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29일)
  • 출 20:1-11
  • 설교자: 이종실

030629 (삼위일체 둘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0장 1-11절
제목: 십계명,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

<본문>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설교>
체코개혁교회는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 이 세가지를 끊임없이 그 시대에 따라 해석을 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전통이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함께 읽은 본문은 출애굽기의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이란 말에서 저와 여러분들은 대체로 엄격히 지켜야 할 율법, 율법을 엄수하려는 바리새인,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신 예수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는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여기에는 저와 여러분들이 십계명에 대한 오해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우리 인간이 지키지도 못할 것을 부담스럽게 안겨준 하나님의 명령으로 우리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킬 수 도 없는 명령을 주신 이유는 우리 인간 모두가 죄인임을 깨우쳐 주기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구약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있다고 가르치고 그리고 배우고있습니다.

십계명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8절에 십계라는 말이 나옵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여기서 십계는 언약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십계를 지켜야될 법, 엄수해야될 명령 이라고 하지 않고 언약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언약의 말씀을 계약의 조문으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서로 약속을 하여 맺어진 계약입니다
다시말씀드려 십계명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명령하거나 맹세한 것이 아니라 두 편이 서로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의 앞날을 책임질 것과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기로 쌍방간에 약정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알고있는 십계명의 첫째계명이 3절에 나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첫째계명은 2절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것은 십계명의 서론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첫째계명으로 생각하는 십계명의 서론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명을 주면서 서론으로 만약에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켜 행하면 나는 너희를 구원할 것이며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이 자신의 계명보다 앞서고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
하나님의 은혜가 계명보다 앞섭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따라 살아야 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베풀어 주신 말할 수 없이 크신 그 은혜에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내편이 되신 하나님,
홍해를 갈라 안전하게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하나님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더위를 잊게 하시는 하나님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와 어둠을 물리쳐주시는 하나님
방향 모르는 사막에서 구름과 불기둥으로 길을 안내해 주시는 하나님
목이 마를 때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는 하나님
굶주릴때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하나님
노예의 삶에서 자유의 삶으로 이끌어주신 하나님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려는 응답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그 대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십계명의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대사관의 공무원들은 공무원들로서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애국애족의 열정을 품어야 되는 공직자의 윤리가 있습니다.
그 윤리가 공무원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군인들은 군인으로서의 절도와 명예를 드러내는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사업가들은 상업상의 윤리가 삶의 스타일입니다.
학생은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의 윤리와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목사는 성직자의 윤리와 그에 걸 맞는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 신자들은 신자들의 신앙윤리와 삶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은 술과 담배 안하고 세상 노래와 춤 추지않고 말소리나 행동거지로 경건의 겉 모습을 잔뜩 꾸미는 것으로 많은 분들이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삶의 스타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노력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한번은 서기관이 예수께 질문 하였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마가복음 12:29-31절에 나옵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은 분명히 십계명의 전반부와 후반부와 관련되어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함께 읽은 십계명의 전반부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십계명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까?
성경의 오늘의 말씀에 명백한 것은 그것은 단지 감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전반부는 우리가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3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올바르게 섬기며 하나님이 아닌 것을 신성시하거나 절대화하지않고 그것을 하나님 곁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 이래로 숭배의 대상을 신성화 하고 절대화하였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인간이 하늘과 자연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떤 시기에는 민족을, 어떤 시기에는 국가를, 어떤 시기에는 군사력을, 어떤 시기에는 경제력을, 어떤 시기에는 이데올로기를, 어떤
시기에는 인간의 이성을, 어떤 시기에는 예술과 문화를 어떤 시기에는 과학기술을 인간은 신성시하고 절대시하였습니다.
결국 인간이 신성시 하고 절대시 하는 것들이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시작한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명령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선언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악의 세력에 빼앗기기를 원치 않는다는 강력한 선포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권능과 그 손에 넘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 아닌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것입니다.

4절에 두번째 계명으로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두번째 방법은 우상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번째 계명을 들으시면서, 나는 우상을 만들지 않으니 이 계명을 나는 지키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4절과 5절의 본문을 찬찬히 읽어보시면, 우상이란 숭배의 대상이 되는 형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고대에 신의 형상은 신의 거주지를 의미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과 소유와 권력 아래에 신을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신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 원죄이고 에덴동산의 타락이며 하나님 창조의 파괴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상상력에 따라서 표현한 하나님의 형상 앞에 절할 때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지않습니다.
사실 신 없는 것에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소유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않습니다.
1994년 프라하 한인교회에 목회할 때 한 분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감사헌금을 드리면서 그 봉투에 “하나님, 이제부터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하나님을 나의 심부름꾼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적었습니다.

우리가 신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소유로 삼는 특권이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5절에 이 것이 매우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다른 신에 넘겨주길 원치 않습니다.
만약에 자신의 백성이 완전히 당신의 것이 되지않으면 우리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세번째 방법이 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술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예는 고대사회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려는 근본적 갈망이 있습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자신의 힘을 원한 어떤 방법으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일컬어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에서 하나님이 우리들과 어떤 관계를 원하시는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개인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나와 너의 개인적인 관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나와 너의 관계성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나와 그것의 관계로 이해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서의 마지막 네번째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8절)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십니다..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라고 말씀입니다.
우리는 칠일중의 하루를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만약에 칠일의 하루도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면 우리들의 생애에 우리가 진정으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언제 고백할 수 있습니까?
밥을 먹지않고 보약으로 우리의 건강을 지켜갈 수 없습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인생의 시작과 끝과 그 길을 깨닫고 우리에게 참된 삶을 불러일으키는 날입니다.
밥이 몸을 건강하게 하고 질병을 이기게 하는 것으로 의식을 하며 밥을 먹을 때 감격해 하면서 밥을 먹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가 되니까, 배가 고프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어야 되는 줄 알고 먹습니다.
어떤 때는 밥이 맛있고 어떤 때는 돌을 씹듯 맛이 없고 그렇지만 하루 식사는 거르지 않습니다.
생각 없이 의무적으로 떠넣는 밥숟가락 때문에 우리들의 육식이 힘을 얻고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몸이 아프거나 쇠약해지면 의사를 찾고 약을 찾고 보약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루세끼 밥을 규칙적으로 먹고 운동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 방법입니다.

안식일이 하루 밥 세끼 먹는 일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것 하면 영적으로 건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이것 못하면 영적으로 약해져서 온갖 시험이 병균처럼 득실거리게됩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지 않으려는 신자의 응답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의 안식은 국어사전에 “편히 쉼”으로 설명되어있습니다.
영어로 Sabbath 라고 합니다.
이 sabbath 라는 단어의 어원은 stop 이라고 합니다.
움직이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일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쉬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멈출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들 앞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쉴 수 있습니다.

<짚차와 짐을 머리에인 어떤 할머니>.

우리가 쉬며 거룩하게 하나님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할 때에 쉬지않고 일하는 것은 차를 타고도 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할머니와 같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저희들은 십계명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계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설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해야하는데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된 나머지 계명을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이 시간 한번 우리들이 신자로서 어떤 삶의 스타일을 갖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나를 구원하시고 지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나 여호와는 너의 하나님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일방통행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이 시간 눈을 감고 침묵하면서
나는 지금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고 있는지 자신을 바라봅시다.

나는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가?
나는 하나님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의 것인가?
나는 하나님을 너와 나의 개인적인 관계성 안에서 이해하는 가?
나는 하루를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키는가?

<기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22일)
  • 요 9:1-7
  • 설교자: 김영만

030622
제목: 하나님의 하시는 일
본문: 요한복음9: 1-7 요절/ 요한복음9: 3 

<요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설교>
오늘 말씀에는 소경이 나옵니다.  또 이 소경을 놓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야기하면서 나눴던 소경에 대한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러면 과연 소경은 어떤 사람일까를 한 번 생각해 볼 것입니다.  또 그 소경을 놓고 제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했으며 예수님은 그 소경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볼 것입니다.  끝으로 결국 소경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살펴보기
원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세상에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 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
웃을 때도 있었지만 슬퍼 울 때도 있었습니다.  사랑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외로움이 밀려 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기뻤던 일은 잠시 같은데 슬펐던 일은 이에 비해 많은 것 같고 기뻤던 일 보다 슬펐던 일 들이 더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남이 나를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능력 없음을 지적 받기도 했습니다.  경쟁에서 밀려 보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치여 보기도 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실수도 하였습니다.  외국 삶 속에서 정처가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 중에 한 사람 오늘 본문에는 소경이 나옵니다.  그러면 소경은 누구입니까?  그는 물론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더구나 그는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봐 본 적이 없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으면
어떠할까요?  캄캄할까요?  답답할까요?  불편할까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요?  그는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는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들을 봐 본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소경은 보지 못하는 자이고 두 번째 소경은 슬픔의
사람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을 길 가실 때에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경
앞에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제자들이 이 소경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여기서 우리는 이
소경과 이 소경을 두고 질문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입니다.  더구나 8절에
보면 이 사람은 길거리에서 얻어먹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놓고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게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소경이요 거지 되게 했습니까?  부모입니까? 자신입니까?  아니면 그의 인생에 관여했던 어떤
스승이나 지도자입니까?  세상 때문입니까? 
최소한 소경 자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경이 되리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소경이 되는데 무슨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책임질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는 지금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행 중에
태어나서 앞으로도 불행하게 소경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어떤 것들은 나에게 주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내가 선택해야 될 것들도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나
자신 중에 나의 외모일 수도 있고 내적인 성격 등 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생기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생기고 나의 자아
중에 깊은 부분 그런 부분을 내가 어떻게 하고자 해서 그런 내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것입니다.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부모님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 때문에 부모님들이 속 상할 때가 많지만 부모님들
때문에 자녀들이 상처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가난한 가정에 태어납니다.  또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깨어진
가정도 있습니다.  또 주어진 것 중에는 생명도 주어진 것이 될 수도 있고 건강도 주어진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어진 것들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불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생겼을까?  왜 나는 남들처럼 능력이 없을까?  왜 나는 하필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  왜 우리 아버지는 허구 헌 날 술만 마시고 왜 우리 부모님은 매일 같이 싸우기만 하실까?  나는 왜
이런 남편 이런 아내를 만났을까?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행복하지 않다면 누구 때문일까? 내 죄 때문일까 부모님이
죄가 많아서 그럴까?  이렇게 생각되실 때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소경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선택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선택 중에 하나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일 겁니다.  직장도 본인이 선택을 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체코라는 나라에 와서 사시는 분들인데 이것도 하나의 선택이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많은 선택 중에 혹시 본문의
소경처럼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해 보지도 못하고 선택한 경우는 없습니까?  그 선택이 그렇게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 그래서 우리에게 그 선택이 아픔이 될 때 우리는 또다시 본문의 소경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러면 이 소경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제자들이 왜 이렇게 질문했을까요?  다르게 말 할 수는 없었을까요?  예를
들어 제자들은 이렇게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저 소경이 너무 불쌍합니다.  주님께서 고쳐주소서”  왜냐하면 제자들은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을 직접 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자들은 38년 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소경이 나음을 입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소경이 저렇게 된
게 뉘 죄로 인함인지 물었습니다.  “참 소경이 불쌍은 하다 그런데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저렇게 되었을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생각하기를 잘 합니다.  주위의 어떤 누가 좀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그것 봐라 그러면 그렇지 내가 뭐랬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별로 은혜를 못 받다가 주위의 어떤 사람들이 좀 힘들어 지면 그 때 은혜 받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고난이 무엇을 잘 못 해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생각에는
인과응보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인과응보적인 요소 하면 생각 나는게 욥이 고난 당하고 있을 때 욥의 세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이 죄로 인한 환란과 곤고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꼭 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것이 다 죄 때문이라면 구약의 요셉의 삶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까?  욥기에 욥의 삶은
어떻게 설명이 되고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삶은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둘째로 제자들의 생각 속에는 “할 수 없지 뭐 저렇게 된
거” 라는 체념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거라면 모를까 소경인데 그것도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거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저 사람에게 무슨 변화가 온다 든 가 저 사람이 어떻게 뭐 치료가 된다 든 가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깔려 있을 수 있습니다.  체념입니다.  저 사람 문제만큼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문제가 중하기 때문에 그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해결의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우리 주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소경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진 것이 아니라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한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납니다.  누가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까?  능력이 많으면 모를까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 받고 있는 사람이면
모를까 아픔이 많다면 가장 많은 사람을 통해 비천하다면 가장 비천한 자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보실 때 제자들처럼 인과응보적인 생각에 기초해서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소경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해서
할 수 없다고 생각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자 가장 상처가 많은 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자 소경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날 것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서 1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패하시고
이새의 아들 중에 사울의 뒤를 이을 사람을 예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새에게는 아들이 여덟이 있었습니다.  이새는 사무엘이
함께 하나님께 제사 드리자는 소리를 듣고 그의 아들들을 한 곳에 불러모았습니다.  사무엘이 모여있는 이새의 아들들에게 들어가 보니
엘리압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압은 용모와 신장이 준수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속으로 생각하여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압을 주목하여 보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들들인 아비나답,
삼마도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덟 중 일곱이 다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이
모두를 주목하여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 이상한 것은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은 정작 그곳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없었을까요?  아마 이새가 다윗을 부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에 다윗 쯤 없어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위로 일곱이나 있는데 용모와 신장이 준수한 엘리압도 있는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작
다윗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으로는 별로 귀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소경 한 사람을 지켜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의 삶에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소경의 삶을 주관하시고 소경의 삶을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소경의
모든 고난에 함께 하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서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소경의 그 동안의 모든
아픔은 소경의 그 동안의 모든 설움은 그의 모든 눈물은 그의 모든 상처는 이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속에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
속에 봄볕에 눈 녹듯이 녹아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경의 삶을 붙들고 계십니다.  크신 계획 속에 높은 경륜 속에 그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있으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는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고난이 무가치한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는 가치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목적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는 목적이 있습니다.  내게는
대책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대책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높은 경륜속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모든 아픔이 우리의 모든 상처가 치료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의미 없이 느껴지던 것에 의미가 부여되며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이래서 이랬구나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기대 할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경륜을 붙들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6절 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29절에서 두 소경의
눈을 띄워 주시는데 그들의 눈을 만지시면서 띄워 주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20장 34절에도 보면 소경들의 눈을 만지시며 그들의
눈을 띄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좀 다릅니다.  땅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리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이제 소경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눈에 이겨진 진흙을 바른 채로 실로암
못으로 갑니다.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8절 마지막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다 소경을 보셨는데 성전에서
실로암 못까지는 약 4 km가 된다고 합니다.  4 km라는 거리는 도보로 가면 건강한 사람에게도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더듬어서 실로암 못까지를 가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갈까요.  가다가 언덕을 넘기도 하고 개울을
건너기도 하고 논 둑을 따라 걷기도 했을까요?  실로암 못을 찾아 걷고 있는 소경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7절
후반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만 뜬 것이
아닙니다.  소경은 25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 이니이다”

소경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희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 김영만 선교사는 UBF 자비량 선교사로 현재 까렐대학 개혁신학부 학생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사랑

  • 한인 예배 (2003년 06월 15일)
  • 요일 4:12-16
  • 설교자: 다빗 유레흐

2003년 6월 15일 (삼위일체주일, 다빗 유레흐 전도사)
본문: 요한일서 4장 12-16절
제목: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사랑
통역: 남유정 교우

<본문>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4:12~16)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번은 어떤 사람이 마르틴 루터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마르틴 루터가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때려주시기 위해 시냇가에 앉아서 버드나무 가지를 깎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주의 깊게 보셨다면 그 말씀 안에는 다른것도 있지만  성부, 성자, 성령에대해 말하고 있음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말씀이 읽혀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오늘은 바로 삼위일체 주일 입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유대교, 이슬람교등 다른 일신교들과의 대화에서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늘 끊이지 않는 질문에 속합니다.
삼위일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것이 정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계속적으로 질문하게 합니다.
인간은 이 질문을 알아맞혀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안에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3위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3위로 나타나시는 유일한 하나님
한분의 하나님.
하나뿐인 신성
그리고 그 유일한 신성은 3위 속에 함께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3위는 우리의 이성을 반대하지 않는다 해도 그 이성을  초월하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본질과 3위라는 말은 논리적입니다.
하나의 하나님이 3명의 신이라든가 하나의 형상이 3개의 형상이라는 말은 비논리적일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비밀은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분이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비밀을 사실상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또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3위 일체 질문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알기를 원한다는 것은 결국 치명적인 어리석음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앞에 자신의 무지와 놀라움을 겸손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인 루터의 대답으로 다시 다가갑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가 어떻게 작용하는 지 추측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의미를 묻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아들로 그리고 성령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공동체가 하나님의 현존에 속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 공동체와 인간관계도 특별한 의미를 회복하게 됩니다.
공동체가 신의 존재에 속하는 것이라면, 공동체는 또한 사람의 존재에도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없이 따로 떨어져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이웃들과 함께 공동체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는 말씀은 조금 전에 우리가 했던 말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만큼만 우리는 그 분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한계적인 인간의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지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그 분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그 목표를 달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할 수 있게 만드는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에게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로, 죄악되고 한계적인 사람과 완전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어주는 다리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할 수 있으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사랑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하는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을 들어보십시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 일서 4:9,1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리
우리가 이 계명을 주꼐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 지니라( 요한 일서 4:19~21)

이 말씀이 오늘 서신에 써 있습니다.
형제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그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떄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에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노여움과 냉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사랑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이겨내셨습니다. 
사랑은 우리 사람들 사이의 부정과 미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보다 강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사랑보다 강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 절 부터 39절까지 말씀 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쨰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 입니다.  (아멘)

<기도>
우리의 왕되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늘 당신의 말씀에서 아버지로, 아들로, 성령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립니다.
모든 것의 근원 되시는 주님으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물로 성령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리의 구원을 위해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을 믿는 믿음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더욱 풍성해지도록,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거룩하게 하시옵소서.
기뻐 찬양받으실 성 삼위 하나님, 하나님의 주권적인 축복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거룩한 능력의 주님으로 찬양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체코공화국의 기독교 종교인구

체코공화국의 기독교 종교인구
(2001년 인구조사)

체코 인구 10,230,060명 가운데 종교인구는 3,288,088명 (32,1%)이며, 비 종교인구는 6,039,991 명(59%) 이며 무응답자는 901,981 명(8,8%)이다. 32,1%의 종교인구는 아래와 같이 정부에 등록된 교회와 종교단체에 분포된다.

A. 기독교
I. 카톨릭 교회 (cca 27%): 로마 카톨릭 26,8% (2.740.780명), 그리스 카톨릭 (7 675) 그리고 구카톨릭 교회(1 605).
II. 개신교회 (cca 1,5%): 체코형제개혁교회 1,1% (117 212), 칼빈개혁교회0,1% (14 885), 슬레스까 칼빈개혁교회 0,1% (14 020) 그리고 루터개혁교회 (5 412).
III. 체코슬로벤스까 후스교회 1.0%(99 103).
IV. 오순절 계열 및 기타 개신 교회 (cca 0,3%): 형제교회 0,1% (9 931), 기독교 공동체 (6 927), 사도교회 (4 565), 침례교회 (3 622), 형제단 (3 426), 감리교회 (2 694) , 신사도교회 (449).
V. 여호와의 증인 0,2% (23 162).
VI. 동방정교회 0,2% (22 968).
VII. 제7일 안식일교회 0,1% (9 757).
VIII. 일신교(유니테리언 교도) (302).
IX. 몰몬교 (1 366).

B. 유대인 (cca 0,01%): 유대인 회당 (1 515).

C. 기타 1,9% (196 712).
정부에 등록된 교회나 종교단체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오순절 계열, 기타 세계종교 즉 이슬람, 불교 또는흰두교이며 체코에서 활동중인 이단종파이다.

비종교인구가 60%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자료는 체코가 전통적으로 기독교 국가임을 보여주고있다. 기타 다른 종교인구가 절대적으로 적기때문이다.

체코의 기독교역사는 8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현재 1200년이 넘었다. 세계 기독교역사에 14세기에 시작하여 얀 후스 선생의 시대에 그리고 후에 형제단의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오늘날 교회의 약화의 원인을 카톨릭 교회에 의해 주도된 반 종교개혁의 시대(17세기) 그리고 공산독재의 시대(1948-1989)에서 찾을 수 있다. 교인숫자가 줄어들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언으로서 세상에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전 유럽의 기독교의 위기의 시대에 1989년 이후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다. 오늘의 상황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즉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대다수의 일반사회에게 이상하게 비춰진다. 하나님을 믿는 것 교회당에 다니는 것은 현대적이지 않다고 오늘시대는 말한다. 일반사회는 카톨릭교회의 정치적 발언과 재산환원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반면 카톨릭 개신교 교회들의 사회봉사단체들의 활동(양로원, 무숙자, 환자, 미혼모 등등)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고있다.

다빗 유레흐
* 나눔터 플러스 창간호 기고글

그리스도안에서 함께하는 우리들

그리스도안에서 함께하는 우리들

모든것은 신학적인 대화로 시작하였다. 신학은 풍부한 유대경전과 기독교 성경의 전통에 서 있기 때문에, 신학적인 대화는 전통으로부터 비롯되어야만 한다. 2천년간의 교회의 대화와 논쟁의 모든 전통들과 그리고 종교개혁의 전통을 덧붙이면 우리는 현재의 문제들과 희망, 과제들을 얻게 된다.

처음에 나는 구체적인 일들을 이슈니 미에스또(프라하 4지역)에서 시작하려고 생각했었는데, 교회구조가 이 작업을 뒷받침 해줄 수 없었다. 꼬빌리시에서 우리는 근 30여년간의 외국교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종실 목사가 „왜 꼬빌리시에서는 안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내 생각을 전환시켜 주셨을때 나는 이미 모든 해답을 얻었다.

에큐메니칼 경험은 우리가 단순히 교회당을 예배를 위해 다른 교회에 세를 주는 형식의 그런 방식의 협력을 따르지 않도록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교회기관의 헌법에 기대지 않고 에큐메니칼 예배를 시작하겠노라고 분명히 이야기 했다. 그래서 성만찬을 함께 하였다. 이 성만찬 예식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들이 하나되게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 우리 체코-한국의 관계를 가장 높으신 분 앞에서 평등하게 하는 것이지 어떤 흥미로운 활동을 통해 유발시키는 그런 동정이나 관심이 아니다. 분명 체코 – 한국 두공동체간의 언어차이는 함께하는 공동의 성찬예배에서 극복되고, 그리고 우리의 공동의 목표를 보여준다.

당시 나는 야고보의 말씀과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된다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성서에 셀 수 없이 많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가 나온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체코인과 한국인들의 협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성서의 약속의 말씀과 구체적인 교회들의 국제적인 경험의 바탕과 예배 예전의 갱신의 노력의 과정에서 우리 체코-한국 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여정이 모색되었다. 이 여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안에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위에서 성취되는 그 동안 이 여정은 옳았으며 안전한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고, 교회당 사용을 한국인 교회라는 하나의 별도의 교회에게 세를 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다양한 민족과 언어와 인종이 함께 섬겨가는 하나의 교회를 만들었다. 요한 계시록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희생양을 찬송한다.(계 5,9-14) 찬송과 존귀를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이 협력은 동시에 몇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 이외에 체코 한국 공동체로부터 인새심있고 중요한 교회의 사회봉사가 발전되고 있다. 성만찬에 고통 받는이 들과 아픈이들이 참여하지못한다. 댜블리쩨의 우리교회의 디아코니아의 봉사와 보흐니쩨 정신 병원에서 그리고 역시 보흐니쩨의 슈뜨라스부르크 호스피체에서의 목회 차원의 우리들의 사역의 의미있는 봉사는 프라하 꼬빌리시의 야곱의 사다리 교회에서 함께 하는 체코 한국의 실존에서 분리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독창적인 방법으로 우리 기독교 공동체가 사회를 섬겨가는 일을 깨우쳐주고있다. 이런 섬김은 말로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침묵의 실천의 연대를 이해하는 우리들이 세속화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증언이다.

두번째로 중요한 부분은 양 문화의 접촉이다. 한국인들은 교회당에서 뿐 아니라 정신병원에서 호스피체에서 아름다운 찬송을 부른다. 우리들은 한인학교의 설립을 도왔다. 새롭게 형성된 체코 – 한국공동체를 통해 그리고 나눔터와 같은 이러한 잡지를 통해서 민족들의 평화로운 만남의 이러한 선물을 깊게하고 확장하게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문화의 영역에서 전통의 교환, 두 국가간의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 요리법의 교환 그리고 다른 형태의 공동의 커뮤니케이션은 서로를 잘 알게 해 줄 뿐만이 아니라 풍요롭게 해주고 기쁘게 해줄것이다. 이러한 기쁨은 여호와의 약속의 성취이다. 기독교인이 아닌사람도 이세상에서 민족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야 하며 약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함께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함을 알것이다.

한국인들은 우리나라에서 자신들의 삶을 위한 공간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함께 공유하는 다른공간이 있다. 한국인들의 헌신 덕분에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초청을 알리는 종탑을 세울 수있었다. 종은 잘 움직이고 있고 이 지역 주민들에게 새로운 리듬을 주고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우리 교회당 장소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민족들이 확장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앞에 몇가지 일이 남아있고 두 공동체가 한곳에서 모일 공간을 필요로 하고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종실 목사의 사역을 매우 존경한다. 이목사는 한인 공동체를 인자하고 목적성있게 아주 다방면으로 목양하고 있으며, 우리들이 문화적인 장애로 어려움을 겪을 때 체코의 전통도 한국공동체에 알리는 일도 한다. 열린마음으로 체코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있으며 우리의 종교개혁의 과거와 현재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고 동시에 우리들에게 한국의 전통과 가까워지게 한다. 우리는 이 길을 함께 걸어가길 희망한다. 우리들에게 어떻게 예배예전을 발전시켜 사회를 위해 새로운 활동을 할것인지 등의 많은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잡지 발간이 결실이 있고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 다른 언어들 그리고 인종들을 향해 열려지는 것을 도울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지 슈토렉

* 나눔터 플러스 창간호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