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1. 나 프지꼬삐에 검은장미의 집과 이전 왕의 궁전

두번째 코스
구 시가 – 중앙과 북동쪽

1. 나 프지꼬삐에 거리에 있는 둠 우 체르네 루쉐(검은 장미의 집)와 이전 왕의 궁전 – 2. 히베른의 집, 화약 탑 뒤에 있는 이전 동전제조공장, 부꾸요스끼 궁전 – 3. 틴성당 사제관 – 4. 이전 오떼르스도르프 식스뜨의 집 – 5. 띤 앞의 마리아 교회(옮긴이-띤 성당) – 6. 부도브의 바츨라브 부도베쯔의 집 – 7. 살바또르 개혁교회 – 8. 성 두흐 교회 – 9. 쉬몬과 유다 교회 – 10. 성 하슈딸 교회 – 11. 끌리멘트 개혁교회 – 12. 뽀지치의 성 뻬뜨르 교회

까롤린의 대학에서 시작한 첫번째 코스와 마찬가지로 두번째 코스 역시 15세기 초 프라하 까렐대학의 역사와 후스시기와 관련된다. 프라하 중심시내를 “금의 교차로”라고 부른다. 이전 대학인들의 집인 둠 체르네 루쉐(검은 장미의 집) 이다. 무스텍 지하철 정거장 출구로부터 나와 지하철 역쪽으로 약 100미터 떨어져 있는 현재 상가인 나 프지꼬삐에 12/853 체르나 루쉐(검은 장미) 까지 간다. (우를리즈스까 거리 반대편에 있는 멀지않은 까로린까지 약 100미터)

II/1. 나 프지꼬삐에 검은장미의 집 (Dům U černé růže Na Příkopě) 과 이전 왕의 궁전(Králův dvůr) (1-2분)
현대식 상가가 매우 유명한 종교개혁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데 우선 우리들은 놀란다. 원래는 고딕건물로 체코 대학선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1408년 이곳에서 예로님 선생(M. Jeronym)이 옥스포드에서 프라하로 가져온 영국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의 문서들에 대한 첫번째 학술 토론이 열렸고 후에 얀 후스 선생(M. Jan Hus) 이 진지하게 그를 연구하였다. 위클리프에 대한 연구와 토론은 위클리프에 대한 관심으로 종교재판을 앞두고 프라하로 도주한 드레스덴의 독일인 교수들이 체코 형제단과 접촉을 하면서 1412년에 더욱 심화되었다. 마기스터 니꼴라우스가 그들중의 지도자가 되어 프라하에서 미꿀라쉬 드라슈댠스끼 선생(M. Mikuláš Drážd´anský) 그리고 그의 동생 뻬뜨르(Petr) 그리고 얀 드라엔도르프(Jan Draendorf)와 뻬뜨르 뜨르노프(Petr Turnov)의 체코이름을 갖게되었다. 미꿀라쉬 선생(M. Mikuláš)은 양종성찬에 대해 스뜨지베르의 야꼬우벡 선생(M. Jakoubka ze Stříbra)과 매우 활발히 협력하였다. 그의 성서신학적인 견해로 야꼬우벡이 프라하에서 양종성찬의 성만찬을 벽속의 마르띤 교회(kostel Martina ve zdi)(I/11)에서 시행하게 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인들 가운데 체코종교개혁시대의 독일인 후스추종자들의 실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후스종교개혁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후스의 죽음 이후 많은 독일인들이 체코 선생들 보다 더 열정적으로 성찬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얀 드라엔도르프는 1417년에 양종성찬을 시행하는 교회에서 신부서품을 받았다. 다른사람들은 후스파 종교개혁 프로그램의 열정적인 전파자들이 되어 그들 대부분은 독일에서 종교재판의 희생자들로 화형장에서 사라졌다.

현재 후스파의 역사를 지닌 건물 „검은장미의 집“에서 제정시대 풍의 건물전면의 발코니의 금색바탕위에 검은장미의 옛 문장을 볼 수 있다.

„검은 장미의 집“으로부터 아주 예쁘게 수리된 넓은 보행길 „나 프지꼬삐에(Na Příkopě)“ (이전에 구시가의 토성으로 제방이었다.) (옮긴이 – 프지꼬프의 뜻을 뚝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거리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같은 쪽에 얼마가지 않아 고전적인 교회당 성 크지쉬(sv. Kříž). 약 100미터 역시 같은 쪽에 있는 슬로반스끼 집(Slovanský dům) 걸어간다. 이 집은 프지호브스끼 귀족가문을 위해 전통적인 양식으로 18세기말에 건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작은 고딕양식의 집이였으며 1414년부터 뜨로즈노브의 얀 쉬쉬까(Jan Žižka z Trocnova) 소유였다. 당시 그는 „왕실 문지기“ 였고 그리고 „애꾸눈 야넥“ 으로 유명하였다. 거리의 끝나는 곳에 있는 화약문(Prašna brána)으로 불리우는 신고딕양식의 탑까지 걸어간다.
정확한 이름은 화약탑(Prašná věž)이다. 후스종교개혁 시대에 구시가를 둘러쌓고 있는 8개의 탑가운데 하나였다. 1475년에 블라디슬라브 2세 야겔론스끼(Vladislav II. Jagellonský)가 원래의 화약탑에 새로운 더 크고 아름답고 웅장한 르네상스양식의 탑을 세웠다. 그러나 이 탑이 완성되지 못하였다. 1757년에 프라하를 포위하여 공격할 때 크게 파괴되었고 후에 오늘날의 유사 고딕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8세기 초에 그 탑안에 화약을 넣어두었기에 화약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계속해서 걸어가면 원래 프라하시의 성문이 나온다 – 이 곳에 현재 시민회관(Obecní dům)이 있다 – 중세시대에 바츨라프 4세(Václav IV) (+ 1419)에 의해 세워진 왕의 궁전(Královský dvůr 또는 Králův dvůr)으로 불리우는 체코 통치자의 구시가 성이 1383년부터 있었다. 그의 계승자들 가운데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 이지 (Jiří z poděbrad) (+1471) 까지 여기에 거주하였고 그 다음 계승자인 블라디슬라브 2세 야겔론스끼(Vladislav II. Jagellonský) (+1516)가 흐라드차니에 있는 자신의 궁전으로 이사를 하였다.

연대기적으로 구시가의 왕의 궁전(Královský dvůr)은 얀 후스 선생(M. Jan Hus)의 프라하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 1414년 8월 26일 콘스탄츠로 가는 것을 결정하기전 성문에 이단자로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붙였다. 왕 바츨라프 4세의 새로운 명령으로 그를 반대하는 어떠한 증거도 누구도 제시하지 못해 그를 신임하기위해 소환명령을 내렸다. 만약에 그가 이단임을 증명하게 되면 콘스탄츠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그를 세워 이단으로 벌을 받게하겠다고 하였다. – 격변의 1420년에 꼬란다 스다르쉬(V. Koranda Starší) 신부에 의해 지도되는 따보르파들이 황폐화된 궁전에 주둔하였고 그들은 비뜨꼬바 산(山) 전투를 앞둔 프라하 시민들을 돕기위해 왔다.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가 자신의 거주지로 1458년부터 왕의 궁전을 사용하였다. 1462년 8월 10일 공회 참석자들이 „콤팍따따“가 무효임이 선언되고 그리고 왕 이지는 왕관의 맹세로 이단을 축출해야만 한다는 교황으로부터 온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왕은 „나는 왕위를 위해 신앙을 팔지않을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깨닫게 한 것은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자녀들 우리들은 위대한 왕위와 생명까지도 내어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후 공회에 중요한 것은 이지가 1467년 4월 공회에서 교황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고, 다음 공의회에 교황의 결정 철회를 요청한 것이다. – 왕의 궁전에서 1471년 3월 25일 후스파의 왕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의 시신은 성 비뜨 성당의 왕의 묘지에 모셨고 그의 심장은 은 상자에 넣어 띤 성당에 두었다.

광적인 카톨릭 신자로서 형제단을 억압하고 소유를 몰수하려고 한 왕 블라디슬라브 2세(Vladislav II.) 는 새로운 프라하 소란의 시기인 1483년에 성에 거주하였다. 왜냐하면 구시가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소위 제2차 프라하 투척사건이 발생하였다. 왕의 임명을 받은 부패한 집정관들이 시청 창 밖으로 투척 되었다.) 버려진 궁전은 곧 황폐화되고 점차적으로 이웃하고 있는 수도원에서 사용하다가 후에 군거주지 그리고 시청직원들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20세기 초에 원래의 왕의 궁전의 모든 건물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프라하 시민회관(Obecní dům)의 대표적 인 건물이 들어섰다. 큰 홀에서 1918년 12월 17-18일 체코 개혁파들
(당시 루터와 칼빈의 신앙고백 교회들)의 총회가 열려 이 회의에서 두 교회는 체코형제개혁교회(Českobratrskou církev evangelickou) (III/3)로통합선언을 하였다.

13. 학사 지역 – 밀리츠의 예루살렘

13. 학사 지역 – 밀리츠의 예루살렘

베들레헴 광장에서 남쪽으로 계속 걸어가서 종교개혁 시대 이전의 유적과 관련된 문화재를 만나게된다. 재건축한 학사 일대의 둘러싸인 담 안에 회색 수녀(šedy sester) 수도원인 성 바르토로메 바로크 교회당의 탑이 높이 솟은 곳이 있는 꼰빅스께 울리쩨 (번역하면 학사 거리 – 옮긴이) 까지 걸어간다. (평일에 건물의 일부가 장식무늬의 아치와 연결된 새롭게 수리된 앞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좁은 통로 길을 따라 바르또로미예스까 울리쩨 (바르토로메 거리 – 옮긴이)까지 걸어나오면 교회당 입구가 나온다. 왼쪽(동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학사 지역을 둘러볼 만 하다.)
설교자들을 교육하던 끄로미에지쉬의 밀리츠 (Milič z Kroměříž)가 1472년에 조직한 프라하 매춘녀들을 수용하는 새 예루살렘(Nový Jeruzalém) 이라는 사회복지 시설이 있었던 장소가 바로 이 학사 지역이다. 사회복지 시설은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일부 건물을 까렐 4세가 대학에 주었고 나머지는 시토 수도회에 넘겼다. 후에 밀리츠 추종자들의 모임이 이 시설을 다시 시작하였고 그리고 베들렘 까펠 운영을 위한 유리한 조건들을 만든 갱신운동을 도왔다.

반 종교개혁 시대에 시토 수도회를 이어 1660년에 독일을 포함하여 귀족집안 출신의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서 멋진 학사를 이곳에 건축한 예수회가 구 건물들을 차지하였다. 젊은 귀족들이 (개혁파 가문 출신도 포함하여) 로마 카톨릭 종교교육을 이곳에서 받았다. 예수회가 해체된 후(1773년) 인쇄소로 용도변경을 위해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한때 대규모 식당이었던 곳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들, 음악회와 무도회가 열렸다. (1798년 이곳에서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863년에 바그너 Richard Wagner가 연주를 하였다.) 1840년에 이곳에서 첫번째 체코 무도회가 열렸고 나중에 이곳은 영화관이 되었다. 1830년부터 이곳은 안토닌 드보작(Antonín Dvořak)이 공부를 했던 프라하 오르간 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재건축된 학사 지역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고있다. 바르또로미에이스까 거리 남동쪽의 모퉁이에 이 문화재의 주요 일지를 적은 작은 문화재 설명판이 있다. 바르또로미에이스까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블다바 강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12세기 초의 가장 오래된 로마 로툰 양식의 성 크지슈 채플에 다다른다. 바로 가까운 까롤리나 스비에뜰라 거리 모퉁이에 (316호 건물에) 후스파 시대에 레츠꼬바 (Rečkova)라는 학생 기숙사가 있었다. 이 기숙사는 양종성찬 시대의 체코 교회 학생들을 위해 세워진것이다. 약간 떨어져 블타바 강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고 1519년에 슈마바 지역의 보우비나에서 프라하로 온 뽀우스떼브닉(Poustevník)으로 알려진 설교가 마뗴이 (B. Matěj)가 진흙벽돌로 세웠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1520년에 프라하의 빈민들을 헌신적으로 이곳에서 보살폈다. 대담한 설교로 옥에 갖히고 결국 프라하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우리들의 여행은 이곳 바르또로메이스까 거리에서 오던 길을 되돌아 동쪽방향으로 걸어간다: 나 뻬르슈띠녜 (Na Perštýně) 거리와 만나는 사거리까지 걸어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다음 왼쪽편 거리 마르띤스까 (Martinská)까지 걷는다. 여기서 종교개혁 시대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살며 생각하며] 프라하 성 네온사인 하트와 성탄의 별

<나눔터 제29호>

프라하 성 네온사인 하트와 성탄의 별

어두움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별처럼 스산하고 우울하고 어두운 길고 긴 겨울 밤에 프라하 성의 하트모양의 빨간 네온사인이 밝게 빛난다. 이 네온사인은 하벨 대통령이 편지 말미에 상징적으로 즐겨 쓰는 하트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대단한 체코 예술가가 하벨의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공산독재와 맞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그의 편지를 받고 지지한 서방 정치 지도자들에게 감사와 작별인사를 올리는 표시로 작년 11월 프라하에서 열린 나토정상회의에 맞추어 그 자태를 드러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하벨의 모습이 나토회의로 모여든 서방 지도자들의 가슴에 프라하 성의 아름다운 야경과 더불어 빨간 네온사인으로 다시 확인되고 각인되었으리라.

고풍스러운 성과 현대식 네온사인, 자신을 죽이며 성의 고색(古色)을 은은히 밤하늘에 비쳐주는 조명과 주위를 더욱 어둡게 만들며 천박한 빨간색을 스스로 뽐내는 네온사인 그것도 선정적인 하트모양의… 무언가 부조화를 느끼지만 대예술가의 이름에 주눅이든 필자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감히 그 작품에 대해 평을 어찌 할 수 있으리요. 벌거벗은 임금의 옷도 아름답고, 이름있는 디자이너가 벌거벗겨놓은 모델의 시원스레 쑥 빠진 몸매를 긴장하여 침을 삼키며 훔쳐 보면서 그 의상을 감상하는 척 무식과 말초적인 인간성을 감출 뿐이다.

그런데 이제 예술 세계의 눈을 열어가는 예술학교 학생들이 어느날 사다리를 타고 성 꼭대기로 올라가 하트의 절반을 없애 그것을 ? (물음표)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프라하 성과 빨간 네온사인의 부조화에 대한 무식한 필자의 느낌에 확신이 생겼다. 선동적인 학생들로부터 용기를 얻은 것은 필자 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 성 아래 강변 식당들이 카드놀이에 나오는 다이아몬드, 스페이드, 크로버 모양의 네온사인을 제각각 지붕꼭대기에 매달아 갑자기 프라하 성 일대의 야경을 밤 유흥가로 변화시켜버렸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상징이 선동적인 학생들과 심술궂은 장사꾼들로 조롱을 당하는 듯 하였지만 오히려 이러한 해프닝(?)은 체코 공화국이 하벨이 세운 평화로운 자유 민주주의 국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해 아래 아무것도 감출 수 없듯이 역사 앞에서 모든 진실이 드러난 것인가? 하벨이 전생애를 걸고 투쟁한 평화와 민주 민주주의의 상징인 빨간 네온사인이 꺼지는 날, 즉 그의 대통령 집무 마지막날인 1월 31일(2월 2일 퇴임)에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하벨의 진실에 의문이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이날 하벨은 다른 유럽 7개국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서한에 서명을 하였다. 이에 대해 4개국에서 모인 그린피스 15명의 회원들은 하벨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투쟁의 상징 하트에 “War ?” 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걸고 시위를 하였다. 그들은 하벨에게 “당신은 전쟁을 사랑한단 말인가?” 질문을 한 것이다. 그들은 공산독재와 맞서 생명을 걸고 비폭력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하벨과 이라크 전쟁 지지 서한에 서명한 하벨 사이에서 “당혹스러움과 배신감”을 느꼈다.

대량학살을 막기위해 이라크가 개발한 잔인한 생물 화학 무기를 강제로 무장해제 시켜야 된다는 미국의 입장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운명 공동체 유럽이 분열되고있다. 전쟁 없이 국제적인 협의와 외교적인 압력으로 재난을 피하는 노력은 인류의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이에 대해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미국은 더 큰 책임이 있다.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조기종결 한다는 명분으로 단지 두개의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에서 10만 여명, 나가사키에서 8만 여명의 사상자를 낸 끔찍한 재난의 경험을 인류에게 안겨준 나라가 바로 미국이 아닌가? 온 인류가 전쟁 없이 대량살상무기를 지구에서 추방하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얼마 전에 서양의 명절중의 명절인 성탄절이 지나갔다. 평화와 기쁨의 상징인 성탄 별은 헤롯 왕의 성 꼭대기가 아니라 가난한 예수가 누운 마구간 지붕 위에서 빛났다. 헤롯 왕의 궁전에서는 대량살상무기의 위협과 전쟁의 공포로 고통 받는 이들이 결국 자기 자신들임을 모른다. 오히려 그 성(城)에서는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대량학살 계획만이 있었을 뿐이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살며 생각하며] 나눔터 발간 세 돌의 만감

나눔터 발간 세 돌의 만감(萬感)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봉사 3년” 이렇게 석삼년을 참는 것이 옛날 우리네 며느리들의 미덕이었다. 옛 며느리들의 미덕은 요즈음엔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이며 비인간적이고 남성우위의 유산이라고 비난을 받는다. 이제는 누구도 이것을 미덕(美德)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요즈음 며느리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다. 아니, 이런 말을 꺼내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핀잔을 받을 것이다. 당장 “안 살고 말지!” 라는 대답이 불을 보듯 뻔하게 나올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옛날 우리네 며느리들의 미덕을 예찬하며 그 덕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들의 전통으로 이어가자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요즈음 며느리들도 석 삼년 죽어 지내며 시집살이 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석 삼년 속에 담겨있는 인내의 의미와 그 지혜를 오늘에 되살려내자는 뜻이다. 출가하면 외인이 되는 시대에 연약하고 어린 여인이 전혀 다른 문화권의 집안에서 그 식구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이 아닌 필자는 타 문화의 해외생활의 경험을 반추하면 그 어려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여린 고사리 같은 우리들의 옛 며느리들이 자신의 새로운 사회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했던 피 말리는 노력과 그 지혜가 언어도 문화도 토양도 전혀 다른 이 외국에서 뿌리 내리려는 우리들의 삶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억지일까?

돈을 버는 일과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다른 것이다. 필자는 어려서 광부인 아버지를 따라 광산촌의 광부 사택에서 자랐다. 하늘도, 땅도, 물도 검은 색깔의 세상에 정을 갖고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이웃을 보지 못했다. 막장의 검은 흙 때문에 검은 대륙의 판자촌 사택에서 살아갈 뿐이다. 그들의 꿈은 한밑천 잡아 검은 대륙을 탈출하는 것이다. 검은 대륙은 이미 그들에게 사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들이 버린 그 땅으로부터 결국 사람들은 버림을 받게 된다.

돈 버는 일이 모두가 아니다. 사회에서 뿌리 없는 삶은 공허하고 갈수록 갈증이 난다. 이리 저리 밀려다니는 부평초 인생이 되고 만다.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힘겨운 일들에 대해 주관과 가치관이 아니라 임기응변으로 대처한다. 그리고 그것을 앞 다투어 무 무용담처럼 허장성세 자랑으로 늘어놓는다. 돈과 권력과 이익의 냄새에 따라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새 떼처럼 살아간다. 혼자 있으면 불안하다. 다투면서도 함께 있어야 한다. 불안은 불신의 근원이 된다. 불안한 미래가 갑자기 어느날 현실로 닥쳐오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 뿌리 없는 삶에게 이미 예정된 불안이다. 불안의 그림자가 결국 모든 것을 뒤 덮는다.

나눔터는 체코의 한인사회가 체코사회에 뿌리내리기를 소망하는 조그마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형편없이 미약하다. 이제 만 세 돌이다. 말없이 봉사하는 이들과 독자의 관심이 없었다면 벌써 포기했을 일이다. 감사를 드리며 석 삼년의 옛 며느리들의 미덕의 의미와 지혜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노력할 것을 나눔터 발간 만 세 돌을 맞아 다시 다짐해 본다.

목사 이 종 실(나눔터 발간인)

좌절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

  • 한인 예배 (2003년 02월 23일)
  • 눅 8:4-15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30223
다빗 유레흐(통역: 남유정)
본문: 누가복음 8:4-15
제목: 좌절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

<본문>
제 8 장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설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기 위해 밭으로 나갔습니다.
밭은 씨 뿌리기 위해 특별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수확 후에  그냥  놀려두거나  아니면 그저 갈아 놓기만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11월이나 12월에 씨 뿌리기가 행해졌는데, 씨를 뿌리고 난 다음에도 계속 밭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또,  씨 뿌리는 사람 바로 뒤로 밭을 가는 사람이 따라가 뿌린 씨를 새들이 쪼아먹지 못하도록 곧바로 덮어주었습니다.
떨어진 씨는 어떤 밭으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운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매번 씨 뿌릴 때마다 여러 가지 운명으로 씨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4가지 종류의 밭으로 떨어지는 씨앗의 비유가 나오는데, 뿌려진 씨가 또한 4종류의 밭으로 1/4씩 똑같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씨를 뿌리고 나서  우리는 그 결과를 금방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씨가 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밭에 뿌려진 씨는 이미 보이지않게 자라나고 있으며, 다 자란 후에는 풍성한 열매를 기다립니다.
 
첫번째 씨들은 길가 또는 길 위로 떨어졌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밭에 그 밭을 가로지르는 작은 길들이 나 있었는데, 씨를 뿌릴 때 씨들이 쉽게 그 위로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밭들이 바로 옆에 서로 붙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밭 옆에 길이 있는 한  이러한 상황은 항상 반복될 것입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는  발에 밟히거나 새에게 쪼아 먹히는 운명이었습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들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죽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씨들도 더 나은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는 밭에는 바위가 매우 많고, 그 위로 곳곳에 얇은 흙이 덮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얇고, 또 낮 동안 뜨겁게 가열된 흙 속에서 씨앗은 밤이슬과 함께 빨리 자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씨는 땅속으로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 얇은 땅에  겨우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없었지만  씨는 높게 위로라도 자라났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빠른 성장은 강렬한 태양 빛에 금방 멈춰 버리고 말았습니다.
강렬한 팔레스타인의 태양 빛이 그 싹을 태워버렸습니다. 얇은 흙 속에는 싹에게 필요한 충분한 수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씨가 시든 원인은 싹이 강렬한 태양빛에 견딜 만한 충분한 수분을 빨아들일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한 밭에 있었습니다.

세 번째  씨들은 가시덤불이 있는 밭으로 떨어졌습니다.
가시덤불은 떨어진 밀의 씨와 함께 크게 자라났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밭에는 그야말로 어디에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었고, 그것을 없앤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가시덤불의 기운은 밀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밀이 자라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세 번째 씨들은 가시덤불 보다 더 느리게 자라났고, 결국엔 가시덤불에 의해 죽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마 이러한 씨는 분명 길 가나, 바위 , 또는 가시덤불 밭에 떨어진 씨보다 더 많았을 것입니다.
더 많지않았다 할지라도, 결과는 아주 좋았습니다.
좋은 땅에서 씨는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좋은 밭에서의 백배의 결실은 불모의 땅에 떨어졌던 처음 세가지 씨들의 손실을 다 보상해줍니다.
그것은 나쁜 땅의 메마름에 대한 좋은 땅의 풍성함의 승리입니다.
씨가 자라나 열매를 맺은 그 곳에 또한 씨와 땅의 사명도 충만케 이루어졌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백배의 결실도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성공에 대해서는 짧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실패에 대한 긴 묘사에 비해 성공에 대한  것은 눈에 띌 정도로 짧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실패가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어떠한 포기도 느낄 수 없습니다.
성공의 결실은 모든 손실을 극복해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영접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뿌리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들 편에서 보면 예수님에 대한 배척과 이해의 부족은 첫 눈에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이 널리 전파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속에 나타난 씨 뿌리는 사람과 같은 비슷한 실패를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셨고, 그로부터 예수님은 현실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갖게 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많은 일시적인 실패는 최종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비유말씀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비유에 대한 의미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며 그의 말씀을 영접하는 자들은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열쇠를 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에 대한 이해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비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옳지않게 받아들여진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신실한 사람들 안에서 옳게 받아들여진 말씀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인한 손실까지도 보상해주는 풍성한 열매가 있게 합니다.
4종류의 밭이 있다는 것은, 마땅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밭 옆에 그 손실까지 넘치게 보상해주는 좋은 밭이 늘 함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일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유의 제목을 `네 가지 밭에 관한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씨의 성장은 무엇보다 밭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말씀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올바른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야 하며 그 말씀 위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직접 말씀을 전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자신의 의지에 반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말씀 성장을 막는 다양한 장애물들을 둘 때, 말씀이 역사하는 것을 막는 것은 언제나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첫 번째 씨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중에 사탄이 와서  그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말씀을 깨달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곧바로 이해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룰 시간이 없습니다.

두 번째 씨들은 하나님 말씀을 기쁘게 , 또 기꺼이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자세는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시련과 시험이 닥쳐올  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충분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고난과 아픔은 유혹으로 변하고, 그들은 그 유혹에 종속되게 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 그러한가 하는 충분한 근거와 깊은 묵상 없이 겉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빠르게 말씀을 받아들인 것처럼 빠르게 말씀을 또한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인내함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로서, 그들의 믿음은 시련의 때에도 매우 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러나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것들에 대해, 또는 말씀을 거스르는 것들에 대해 큰 열정을 쏟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 걱정과 재물, 인생의 향락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걱정, 재물, 인생의 향락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주의와 관심을 빼앗아 가며,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가로막히게 합니다.
이렇게, 성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사람은 그렇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파괴됩니다.
사람  속에 있는 내면의 갈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게 합니다. 

네 번째 씨들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받아들여지고 올바른 결실을 맺게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인내가 아름다운 결실로 인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사렛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실현됩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요, 그의 씨는 예수님께서 전파하시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의 씨,  은혜의 말씀의 씨를 뿌리십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직접 말씀하시고 행하십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씨 뿌리는 자의 일, 즉 그리스도의 일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뿌려진 씨 중에 많은 것들이 쓸모 없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희망이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씨들이 몇 갑절의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결실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 말씀의 선교 사명으로 부르고 있으며, 또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은 이 세상에서 100%의 성공을 거두고 있지 못합니다.
항상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좋은 결실을 맺을 사람들 또한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속은 결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전파의 사명으로부터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말씀의 전파를 올바르게 영접하는 몇 명의 사람들에게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4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떤 부류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들 입니까?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좋은 결실을 맺고 있습니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