 들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계명에 뒤를 이어 간단한 말로 표현된 네개의 계명이 따라 나옵니다.

살인하지 말찌니라 간음하지 말찌니라 도적질 하지 말찌니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찌니라 (13-16절)

이것은 우리의 이웃의 생명과 가정과 소유를 가볍게 보거나 아무렇게나 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의 이웃에게 준 것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13절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웃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을 때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형제도를 명령하신것과 전쟁을 명령하신 것을 함께 어떻게 이해해야될지 우리들은 당혹스러울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율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틴과 보복에 보복을 이으며 끝나지 않는 전쟁을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전쟁과 사형제도는 이 계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구약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의문들을 뒤로 하고 13절의 살인금지 계명의 그 근본정신을 저와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할 것 입니다.

다시말씀드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한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웃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생명을 살리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자연환경파괴와 인권침해와 전쟁과 굶주림의 사회문제를 우리 신자들은 그래서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14절에 간음에 대한 계명입니다.
앞에나오는 살인하지말라는 계명과 관련해서 이 계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웃이 맺고있는 혼인관계를 침해할 수 없습니다.

결혼은 인간의 성적욕구를 충족하는 사회 시스템이 아닙니다.
한 가정은 사회의 출발입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결혼과 한 가정을 파괴하는 것뿐 아니라 전체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스팸 메일의 대부분이 포르노 사이트 광고물입니다.
날이 갈수록 대범하고 자극적입니다.
열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는 신념으로 끈질기게 보냅니다.
성도덕의 문란의 위험이 바로 우리들 곁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한 나라의 패망의 요인으로 꼭 들어가는 것이 성도덕의 문란입니다.
하나님은 결혼과 성 관계가 분리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결혼과 성 관계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하나님 안에 있는 신비입니다.
이 축복과 신비를 존중하고 지켜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14절에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나옵니다.
구약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계명은 사람을 종으로 부리든지 팔아먹던 일을 금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은 인신매매와 유괴를 금하는 계명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단지 노동력을 목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는 하지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의 인간관계가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시여길 때 우리는 이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체코의 한인사회를 보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체코에 체류하는 목적이 인간관계보다 더 우선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나치게 목적지향적으로 살고있습니다.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만 우리의 이웃을 수단으로 삼는 위험도 함께 도사리고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에 이어지는 것은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는(16절) 계명입니다.
이것은 법정에서의 증언과 관련되어있는 내용입니다.
법정의 증언은 때때로 이웃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증언은 진실해야합니다.
거짓증언의 결과는 잘못한 일이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죄인이되어 평생 머리를 들지못하고 살게됩니다.
이 계명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법정에서의 다툼에만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지혜롭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말 한마디, 무책임하게 던진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영원히 교회를 떠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체코에서 우리 한국인들의 만남은 피할 수 없습니다.
교인이 말 한마디로 타인에 가슴에 못을 박고 그 명예와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그 사람은 절대로 교회로 올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교회는 누구나 올 수 있어야 합니다.
실수와 잘못을 한 사람일수록 그들에게 더욱 교회의 문은 더 넓게 열려있어야 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저와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교회 문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우리 꼬빌리시 한인교우 여러분들은 절대로 남의 실수와 잘못을 비판하지 마십시다.
절대로 남의 실수와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마십시다.
더구나 거짓말을 하거나 이웃을 모함하는 말은 절대로 절대로 입밖에 꺼내는 것은 물론 행여 마음에도 품지 마십시다.

나의 말 한마디가 본의 아니게 마음의 상처를 입혔으면 지체 없이 용서를 구하면서 반성을 하며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을 끊임없이 노력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실수와 잘못으로 비난 받는 이웃과 한인사회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가르쳐 주신기도로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이 나 같은 못난 죄인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의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17절)

열번째 계명이 다른 계명들과 구별되는 것은 다른 것은 행위를 금한 것이라면 이 계명은 마음과 생각을 금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은 무엇이든지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삐뚤어진 마음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의 것으로 잠시 맡겨둔 것임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잘못된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의 위대함을 이해하지도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잘못된 마음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남의 것을 부러워하고 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과 은혜를 발견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탐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 깊은 곳을 지배하게 하는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많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십계명,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29일)
  • 출 20:1-11
  • 설교자: 이종실

030629 (삼위일체 둘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0장 1-11절
제목: 십계명,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

<본문>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설교>
체코개혁교회는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 이 세가지를 끊임없이 그 시대에 따라 해석을 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전통이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함께 읽은 본문은 출애굽기의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이란 말에서 저와 여러분들은 대체로 엄격히 지켜야 할 율법, 율법을 엄수하려는 바리새인,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신 예수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는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여기에는 저와 여러분들이 십계명에 대한 오해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우리 인간이 지키지도 못할 것을 부담스럽게 안겨준 하나님의 명령으로 우리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킬 수 도 없는 명령을 주신 이유는 우리 인간 모두가 죄인임을 깨우쳐 주기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구약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있다고 가르치고 그리고 배우고있습니다.

십계명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8절에 십계라는 말이 나옵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여기서 십계는 언약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십계를 지켜야될 법, 엄수해야될 명령 이라고 하지 않고 언약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언약의 말씀을 계약의 조문으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서로 약속을 하여 맺어진 계약입니다
다시말씀드려 십계명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명령하거나 맹세한 것이 아니라 두 편이 서로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의 앞날을 책임질 것과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기로 쌍방간에 약정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알고있는 십계명의 첫째계명이 3절에 나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첫째계명은 2절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것은 십계명의 서론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첫째계명으로 생각하는 십계명의 서론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명을 주면서 서론으로 만약에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켜 행하면 나는 너희를 구원할 것이며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이 자신의 계명보다 앞서고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
하나님의 은혜가 계명보다 앞섭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따라 살아야 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베풀어 주신 말할 수 없이 크신 그 은혜에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내편이 되신 하나님,
홍해를 갈라 안전하게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하나님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더위를 잊게 하시는 하나님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와 어둠을 물리쳐주시는 하나님
방향 모르는 사막에서 구름과 불기둥으로 길을 안내해 주시는 하나님
목이 마를 때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는 하나님
굶주릴때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하나님
노예의 삶에서 자유의 삶으로 이끌어주신 하나님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려는 응답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그 대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십계명의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대사관의 공무원들은 공무원들로서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애국애족의 열정을 품어야 되는 공직자의 윤리가 있습니다.
그 윤리가 공무원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군인들은 군인으로서의 절도와 명예를 드러내는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사업가들은 상업상의 윤리가 삶의 스타일입니다.
학생은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의 윤리와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목사는 성직자의 윤리와 그에 걸 맞는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 신자들은 신자들의 신앙윤리와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은 술과 담배 안하고 세상 노래와 춤 추지않고 말소리나 행동거지로 경건의 겉 모습을 잔뜩 꾸미는 것으로 많은 분들이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노력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한번은 서기관이 예수께 질문 하였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마가복음 12:29-31절에 나옵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은 분명히 십계명의 전반부와 후반부와 관련되어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함께 읽은 십계명의 전반부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십계명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까?
성경의 오늘의 말씀에 명백한 것은 그것은 단지 감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전반부는 우리가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3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올바르게 섬기며 하나님이 아닌 것을 신성시하거나 절대화하지않고 그것을 하나님 곁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 이래로 숭배의 대상을 신성화 하고 절대화하였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인간이 하늘과 자연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떤 시기에는 민족을, 어떤 시기에는 국가를, 어떤 시기에는 군사력을, 어떤 시기에는 경제력을, 어떤 시기에는 이데올로기를, 어떤
시기에는 인간의 이성을, 어떤 시기에는 예술과 문화를 어떤 시기에는 과학기술을 인간은 신성시하고 절대시하였습니다.
결국 인간이 신성시 하고 절대시 하는 것들이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시작한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명령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선언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악의 세력에 빼앗기기를 원치 않는다는 강력한 선포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권능과 그 손에 넘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 아닌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것입니다.

4절에 두번째 계명으로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두번째 방법은 우상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번째 계명을 들으시면서, 나는 우상을 만들지 않으니 이 계명을 나는 지키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4절과 5절의 본문을 찬찬히 읽어보시면, 우상이란 숭배의 대상이 되는 형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고대에 신의 형상은 신의 거주지를 의미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과 소유와 권력 아래에 신을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신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 원죄이고 에덴동산의 타락이며 하나님 창조의 파괴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상상력에 따라서 표현한 하나님의 형상 앞에 절할 때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지않습니다.
사실 신 없는 것에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소유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않습니다.
1994년 프라하 한인교회에 목회할 때 한 분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감사헌금을 드리면서 그 봉투에 “하나님, 이제부터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하나님을 나의 심부름꾼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적었습니다.

우리가 신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소유로 삼는 특권이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5절에 이 것이 매우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다른 신에 넘겨주길 원치 않습니다.
만약에 자신의 백성이 완전히 당신의 것이 되지않으면 우리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세번째 방법이 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술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예는 고대사회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려는 근본적 갈망이 있습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자신의 힘을 원한 어떤 방법으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일컬어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에서 하나님이 우리들과 어떤 관계를 원하시는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개인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나와 너의 개인적인 관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나와 너의 관계성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나와 그것의 관계로 이해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서의 마지막 네번째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8절)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십니다..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라고 말씀입니다.
우리는 칠일중의 하루를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만약에 칠일의 하루도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면 우리들의 생애에 우리가 진정으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언제 고백할 수 있습니까?
밥을 먹지않고 보약으로 우리의 건강을 지켜갈 수 없습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인생의 시작과 끝과 그 길을 깨닫고 우리에게 참된 삶을 불러일으키는 날입니다.
밥이 몸을 건강하게 하고 질병을 이기게 하는 것으로 의식을 하며 밥을 먹을 때 감격해 하면서 밥을 먹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가 되니까, 배가 고프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어야 되는 줄 알고 먹습니다.
어떤 때는 밥이 맛있고 어떤 때는 돌을 씹듯 맛이 없고 그렇지만 하루 식사는 거르지 않습니다.
생각 없이 의무적으로 떠넣는 밥숟가락 때문에 우리들의 육식이 힘을 얻고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몸이 아프거나 쇠약해지면 의사를 찾고 약을 찾고 보약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루세끼 밥을 규칙적으로 먹고 운동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 방법입니다.

안식일이 하루 밥 세끼 먹는 일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것 하면 영적으로 건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이것 못하면 영적으로 약해져서 온갖 시험이 병균처럼 득실거리게됩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지 않으려는 신자의 응답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의 안식은 국어사전에 “편히 쉼”으로 설명되어있습니다.
영어로 Sabbath 라고 합니다.
이 sabbath 라는 단어의 어원은 stop 이라고 합니다.
움직이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일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쉬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멈출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들 앞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쉴 수 있습니다.

<짚차와 짐을 머리에인 어떤 할머니>.

우리가 쉬며 거룩하게 하나님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할 때에 쉬지않고 일하는 것은 차를 타고도 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할머니와 같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저희들은 십계명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계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설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해야하는데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된 나머지 계명을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이 시간 한번 우리들이 신자로서 어떤 삶의 스타일을 갖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나를 구원하시고 지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나 여호와는 너의 하나님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일방통행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이 시간 눈을 감고 침묵하면서
나는 지금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고 있는지 자신을 바라봅시다.

나는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가?
나는 하나님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의 것인가?
나는 하나님을 너와 나의 개인적인 관계성 안에서 이해하는 가?
나는 하루를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키는가?

<기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22일)
  • 요 9:1-7
  • 설교자: 김영만

030622
제목: 하나님의 하시는 일
본문: 요한복음9: 1-7 요절/ 요한복음9: 3 

<요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설교>
오늘 말씀에는 소경이 나옵니다.  또 이 소경을 놓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야기하면서 나눴던 소경에 대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러면 과연 소경은 어떤 사람일까를 한 번 생각해 볼 것입니다.  또 그 소경을 놓고 제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했으며 예수님은 그 소경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볼 것입니다.  끝으로 결국 소경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살펴보기
원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세상에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 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
웃을 때도 있었지만 슬퍼 울 때도 있었습니다.  사랑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외로움이 밀려 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기뻤던 일은 잠시 같은데 슬펐던 일은 이에 비해 많은 것 같고 기뻤던 일 보다 슬펐던 일 들이 더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남이 나를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능력 없음을 지적 받기도 했습니다.  경쟁에서 밀려 보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치여 보기도 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실수도 하였습니다.  외국 삶 속에서 정처가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 중에 한 사람 오늘 본문에는 소경이 나옵니다.  그러면 소경은 누구입니까?  그는 물론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더구나 그는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봐 본 적이 없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으면
어떠할까요?  캄캄할까요?  답답할까요?  불편할까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요?  그는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는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들을 봐 본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소경은 보지 못하는 자이고 두 번째 소경은 슬픔의
사람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을 길 가실 때에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경
앞에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제자들이 이 소경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여기서 우리는 이
소경과 이 소경을 두고 질문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입니다.  더구나 8절에
보면 이 사람은 길거리에서 얻어먹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놓고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게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소경이요 거지 되게 했습니까?  부모입니까? 자신입니까?  아니면 그의 인생에 관여했던 어떤
스승이나 지도자입니까?  세상 때문입니까? 
최소한 소경 자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경이 되리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소경이 되는데 무슨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책임질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는 지금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행 중에
태어나서 앞으로도 불행하게 소경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어떤 것들은 나에게 주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내가 선택해야 될 것들도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나
자신 중에 나의 외모일 수도 있고 내적인 성격 등 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생기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생기고 나의 자아
중에 깊은 부분 그런 부분을 내가 어떻게 하고자 해서 그런 내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것입니다.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부모님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 때문에 부모님들이 속 상할 때가 많지만 부모님들
때문에 자녀들이 상처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가난한 가정에 태어납니다.  또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깨어진
가정도 있습니다.  또 주어진 것 중에는 생명도 주어진 것이 될 수도 있고 건강도 주어진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어진 것들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불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생겼을까?  왜 나는 남들처럼 능력이 없을까?  왜 나는 하필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  왜 우리 아버지는 허구 헌 날 술만 마시고 왜 우리 부모님은 매일 같이 싸우기만 하실까?  나는 왜
이런 남편 이런 아내를 만났을까?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행복하지 않다면 누구 때문일까? 내 죄 때문일까 부모님이
죄가 많아서 그럴까?  이렇게 생각되실 때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소경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선택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선택 중에 하나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일 겁니다.  직장도 본인이 선택을 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체코라는 나라에 와서 사시는 분들인데 이것도 하나의 선택이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많은 선택 중에 혹시 본문의
소경처럼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해 보지도 못하고 선택한 경우는 없습니까?  그 선택이 그렇게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 그래서 우리에게 그 선택이 아픔이 될 때 우리는 또다시 본문의 소경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러면 이 소경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제자들이 왜 이렇게 질문했을까요?  다르게 말 할 수는 없었을까요?  예를
들어 제자들은 이렇게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저 소경이 너무 불쌍합니다.  주님께서 고쳐주소서”  왜냐하면 제자들은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을 직접 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자들은 38년 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소경이 나음을 입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소경이 저렇게 된
게 뉘 죄로 인함인지 물었습니다.  “참 소경이 불쌍은 하다 그런데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저렇게 되었을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생각하기를 잘 합니다.  주위의 어떤 누가 좀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그것 봐라 그러면 그렇지 내가 뭐랬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별로 은혜를 못 받다가 주위의 어떤 사람들이 좀 힘들어 지면 그 때 은혜 받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고난이 무엇을 잘 못 해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생각에는
인과응보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인과응보적인 요소 하면 생각 나는게 욥이 고난 당하고 있을 때 욥의 세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이 죄로 인한 환란과 곤고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꼭 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것이 다 죄 때문이라면 구약의 요셉의 삶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까?  욥기에 욥의 삶은
어떻게 설명이 되고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삶은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둘째로 제자들의 생각 속에는 “할 수 없지 뭐 저렇게 된
거” 라는 체념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거라면 모를까 소경인데 그것도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거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저 사람에게 무슨 변화가 온다 든 가 저 사람이 어떻게 뭐 치료가 된다 든 가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깔려 있을 수 있습니다.  체념입니다.  저 사람 문제만큼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문제가 중하기 때문에 그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해결의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우리 주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소경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진 것이 아니라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한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납니다.  누가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까?  능력이 많으면 모를까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 받고 있는 사람이면
모를까 아픔이 많다면 가장 많은 사람을 통해 비천하다면 가장 비천한 자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보실 때 제자들처럼 인과응보적인 생각에 기초해서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소경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해서
할 수 없다고 생각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자 가장 상처가 많은 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자 소경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날 것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서 1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패하시고
이새의 아들 중에 사울의 뒤를 이을 사람을 예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새에게는 아들이 여덟이 있었습니다.  이새는 사무엘이
함께 하나님께 제사 드리자는 소리를 듣고 그의 아들들을 한 곳에 불러모았습니다.  사무엘이 모여있는 이새의 아들들에게 들어가 보니
엘리압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압은 용모와 신장이 준수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속으로 생각하여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압을 주목하여 보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들들인 아비나답,
삼마도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덟 중 일곱이 다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이
모두를 주목하여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 이상한 것은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은 정작 그곳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없었을까요?  아마 이새가 다윗을 부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에 다윗 쯤 없어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위로 일곱이나 있는데 용모와 신장이 준수한 엘리압도 있는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작
다윗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으로는 별로 귀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소경 한 사람을 지켜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의 삶에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소경의 삶을 주관하시고 소경의 삶을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소경의
모든 고난에 함께 하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서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소경의 그 동안의 모든
아픔은 소경의 그 동안의 모든 설움은 그의 모든 눈물은 그의 모든 상처는 이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속에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
속에 봄볕에 눈 녹듯이 녹아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경의 삶을 붙들고 계십니다.  크신 계획 속에 높은 경륜 속에 그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있으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는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고난이 무가치한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는 가치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목적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는 목적이 있습니다.  내게는
대책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대책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높은 경륜속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모든 아픔이 우리의 모든 상처가 치료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의미 없이 느껴지던 것에 의미가 부여되며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이래서 이랬구나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기대 할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경륜을 붙들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6절 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29절에서 두 소경의
눈을 띄워 주시는데 그들의 눈을 만지시면서 띄워 주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20장 34절에도 보면 소경들의 눈을 만지시며 그들의
눈을 띄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좀 다릅니다.  땅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리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이제 소경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눈에 이겨진 진흙을 바른 채로 실로암
못으로 갑니다.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8절 마지막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다 소경을 보셨는데 성전에서
실로암 못까지는 약 4 km가 된다고 합니다.  4 km라는 거리는 도보로 가면 건강한 사람에게도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더듬어서 실로암 못까지를 가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갈까요.  가다가 언덕을 넘기도 하고 개울을
건너기도 하고 논 둑을 따라 걷기도 했을까요?  실로암 못을 찾아 걷고 있는 소경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7절
후반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만 뜬 것이
아닙니다.  소경은 25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 이니이다”

소경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희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 김영만 선교사는 UBF 자비량 선교사로 현재 까렐대학 개혁신학부 학생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사랑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15일)
  • 요일 4:12-16
  • 설교자: 다빗 유레흐

2003년 6월 15일 (삼위일체주일, 다빗 유레흐 전도사)
본문: 요한일서 4장 12-16절
제목: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사랑
통역: 남유정 교우

<본문>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4:12~16)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번은 어떤 사람이 마르틴 루터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마르틴 루터가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때려주시기 위해 시냇가에 앉아서 버드나무 가지를 깎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주의 깊게 보셨다면 그 말씀 안에는 다른것도 있지만  성부, 성자, 성령에대해 말하고 있음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말씀이 읽혀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오늘은 바로 삼위일체 주일 입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유대교, 이슬람교등 다른 일신교들과의 대화에서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늘 끊이지 않는 질문에 속합니다.
삼위일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것이 정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계속적으로 질문하게 합니다.
인간은 이 질문을 알아맞혀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안에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3위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3위로 나타나시는 유일한 하나님
한분의 하나님.
하나뿐인 신성
그리고 그 유일한 신성은 3위 속에 함께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3위는 우리의 이성을 반대하지 않는다 해도 그 이성을  초월하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본질과 3위라는 말은 논리적입니다.
하나의 하나님이 3명의 신이라든가 하나의 형상이 3개의 형상이라는 말은 비논리적일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비밀은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분이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비밀을 사실상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또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3위 일체 질문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알기를 원한다는 것은 결국 치명적인 어리석음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앞에 자신의 무지와 놀라움을 겸손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인 루터의 대답으로 다시 다가갑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가 어떻게 작용하는 지 추측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의미를 묻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아들로 그리고 성령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공동체가 하나님의 현존에 속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 공동체와 인간관계도 특별한 의미를 회복하게 됩니다.
공동체가 신의 존재에 속하는 것이라면, 공동체는 또한 사람의 존재에도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없이 따로 떨어져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이웃들과 함께 공동체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는 말씀은 조금 전에 우리가 했던 말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만큼만 우리는 그 분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한계적인 인간의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지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그 분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그 목표를 달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할 수 있게 만드는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에게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로, 죄악되고 한계적인 사람과 완전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어주는 다리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할 수 있으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사랑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하는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을 들어보십시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 일서 4:9,1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리
우리가 이 계명을 주꼐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 지니라( 요한 일서 4:19~21)

이 말씀이 오늘 서신에 써 있습니다.
형제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그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떄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에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노여움과 냉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사랑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이겨내셨습니다. 
사랑은 우리 사람들 사이의 부정과 미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보다 강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사랑보다 강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 절 부터 39절까지 말씀 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쨰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 입니다.  (아멘)

<기도>
우리의 왕되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늘 당신의 말씀에서 아버지로, 아들로, 성령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립니다.
모든 것의 근원 되시는 주님으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물로 성령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리의 구원을 위해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을 믿는 믿음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더욱 풍성해지도록,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거룩하게 하시옵소서.
기뻐 찬양받으실 성 삼위 하나님, 하나님의 주권적인 축복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거룩한 능력의 주님으로 찬양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