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3년 03월 16일)
- 출 2:1-10
- 설교자: 이종실
030316 사순절 둘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1-10
제목: 하나님의 계획
<본문>
1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3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7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설교>
단지 여행객이 아니라 삶의 근거를 찾으러 체코로 온 것은 누구나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부터 체코라는 나라를 생각하고 오신 분들은 그리 많지않았습니다.
나름대로 동기와 계기가 있어 기대하지 않게 체코로 오신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체코로 오게된것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섭리이다. 나름대로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일년 이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에 치이고 생존경쟁과 타문화 환경에 시달리면서 시기와 질투와 오해와 자기과시와 불만과 짜증스러움이 점점 많아지는 속 좁은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날에는, 도무지 자기보호의 성에 갇히고 그리고 이기적인 조그마한 자신의 동굴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삶이 정말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매일 살기에 급급하여 하나님에게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이 정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관련성이 있는가?
만약 관련성이 있다면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오늘 저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탄생이야기를 통해 그 대답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모세의 탄생이야기 안에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에서 나타났던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탄생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라기 보다 인간세상의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냥 일어난 일로서 나타난 것 처럼 그렇게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모세의 탄생의 불과 몇 달밖에 되지않은 짧은 기간의 사건을 그 당시 그 시대의 순간으로 보면 불행과 행복을 교차하는 한
사람의 탄생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긴 역사의 여정에서 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욱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눈에는 한 인간의 불행과 행복이 교차하는 피 말리는 긴장이 감도는 순간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손길은 이미 모세탄생 이전부터 있었음을 이야기 전체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권속들이 애굽으로 이민을 와서 4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갔을 때였습니다.
야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창대해지자 그들의 인구 숫자를 억제하기위해 잔인한 학대는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부여하여 그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였습니다.
가공할 이와 같은 위협은 점점 더 두꺼워지는 먹구름처럼 밀려왔고 마침내 바로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 여든 살리라.” 명령하였습니다.
남자유아를 살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씨를 말려 민족의 미래를 없애버리려는 바로의 계획이었습니다.
민족주의와 외국인 증오로 자국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상 권력자들의 이와 같은 천인공노할 계획은 역사 이래로 지속되었습니다.
민족을 포로로 만들었던 바빌론의 시대가 그랬고 진정한 세상의 구원자요 왕이신 예수를 제거하기위한 헤롯의 유아학살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흑인을 노예로 삼고, 유태인을 학살하고, 인종을 청소하는 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표현을 담아낼 수 없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가 가득찬 시기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안하고 좋은 시대에 살기를 원합니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좋은 시대에 태어나길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태어나는 시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시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태어난 때를 때론 저주하고 때론 저항을 하고 때론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 안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라는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던 시대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힘들고 어두웠을 때였습니다.
슬픔과 탄식으로 가득찬 가장 암울한 시대를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으로 삼으시고 그때 미래의 희망,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
저와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습니까?
미래의 희망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시간이심을 믿으십시다.
나를 둘러싼 고난의 시간이 있습니까?
그것이 나를 둘러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징표임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특별한 곳이 아닌 한 작은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1-2절)은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이가 죽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석 달 동안 자신의 아이를 숨겨서 키웠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신앙의 후배들은 그것을 자녀에 대한 일반적인 부모의 본성으로 보지 않고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11:23)
이스라엘 신앙의 후배들은 모세의 부모의 행동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왕을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 해야 할 분을 두려워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 히브리 산파가 나옵니다.
하나는 십브라이고 다른 한사람은 부아입니다.
출애굽기 1장 17절에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그들은 진정한 통치자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지 바로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에 왕의 명령보다 생명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모세의 부모의 결정과 행동들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행위가 믿음에서 출발하였다고 주장하더라도 애굽 바로의 막대한 권력 앞에 노예에 불과한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권력을 전복시킬 힘도 없고 그렇다고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를 숨겼습니다.
아이를 숨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방책이었습니다.
석 달 후에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대책을 믿음이냐 인간의 본능이냐 분석하는 것은 관념적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모세도 없습니다!
석 달!
아이를 더 감출 수 없는 시간이 임박할수록 초조하게 이들의 머리 속에는 온통 1분 1초 아니 순간일지라도 아이의 보호를 더 연장할 방도를 찾느라 혼란스러웠습니다.
갈대상자를 바르고 역청과 송진을 발라 물이 스며들지않도록 하여 아이를 포대기로 잘 싸서 그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일강 강가로 가서 갈대 숲 사이에 상자를 두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넣어 나일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 어디에서 살던지 살아있기 만을 바라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아이를 흐르는 강물에 홀로 두고 떠나는 이들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않아 자꾸 뒤돌아봅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이를 지켜주시리라는 막연한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결정들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그들의 희망과 간구가 그들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믿음으로 모세를 낳았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장)
그 상황이 어떻게 발전합니까?
발걸음을 차마 돌리지 못하던 아기의 누이는 동생을 실은 갈대상자가 혹시 뒤집어지지는 않는지 아니면 물에 빠지지않는지 아니면 잘 떠내려 가는지 멀리서서 바라보고있었습니다.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딸아이를 부모들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강으로 오던 시간과 그들이 아이를 버린시간이 완전히 일치하였습니다.
유아살해의 명령을 내렸던 사람의 딸, 그 바로의 친딸이 왔습니다.
그 다음, 아직도 떠내려가지 못하고 빙글 빙글 제 자리를 돌며 갈대 숲에 놓여있던 바구니는 쉽게 공주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경우 수 가운데 최악의 경우였습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경우가 바로 이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원망과 한탄과 분노를 겪는 상황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억울하고 분을 삭일 수 없는 일들을 겪고 참다가 그 보다 더 한 일이 덮치면 그만 원망과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러나 비록 원망과 한탄과 분노를 하지만 그것에 넘어지지는 마십시다.
하나님은 가장 나쁜 상황을 자신의 목적으로 바꾸고 계심을 기억하십시다.
공주는 종들에게 바구니를 열어보게 하였습니다.
그 속에는 생후 3개월쯤 되어보이는 갓난아기가 울고있었습니다.
공주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불쌍히 여겨 말하기를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공주가 아이를 해칠 생각이 없는 것을 멀리서 본 아이의 누이가 지체하지 않고 공주에게 다가가 제안하였습니다.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먹이게 하리이까?”
공주는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누이가 데리고 온 사람은 아이의 친 어머니였습니다.
공주는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하였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에 대한 모세의 어머니의 반응에 대해 어떤 기록도 하지않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녀가 기뻐하고 있다면 불행이 행운으로 바뀐 들뜬 기쁨이 아니라 바로의 통치너머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기쁨과 전율일 것입니다.
바로의 딸은 “내 대신 아기에 젖을 먹이라.” 말하였습니다.
지금 모세의 친 어머니는 애굽 왕가의 자식을 양육하도록 부탁받고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의 삶이 상호 연관을 갖는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해야 됩니다.
지금 모세의 친어머니가 안고 있는 그 아이가 여러분의 아이라면, 여러분들은 그 아이를 어떻게 키우시겠습니까?
죽을 수 밖에 없는 노예의 자식에서 애굽 왕가의 자식으로 한 순간에 그 신분이 하늘과 땅만큼 뒤바뀐 그 자녀를 가슴에 안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이겠습니까?
애굽은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정치 경제 군사력으로 세계에 영향을 주는 미국과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영향을 주는 나라의 주류사회에서도 핵심주류의 사람으로 잘 키워 보겠다는 생각입니까?
아니면, 억압받고 고통을 겪고있는 노예들의 희망인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시겠다는 생각입니까?
그러나 그녀는 애굽의 왕가의 자녀로서 그 아이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노예의 신분인 히브리인으로 그를 키웠습니다.
모세는 후에 애굽의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1절을 읽어보시면 당시 그는 히브리인들을 자신의 동포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히브리인으로 살았습니다
히
브리기자는 모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자녀들의 교육과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다 생략하고 오늘 설교의 초점으로 바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만약 모세의 어머니가 단지 자신의 행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교회를 봉사로 섬기고 감사헌금과 십일조의 예물로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물론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드리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지 행복해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만 하고 그 사건이 자신의 책임과는 어떻게 관련을 갖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아마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관련해서 어떤 의식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믿음에 의한 인간의 책임이 일치되는 길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건에 대한 믿음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전에 그것을 스스로 발견하기 위해 믿음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의 특성을 오늘 본문은 감추어진 그림으로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의 딸, 바로의 공주가 물에서 건져낸 아이를 보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가족들은 원수에 대한 마음의 분노를 폭발하지않고 오히려 공주가 아이를 해하려 하지않는 불쌍한 마음, 선한 마음을 원수의 딸에게서 발견하였습니다.
만
약 이들이 “안돼! 우리를 이토록 못살게 구는 원수 애굽에게 동생을 넘기느니 차라리 우리들의 손으로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이
나아.” 이렇게 생각하였다면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원수일지라도 그로부터 선한 것을 발견하는 마음 그것이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의 책임 또한 눈뜨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의 책임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 우리들은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힘, 마음의 눈을 스스로 키워가야 함을 오늘 성경은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모세의 이름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성경을 읽는 저희들은 압니다.
바로의 딸이 모세를 물에서 건져낸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건져내신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히브리인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서
불행의 자리에서
죄악의 자리에서
멸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서 구원 받은 자의 충만한 기쁨과 희망과 전율의 체험이 사순절 둘째주일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들의 체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