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운영위원회

일시: 3월 10일 저녁8시 김만석 집사댁
참석자: 김만석 권영봉 이종실 홍성헌 (총무-공석, 위임-서기 선교부장 봉사부장)

결의사항

1) 탁구대 구입을 빠른시간 안에 하여 가지급 정리를 하기로 하다.

2) 3월 26일 한국연극(신호 성도 연출) 체코 교우와 한인교우를 초청하여 관람지원키로

3) 운영위원회 회의제도를 폐지하고 총무 충원없이 매월 마지막 주일예배 후 전체교인회의(만18세이상 교우)로 한다. 회의 결의는 출석인원의 과반수로 한다.

4) 교회 승용차 책임보험과 교역자(이종실 목사)의 의료보험을 교회가 지급키로

일시체류자 모세

  • 한인 예배 (2003년 03월 30일)
  • 출 2:11-25
  • 설교자: 이종실

030330 (사순절 넷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11-25
제목: 일시체류자 모세

<본문>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설교>
고난의 시대에 모세는 태어났고 우여곡절 끝에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였습니다.
장래가 보장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모세의 생애에 예기치 않는 사건으로 다시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반역자가 되어 자신의 부귀와 영화와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의 인생여정을 우리들은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외국 땅 미디안에서 모세의 생애는 이렇게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를 우리들과 같은 하나의 기독교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오늘 본문의 그의 생애를 읽어보면 우리들과 비슷한 처지를 모세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모세를 해외생활을 하게하였고 그리고 그는 먼 훗날 그의 가족이 살고있고 그의 어린시절을 보낸 고국 애굽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저와 여러분도 모세처럼 언젠가는 우리들의 피부색깔과 감정과 말이 통하는 고국으로 돌아갈 일시체류자들입니다.
해외에서 고생을 하며 기반을 다진 이민자들도 은퇴를 하면 한국에서 살다가 고향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민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시민으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정서적으로 영원한 일시체류자들입니다.


론 인종적인 차별을 느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들에 긴장을 풀지 못하면서 그리고 언어소통의 불편함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날마다 받으면서 온갖 수고와 고생을 마다하지않고 살아가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꿈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고생스러움을 대신할 수 있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문화와 언어를 경험케하여 더 폭넓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녀들에 대한 기대가 우리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학문의 경험과 지식을 쌓아 후에 귀국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우리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발전적인 분야를 이곳에서 접목시켜 체코사회 보다 한발 앞서 나가 시장을 개척하여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기대가 우리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국을 떠날 때 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희망을 품고 삽니다.
반역자 도망자로 애굽을 떠났다가 훗날 하나님의 은총으로 민족의 해방자로 귀국하는 모세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우리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희망을 이루지 못하면 이땅을 떠날 때 야반도주 하듯 떠날 수 밖에 없고 한국에 또는 다른 나라로 소리없이 스며들어갈 것입니다.
외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꿈과 희망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반역자로 야반도주한 모세가 민족의 해방자로 귀국하고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는지 오늘 본문의 말씀에 여러분들이 귀를 귀울인다면
저와 여러분도 희망과 꿈을 이루고 귀국하는 일시체류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으로 오늘 본문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민족의 해방자로 성공한 해외 일시체류자로 귀국하게 하였는지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진술 하지않고 그의 살인과 시체유기 사건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어린시절에 애굽에서 선진적인 교육과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 기독교인인 스데반 집사가 모세는 “애굽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했다” 사도행전 7장의 진술처럼 모세가 그가 잘 훈련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은 언급하고 있지않습니다.
대신 오늘 본문은 모세의 살인과 시체유기 사건과 그로 인해 도망자가 된 모세의 처지를 담담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모세의 살인사건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세를 간혹 다혈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시하는 모세의 사건 몇 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 살인사건입니다.
모세가 혈기가 있는 사람이어서 충동적으로 살인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저와 여러분은 그 견해에 동의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이스라엘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여기서 애굽사람이 자기 형제를 쳤다는 것은 그냥 주먹으로 한대 쿡 지어 박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친다는 단어는 죽였다는 의미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노역현장에서 애굽사람이 (히브리 노동자들을 관리하던 애굽사람이) 노동자 히브리인을 때려서 죽인 것을 모세가 보았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여기서 한번은 한번 두번의 숫자가 아니고 어느날이란 뜻입니다.

굽감독자가 히브리 노동자를 때려 죽이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을 하면서 모세는 문제의식을 가졌고 그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마지막
목격을 하는 날 좌우로 살펴보니 보는 사람들이 없어 잔인한 애굽 감독자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응징을 하였습니다.

대단히 계획적이었던 살인이었음이 재빨리 시체를 감추는데서도 드러납니다.
12절 하반절에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를 관리하고 감독하던 사람은 성인 남자였을 것입니다.
성인 남자의 시체를 감추는 일은 그리 쉽지않습니다.
모래에 적당히 묻어서 되지않습니다.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아본 경험이 있으시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백사장 거죽을 덮고있는 모래는 쉽게 손으로 팔 수 있지만 그 거죽을 걷어내면 그 아래에 있는 모래땅을 맨손으로 팔 수가 없습니다.
성인남자의 시체를 감추기 위한 큰 구덩이를 모세가 맨손으로 파지않았고 어떤 연장을 사용했을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이고 바로 모래로 묻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볼 때 모세는 이미 가까운 곳에 땅을 파는 연장을 숨겨두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이러한 추측은 다시 말해 모세의 살인은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었던 일을 언제나 기회를 엿보았던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면밀 주도하게 한 살인이었기에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세는 다음날 태연히 행동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살인이 우발적이냐 아니면 계획적이었느냐를 밝혀보는 것은 오늘 본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의 실마리가 됩니다.
모세가 계획적으로 살인을 한 것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민족의 고역함”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인물 가운데에서도 모세처럼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의로운 마음에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러분이 잘아시는 안중근 선생님은 하얼빈역 부근 찻집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암살계획이 반드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
뒤 역에서 러시아 군 의장대 사열을 받으며 열차에서 걸어 나오던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아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살인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같은 동포 두 사람이 싸우는 일에 개입한 것이 모세의 일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히브리인 둘이 서로 맞붙어 싸우는 것을 보고 잘못한 자에게 어째서 동족을 때리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꾸중을 받은 사람이 대꾸를 하였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우두머리고 삼고 우리의 재판관으로 삼았소? 당신은 애굽사람을 죽이듯 나를 죽일 작정이오?”
아무도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비밀이 자신의 동포 입에서 나올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동포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에 모세는 급소를 맞아 그 자리에 주저앉은 권투선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모습을 오늘 본문 14절은 “모세는 일이 탄로났음을 알고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 7장에서
“모
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행 7:22-25, 스데반의 설교)

이 사건이 모세가 40세되 던 해에 일어났습니다.
신명기 34장에 보시면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을 때 나이가 일백 이십세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민족의 해방자로 바로앞에 섰을때가 80세였다고 출애굽기 7장 7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120년의 모세 생애가 40-40-40으로 셋으로 구분이 됩니다.
1-40살 바로의 궁전생활/ 41-80살 미디안 일시 체류자/81-120살 히브리(이스라엘 민족)과 광야생활/

인생 40세에 발행한 이 사건은 모세의 인생에 큰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과 억압 받는 자신의 민족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을 하던 시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바로의 궁전생활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민족을 돕는 방법을 생각하였던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쾌걸 조로처럼, 수퍼맨처럼 동포를 억압하는 애굽인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동조할 동포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모세는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동포에 대한 기대 그리고 그 동안 누렸던 기득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기대했고 자신의 편이라 여겼던 자신의 동포의 고발로 모세는 대역죄인이 되어 바로의 수배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궁전 안에서 꿈꾸던 히브리 민족의 해방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자신의 계획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아무 관련이 있지않고 오히려 고생하는 민족을 위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편을 들고 지원하고 후원해야 될 그 사람들에 의해 모세의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그 젊은 시절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뇌하던 그 수많은 시간들이 이제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그 고민을 나눌 사람도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시킬 자신의 민족도 이제는 그의 곁에 없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땅 어떤 우물가에서 자신의 좌절과 실패 그리고 고독함을 하염없이 곱씹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또 하나의 비열한 행위를 목격하게 됩니다.
일곱 자매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러 아버지의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할 때 몇 몇 목자들이 와서 그 자매들을 쫒아버렸습니다.
모세는 그 자매들 편을 들어 구해주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모세는 그 자매들의 아버지를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의 집에서 처음 해외생활을 시작하게됩니다.


외생활 몇 년 만에 이사 다닌 것이 이제는 이골이 났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해외 낯선 곳에서 자신이 거주할 집을 찾고 월세 계약을
하고 이사를 해서 짐을 풀고 어색하기 만하던 침대 위에 누웠던 첫날 밤, 그때 그 흥분과 긴장이 아직도 생생하실 줄 압니다.

르우엘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모세에게 오랜만에 평온한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몸은 미디안 땅에서 살지만 마음은 언제나 떠나온 애굽과 거기서 고된 노동으로 고통을 겪는 동포들곁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세의 마음이 아들을 낳고 지어준 이름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입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미디안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귀여운 아들을 낳아 가정을 이루었지만 모세의 마음은 일시체류자이지 그 땅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애굽에서 노역을 하는 자신의 동족의 고생을 덜어주려는 생각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동족을 염려할 힘과 젊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실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실현시킬 수도 없는 꿈을 안고 모세는 이렇게 미디안 땅에서 시간을 흘려 보내고 살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육신도 늙어가고 정열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꿈꾸며 사는 것이 언제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꿈도 서서히 희미해져 갑니다.
아무리 해도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이젠 스스로 포기를 하고 합리화합니다.
시간의 흐름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30대 40대 기세 좋게 타오르던 횃불과 같은 모습이 어느새 재를 남기고 꺼져가는 불씨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젊음은 가버렸고 우리들의 힘은 완전히 소진되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 갈데가 없는 곳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꿈과 희망이 완전히 좌절되어 온기도 사라진 한줌의 재와 같은 모습이 된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9-10)

모세가 대답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1)

오늘 본문 23-25절입니다.
“23
여러 해 후에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이 때에에 하나님은 모세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모세는 이미 꿈도 희망도 패기와 정열도 사라진 의욕이 없는 80세 한 노인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겠습니까?”
겸손의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꿈과 희망이 완전히 좌절된 인간의 응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3-25절의 말씀은 인간의 꿈과 희망이 온기마저 사라진 한줌의 재가 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명되어 쓸모없어 보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제 그것은 시작입니다.
모든 희망과 꿈이 사라져버린 모세가 이제 하나님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고있습니다.
한때 그는 신식 학문과 언어와 능력과 열정과 자기헌신 모든 것을 갖추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젊은 시절 그의 꿈과 희망으로 다시 불러내고 계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과 경험에 의거해서 자를 재듯 계획하며 아직도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직도 내가 나를 이곳에 보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에 보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케 하셔야 이땅의 일시체류자들의 삶에 참된 성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주관케 하셔야 우리는 우리들의 꿈과 희망을 이루어 “여러 해 후에” 즉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들은 금의환향 행복한 귀국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삶을 맡긴 사람에게 모든 희망과 계획이 좌절되고 무너져 한줌의 재가된 그 절망을 하나님의 소망으로 바꾸는 은혜가 있습니다. (아멘)

사순절의 은혜

  • 한인 예배 (2003년 03월 23일)
  • 마 4:1-11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30323
통역: 남유정 교우
제목: 사순절의 은혜

<본문> 마 4, 1-11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의 초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교회 전통에 따르면 부활절 전에 오는 기간으로 40일 동안 계속됩니다.
이 전통의 기원은 오늘 우리의 설교 말씀을 통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로 떠나십니다.
자신의 의지로 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시험하는 자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시험들을 다 이겨내셨습니다.

광야는 성경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생활을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까지 광야를 떠돌아 다녔고, 그리고 그 광야에서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예수님도 새로운 대속의 길로서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구약의 이스라엘과는 다르게 광야에서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는 이 본문의 사건을 교회 전통으로 끌어와 사순절로 정하여 실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특히 개신교 인들은 이 사순절 기간을 너무나 의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기간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그렇다면 사순절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사순절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주는 자기 절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의 길이 아닙니다.
사순절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 의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순절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 분으로부터 (우리의) 사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예수님이 그렇게 행하고 계시며, 모세와 엘리야 또한 그렇게 행했습니다.
사순절은 즉,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순종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신 분은 성령입니다.
그것은 모든 시험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또는 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때에 따라  시험은 우리가 그 시험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시험은 마치 갈림길과 같은 것입니다. 그 갈림길에는 다음 길의 선로를 결정해주는 선로 변환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시험을 통과하느냐에 따라,  선로 변환기에서 길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도 있고,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시험은 빵에 대한 시험입니다.
단지 좋은 생활의 보장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빵이나 자신의 수입, 생활 수준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삶의 물질적인 보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소유는 우리 인생을 채우는 본질도, 우리 인생의 의미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것으로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려서도 안됩니다.
빵에 대한 시험은 순간을 위한 보장의 시험입니다.
미래에 대한 고려 없이 현재만을 보장하고자 하는 시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자리와, 그 인도하심 속의 희망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당연히 물어봐야만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당장에 원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나중에 원하겠습니까?
이러한 행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맡기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인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험에 지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시험입니다.
우리는 자주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왜 자신의 능력을 눈에 보이도록 나타내 주시지 않으실까?
하나님은 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지 않으실까?
우리는 시험 속에서 그렇게 주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이 어떻게 행하셔야 하는가를 규정할만한 아무런 권한도,  권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의  틀에 끼어 맞추지도 말고, 또 우리가 갖고 싶은 모습으로 그 분을 형상화 하지도 맙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솔함으로 그분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마지막 시험은 우리의 권세에 대한 시험입니다..
체코에는 사람이 자신을 악마에게 내어줄 때,  악마 또는 마귀가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약속해주는 많은 동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악마 또는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은 부정직하게 성공과 영광을, 부와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한정된 시간 동안에만 유효할 뿐입니다. 
그것은 전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악마는 아무것도 공짜로 주는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대가를 가져가기 위해 다시 옵니다.
그래서 권세와 영광의 시험은 사랑과, 진실, 정의,  그리고 정직한 수고 앞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최종 승리는 아닙니다.
마지막 결정은 바로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가십니다.
사탄과의 싸움을 앞에 두고 세례로 무장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세례 덕분에 시험을 성공적으로 견뎌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강력한 방패를 얻었습니다.
믿음은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 우리는 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무기를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 강력한 무기는 바로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40일 동안 시험을 이겨내시기 위해 광야로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일년 내내 광야 같은 시험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갈림길에 서서 선로 변환기가 결정하는 데로 길의 방향을 바꾸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그러한 상황의 인식을 위한 충분한 노력이 내 안에 있는지를 찾아보는 시간입니다.
갈림길에 서서 선로 변환기로부터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선로 변환기와 그에 따르는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에게 좀 덜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더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사순절은 곧,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보다는 하나님께 더 큰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요, 당연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에 우리가 가진 것들을, 또는 우리가 즐기는 것들을 절제할 수 있습니다. 
술과, 담배, 컴퓨터 게임, 소란한 놀이들, 맛좋은 음식 등을 절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부가적인 것인지를 인식하게 되는 길입니다.
우리 인생을 실질적으로 계속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겉으로만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의 고요함 속에 가장 기쁘고 가장 큰 보물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지탱하시며, 그 인생을 의미로 가득 채워주시는 전능하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절에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Amen

하나님의 계획

  • 한인 예배 (2003년 03월 16일)
  • 출 2:1-10
  • 설교자: 이종실

030316 사순절 둘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1-10
제목: 하나님의 계획

<본문>
1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3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7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설교>
단지 여행객이 아니라 삶의 근거를 찾으러 체코로 온 것은 누구나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부터 체코라는 나라를 생각하고 오신 분들은 그리 많지않았습니다.
나름대로 동기와 계기가 있어 기대하지 않게 체코로 오신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체코로 오게된것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섭리이다. 나름대로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일년 이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에 치이고 생존경쟁과 타문화 환경에 시달리면서 시기와 질투와 오해와 자기과시와 불만과 짜증스러움이 점점 많아지는 속 좁은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날에는, 도무지 자기보호의 성에 갇히고 그리고 이기적인 조그마한 자신의 동굴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삶이 정말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매일 살기에 급급하여 하나님에게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이 정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관련성이 있는가?
만약 관련성이 있다면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오늘 저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탄생이야기를 통해 그 대답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모세의 탄생이야기 안에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에서 나타났던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탄생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라기 보다 인간세상의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냥 일어난 일로서 나타난 것 처럼 그렇게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러나 모세의 탄생의 불과 몇 달밖에 되지않은 짧은 기간의 사건을 그 당시 그 시대의 순간으로 보면 불행과 행복을 교차하는 한
사람의 탄생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긴 역사의 여정에서 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욱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눈에는 한 인간의 불행과 행복이 교차하는 피 말리는 긴장이 감도는 순간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손길은 이미 모세탄생 이전부터 있었음을 이야기 전체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권속들이 애굽으로 이민을 와서 4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갔을 때였습니다.
야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창대해지자 그들의 인구 숫자를 억제하기위해 잔인한 학대는 시작되었습니다.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부여하여 그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였습니다.
가공할 이와 같은 위협은 점점 더 두꺼워지는 먹구름처럼 밀려왔고 마침내 바로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 여든 살리라.” 명령하였습니다.

남자유아를 살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씨를 말려 민족의 미래를 없애버리려는 바로의 계획이었습니다.
민족주의와 외국인 증오로 자국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상 권력자들의 이와 같은 천인공노할 계획은 역사 이래로 지속되었습니다.
민족을 포로로 만들었던 바빌론의 시대가 그랬고 진정한 세상의 구원자요 왕이신 예수를 제거하기위한 헤롯의 유아학살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흑인을 노예로 삼고, 유태인을 학살하고, 인종을 청소하는 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표현을 담아낼 수 없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가 가득찬 시기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안하고 좋은 시대에 살기를 원합니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좋은 시대에 태어나길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태어나는 시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시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태어난 때를 때론 저주하고 때론 저항을 하고 때론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 안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라는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던 시대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힘들고 어두웠을 때였습니다.
슬픔과 탄식으로 가득찬 가장 암울한 시대를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으로 삼으시고 그때 미래의 희망,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

저와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습니까?
미래의 희망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시간이심을 믿으십시다.
나를 둘러싼 고난의 시간이 있습니까?
그것이 나를 둘러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징표임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특별한 곳이 아닌 한 작은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1-2절)은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이가 죽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석 달 동안 자신의 아이를 숨겨서 키웠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신앙의 후배들은 그것을 자녀에 대한 일반적인 부모의 본성으로 보지 않고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11:23)
이스라엘 신앙의 후배들은 모세의 부모의 행동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왕을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 해야 할 분을 두려워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 히브리 산파가 나옵니다.
하나는 십브라이고 다른 한사람은 부아입니다.
출애굽기 1장 17절에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그들은 진정한 통치자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지 바로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에 왕의 명령보다 생명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모세의 부모의 결정과 행동들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행위가 믿음에서 출발하였다고 주장하더라도 애굽 바로의 막대한 권력 앞에 노예에 불과한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권력을 전복시킬 힘도 없고 그렇다고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를 숨겼습니다.
아이를 숨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방책이었습니다.
석 달 후에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대책을 믿음이냐 인간의 본능이냐 분석하는 것은 관념적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모세도 없습니다!

석 달!
아이를 더 감출 수 없는 시간이 임박할수록 초조하게 이들의 머리 속에는 온통 1분 1초 아니 순간일지라도 아이의 보호를 더 연장할 방도를 찾느라 혼란스러웠습니다.

갈대상자를 바르고 역청과 송진을 발라 물이 스며들지않도록 하여 아이를 포대기로 잘 싸서 그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일강 강가로 가서 갈대 숲 사이에 상자를 두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넣어 나일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 어디에서 살던지 살아있기 만을 바라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아이를 흐르는 강물에 홀로 두고 떠나는 이들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않아 자꾸 뒤돌아봅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이를 지켜주시리라는 막연한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결정들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그들의 희망과 간구가 그들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히브리기자는 “믿음으로 모세를 낳았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장)

그 상황이 어떻게 발전합니까?
발걸음을 차마 돌리지 못하던 아기의 누이는 동생을 실은 갈대상자가 혹시 뒤집어지지는 않는지 아니면 물에 빠지지않는지 아니면 잘 떠내려 가는지 멀리서서 바라보고있었습니다.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딸아이를 부모들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강으로 오던 시간과 그들이 아이를 버린시간이 완전히 일치하였습니다.
유아살해의 명령을 내렸던 사람의 딸, 그 바로의 친딸이 왔습니다.
그 다음, 아직도 떠내려가지 못하고 빙글 빙글 제 자리를 돌며 갈대 숲에 놓여있던 바구니는 쉽게 공주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경우 수 가운데 최악의 경우였습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경우가 바로 이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원망과 한탄과 분노를 겪는 상황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억울하고 분을 삭일 수 없는 일들을 겪고 참다가 그 보다 더 한 일이 덮치면 그만 원망과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러나 비록 원망과 한탄과 분노를 하지만 그것에 넘어지지는 마십시다.
하나님은 가장 나쁜 상황을 자신의 목적으로 바꾸고 계심을 기억하십시다.

공주는 종들에게 바구니를 열어보게 하였습니다.
그 속에는 생후 3개월쯤 되어보이는 갓난아기가 울고있었습니다.

공주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불쌍히 여겨 말하기를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공주가 아이를 해칠 생각이 없는 것을 멀리서 본 아이의 누이가 지체하지 않고 공주에게 다가가 제안하였습니다.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먹이게 하리이까?”
공주는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누이가 데리고 온 사람은 아이의 친 어머니였습니다.
공주는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하였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에 대한 모세의 어머니의 반응에 대해 어떤 기록도 하지않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녀가 기뻐하고 있다면 불행이 행운으로 바뀐 들뜬 기쁨이 아니라 바로의 통치너머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기쁨과 전율일 것입니다.
 

바로의 딸은 “내 대신 아기에 젖을 먹이라.” 말하였습니다.
지금 모세의 친 어머니는 애굽 왕가의 자식을 양육하도록 부탁받고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의 삶이 상호 연관을 갖는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해야 됩니다.

지금 모세의 친어머니가 안고 있는 그 아이가 여러분의 아이라면, 여러분들은 그 아이를 어떻게 키우시겠습니까?
죽을 수 밖에 없는 노예의 자식에서 애굽 왕가의 자식으로 한 순간에 그 신분이 하늘과 땅만큼 뒤바뀐 그 자녀를 가슴에 안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이겠습니까?
애굽은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정치 경제 군사력으로 세계에 영향을 주는 미국과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영향을 주는 나라의 주류사회에서도 핵심주류의 사람으로 잘 키워 보겠다는 생각입니까?
아니면, 억압받고 고통을 겪고있는 노예들의 희망인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시겠다는 생각입니까?

그러나 그녀는 애굽의 왕가의 자녀로서 그 아이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노예의 신분인 히브리인으로 그를 키웠습니다.

모세는 후에 애굽의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1절을 읽어보시면 당시 그는 히브리인들을 자신의 동포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히브리인으로 살았습니다


브리기자는 모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

오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자녀들의 교육과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다 생략하고 오늘 설교의 초점으로 바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만약 모세의 어머니가 단지 자신의 행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교회를 봉사로 섬기고 감사헌금과 십일조의 예물로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물론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드리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지 행복해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만 하고 그 사건이 자신의 책임과는 어떻게 관련을 갖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아마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관련해서 어떤 의식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믿음에 의한 인간의 책임이 일치되는 길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건에 대한 믿음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전에 그것을 스스로 발견하기 위해 믿음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의 특성을 오늘 본문은 감추어진 그림으로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의 딸, 바로의 공주가 물에서 건져낸 아이를 보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가족들은 원수에 대한 마음의 분노를 폭발하지않고 오히려 공주가 아이를 해하려 하지않는 불쌍한 마음, 선한 마음을 원수의 딸에게서 발견하였습니다.


약 이들이 “안돼! 우리를 이토록 못살게 구는 원수 애굽에게 동생을 넘기느니 차라리 우리들의 손으로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이
나아.” 이렇게 생각하였다면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원수일지라도 그로부터 선한 것을 발견하는 마음 그것이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의 책임 또한 눈뜨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의 책임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 우리들은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힘, 마음의 눈을 스스로 키워가야 함을 오늘 성경은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모세의 이름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성경을 읽는 저희들은 압니다.
바로의 딸이 모세를 물에서 건져낸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건져내신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히브리인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서
불행의 자리에서
죄악의 자리에서
멸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서 구원 받은 자의 충만한 기쁨과 희망과 전율의 체험이 사순절 둘째주일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들의 체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음의 궁극적 해결

  • 연합 예배 (2003년 04월 06일)
  • 요 11:17-44
  • 설교자: 이종실

030406ek 
Jan 11:17-44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죽음을 등에 업고 다닙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 가운데 죽음은 가장 잔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잊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날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처럼 죽음을 만납니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만연했던 그 당시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이 편히 쉴 몇 안 되는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고통이 이 집에 닥쳤습니다.
나사로는 치유할 수 없는 중병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었습니다.

어제까지 그들은 언제나 즐겁고 웃음이 있는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다음날 고통이 저 바닥까지 그들을 밀어떨어트렸습니다.
그들은 질병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한적이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들은 인간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장사된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갔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주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이에 마르다가 대답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가 말한 이 구절은 유대주의 특히 바리새인의 정통 교리였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에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나는 압니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녀는 하늘과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고있습니까?
마르다의 경우, 그녀의 고백이 도움이 되지않았습니다.
그녀가 했던 것 처럼 죽음 후에 일어난 것에 대한 일반적인 희망에 대한 교리를 아는 것이 그녀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직접 우리자신 또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의 현실이 닥쳤을 때 죽음 후의 문제에 대한 희미한 희망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대담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한 질문이 얼마나 굉장한가!
주님은 그녀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였을 때 그녀가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 예수님이 그녀에게한 질문입니다.
그는 그녀가 단지 도식화된 진리를 믿느냐 아니냐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교리를 그녀가 믿는지에 대한 질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그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했을 때 그를 믿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마르다는 그 질문에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마리아가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녀는 예수를 보자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마르다가 한 말을 똑같이 하고 그리고 울었습니다.
그 주위의 사람 모두도 통곡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보았을 때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주님은 분노와 흥분을 느꼇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눈으로 거칠고 무서운 협박하고 맹렬히 ㅅ람의 생명을 깊은 슬픔으로 몰고가는 죽음의 힘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는 흥분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단지 나사로를 사랑하기때문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비참한 인간의 상황 때문에 슬퍼하셨습니다.

자신의 슬픔과 한숨에서 사람은 슬픔과 눈물을 함께 흘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나를 믿느냐”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들에게 부드럽게 묻고계십니다.
우리가 필요로하는 것은 교리나 규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덤 앞으로 걸어가/ 섰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돌을 옮겼을 때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은 무덤안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 나사로가 손과 발을 베로 동인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주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것 즉 메시지입니다.

나사로와 그의 집은 죽음의 세력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나사로와 그의 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단지 육체적 죽음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고생, 병들고 늙고 결국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보다 더 깊은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죽었던 여러분”은 짧은 표현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미하는 그런 의미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록 살아있지만 죽었던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관계 다시말씀드려 생명의 근원이 없기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없다면 육체적인 죽음이전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생애 어디에도 희망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의 슬픔과 절망이 있다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영적으로 죽은것입니다.

무덤의 나사로는 분명히 인간의 상황을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기에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고 그리고 귀한 삶의 시간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명의 근원을 스스로 잘라버리고 자신의 존재의 귀함을 상실하고 생명의 불꽃을 상실합니다.
죽은 물고기처럼 파도에 따라 움직이듯, 그들은 세상의 악의 세력에 의해 끌려다니고 욕심에 의해 조종당하고 그리고 생명의 그릇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지않고 미움과 속임으로 살아갑니다.
마르다는 말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되어 시체가 부패되고 악취가 났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은혜로 받은 풍성한 생명을 상실하고, 청결함이 한조각도 없게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부패하고 썩는 냄새가 나서 시체가 된 나사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음성이 무덤안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사로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사로가 무덤의 흔적을 지닌채 나왔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 이 부름은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여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유대 종교적인 권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3절에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주님은 무덤으로부터 나사로를 불러내고 자신의 생명을 바꾸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에서 불러내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오늘날 이 세상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커다란 음성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의 실천을 통하여 무덤 안에 있는 아직도 죄의 냄새와 죽음이 가득찬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무덤 밖에서 큰소리로 부르십니다. “너의 무덤으로부터 나오라”
무덤안은 저와 여러분들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무덤으로부터 나아갑시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무덤을 떠나 예수께 나아올 때 우리들은 살것입니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살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 우리들은 영생의 삶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궁극적 해결이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