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궁극적 해결

  • 연합 예배 (2003년 04월 06일)
  • 요 11:17-44
  • 설교자: 이종실

030406ek 
Jan 11:17-44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죽음을 등에 업고 다닙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 가운데 죽음은 가장 잔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잊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날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처럼 죽음을 만납니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만연했던 그 당시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이 편히 쉴 몇 안 되는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고통이 이 집에 닥쳤습니다.
나사로는 치유할 수 없는 중병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었습니다.

어제까지 그들은 언제나 즐겁고 웃음이 있는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다음날 고통이 저 바닥까지 그들을 밀어떨어트렸습니다.
그들은 질병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한적이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들은 인간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장사된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갔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주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이에 마르다가 대답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가 말한 이 구절은 유대주의 특히 바리새인의 정통 교리였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에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나는 압니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녀는 하늘과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고있습니까?
마르다의 경우, 그녀의 고백이 도움이 되지않았습니다.
그녀가 했던 것 처럼 죽음 후에 일어난 것에 대한 일반적인 희망에 대한 교리를 아는 것이 그녀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직접 우리자신 또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의 현실이 닥쳤을 때 죽음 후의 문제에 대한 희미한 희망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대담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한 질문이 얼마나 굉장한가!
주님은 그녀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였을 때 그녀가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 예수님이 그녀에게한 질문입니다.
그는 그녀가 단지 도식화된 진리를 믿느냐 아니냐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교리를 그녀가 믿는지에 대한 질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그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했을 때 그를 믿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마르다는 그 질문에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마리아가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녀는 예수를 보자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마르다가 한 말을 똑같이 하고 그리고 울었습니다.
그 주위의 사람 모두도 통곡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보았을 때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주님은 분노와 흥분을 느꼇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눈으로 거칠고 무서운 협박하고 맹렬히 ㅅ람의 생명을 깊은 슬픔으로 몰고가는 죽음의 힘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는 흥분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단지 나사로를 사랑하기때문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비참한 인간의 상황 때문에 슬퍼하셨습니다.

자신의 슬픔과 한숨에서 사람은 슬픔과 눈물을 함께 흘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나를 믿느냐”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들에게 부드럽게 묻고계십니다.
우리가 필요로하는 것은 교리나 규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덤 앞으로 걸어가/ 섰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돌을 옮겼을 때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은 무덤안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 나사로가 손과 발을 베로 동인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주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것 즉 메시지입니다.

나사로와 그의 집은 죽음의 세력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나사로와 그의 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단지 육체적 죽음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고생, 병들고 늙고 결국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보다 더 깊은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죽었던 여러분”은 짧은 표현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미하는 그런 의미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록 살아있지만 죽었던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관계 다시말씀드려 생명의 근원이 없기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없다면 육체적인 죽음이전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생애 어디에도 희망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의 슬픔과 절망이 있다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영적으로 죽은것입니다.

무덤의 나사로는 분명히 인간의 상황을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기에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고 그리고 귀한 삶의 시간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명의 근원을 스스로 잘라버리고 자신의 존재의 귀함을 상실하고 생명의 불꽃을 상실합니다.
죽은 물고기처럼 파도에 따라 움직이듯, 그들은 세상의 악의 세력에 의해 끌려다니고 욕심에 의해 조종당하고 그리고 생명의 그릇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지않고 미움과 속임으로 살아갑니다.
마르다는 말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되어 시체가 부패되고 악취가 났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은혜로 받은 풍성한 생명을 상실하고, 청결함이 한조각도 없게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부패하고 썩는 냄새가 나서 시체가 된 나사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음성이 무덤안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사로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사로가 무덤의 흔적을 지닌채 나왔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 이 부름은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여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유대 종교적인 권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3절에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주님은 무덤으로부터 나사로를 불러내고 자신의 생명을 바꾸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에서 불러내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오늘날 이 세상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커다란 음성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의 실천을 통하여 무덤 안에 있는 아직도 죄의 냄새와 죽음이 가득찬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무덤 밖에서 큰소리로 부르십니다. “너의 무덤으로부터 나오라”
무덤안은 저와 여러분들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무덤으로부터 나아갑시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무덤을 떠나 예수께 나아올 때 우리들은 살것입니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살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 우리들은 영생의 삶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궁극적 해결이 있습니다. (아멘)

2003년 4월 6일

오늘예배에 특별한 사항은 없다. 전날 토요일 밤부터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며 한동안 눈이 쏟아지더니 아침에도 여전히 춥고 꾸물대는 날씨가 눈발을 날렸다. 이런 궂은 날씨에도 연로하신 노인분들은 언제나 그 자리 그곳에 계신다. 슈토렉 목사는 병원에 입원하여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이종실 목사는 드로빅 목사와 함께 예배를 준비하였다. 슈토렉 목사의 건강문제로 금년에 부활절예배는 함께 드리지 않기로 하였다.

베셀리 목사님 고별예배(장례식)

우리교회 베셀리 장로님의 아버님이시자 우리교단의 목사님이신 까렐 베셀리 목사님이 91세의 일기로 지난 토요일(3월 8일) 아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별예배가 3월 14일 오후 4시 우리 교회당에서 있습니다.

가족장으로 열리는 고별예배는 프라하노회장이신 또마쉬 비섹 목사님 또는 이지 슈토렉 목사님이 집례하시게 됩니다.

아버님을 여윈 우리 체코교우의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픔을 함께 나눌때 체코와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만남 또한 더 깊어질 것입니다.

시간을 내어서 많은 분들이 고별예배(장례식)에 참석하시길 부탁드립니다.

2003년 3월 2일

한동안 홈피를 정리하지 못했다.
오늘 예배에 투병 중인 슈토렉 목사가 의자에 앉아서 설교를 하였다.
마치 감기환자가 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나면 다시 일을 하듯 그는 조그마한 힘만 있어도 그 힘을 교회를 위해 사용하기를 원한다.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은 그의 육신을 지배하지만 그의 믿음과 의지를 아직 꺽지 못하고있다.

그의 오랜 투병으로 에큐메니칼 예배가 점점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다.
예배에 대해 다음 설교의 주제에 대해 이종실 목사와 슈토렉 목사의 토의시간이 없어 자연스럽게 예배의 취지를 지속적으로 살려나가지 못하고 있다.
체코 교우들은 이 예배를 교류 프로그램 정도로 점점 인식하고 있고 한국교우들도 결석이 잦다.
양쪽 교우들이 함께 드리는 이 예배 자체가 이미 선교적인 선언임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슈토렉 목사는 지속적으로 이 예배를 참여하고싶어한다.
지금은 그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않도록 그리고 일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꺽지않으려고 이종실 목사가 설교를 동시에 준비하고있다.
만약 슈토렉 목사가 강단에 서지 못할 경우 이종실 목사가 대신 설교를 하기위함이다.
예배의 취지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슈토렉 목사와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할 시점에 왔다.

II/1. 나 프지꼬삐에 검은장미의 집과 이전 왕의 궁전

두번째 코스
구 시가 – 중앙과 북동쪽

1. 나 프지꼬삐에 거리에 있는 둠 우 체르네 루쉐(검은 장미의 집)와 이전 왕의 궁전 – 2. 히베른의 집, 화약 탑 뒤에 있는 이전 동전제조공장, 부꾸요스끼 궁전 – 3. 틴성당 사제관 – 4. 이전 오떼르스도르프 식스뜨의 집 – 5. 띤 앞의 마리아 교회(옮긴이-띤 성당) – 6. 부도브의 바츨라브 부도베쯔의 집 – 7. 살바또르 개혁교회 – 8. 성 두흐 교회 – 9. 쉬몬과 유다 교회 – 10. 성 하슈딸 교회 – 11. 끌리멘트 개혁교회 – 12. 뽀지치의 성 뻬뜨르 교회

까롤린의 대학에서 시작한 첫번째 코스와 마찬가지로 두번째 코스 역시 15세기 초 프라하 까렐대학의 역사와 후스시기와 관련된다. 프라하 중심시내를 “금의 교차로”라고 부른다. 이전 대학인들의 집인 둠 체르네 루쉐(검은 장미의 집) 이다. 무스텍 지하철 정거장 출구로부터 나와 지하철 역쪽으로 약 100미터 떨어져 있는 현재 상가인 나 프지꼬삐에 12/853 체르나 루쉐(검은 장미) 까지 간다. (우를리즈스까 거리 반대편에 있는 멀지않은 까로린까지 약 100미터)

II/1. 나 프지꼬삐에 검은장미의 집 (Dům U černé růže Na Příkopě) 과 이전 왕의 궁전(Králův dvůr) (1-2분)
현대식 상가가 매우 유명한 종교개혁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데 우선 우리들은 놀란다. 원래는 고딕건물로 체코 대학선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1408년 이곳에서 예로님 선생(M. Jeronym)이 옥스포드에서 프라하로 가져온 영국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의 문서들에 대한 첫번째 학술 토론이 열렸고 후에 얀 후스 선생(M. Jan Hus) 이 진지하게 그를 연구하였다. 위클리프에 대한 연구와 토론은 위클리프에 대한 관심으로 종교재판을 앞두고 프라하로 도주한 드레스덴의 독일인 교수들이 체코 형제단과 접촉을 하면서 1412년에 더욱 심화되었다. 마기스터 니꼴라우스가 그들중의 지도자가 되어 프라하에서 미꿀라쉬 드라슈댠스끼 선생(M. Mikuláš Drážd´anský) 그리고 그의 동생 뻬뜨르(Petr) 그리고 얀 드라엔도르프(Jan Draendorf)와 뻬뜨르 뜨르노프(Petr Turnov)의 체코이름을 갖게되었다. 미꿀라쉬 선생(M. Mikuláš)은 양종성찬에 대해 스뜨지베르의 야꼬우벡 선생(M. Jakoubka ze Stříbra)과 매우 활발히 협력하였다. 그의 성서신학적인 견해로 야꼬우벡이 프라하에서 양종성찬의 성만찬을 벽속의 마르띤 교회(kostel Martina ve zdi)(I/11)에서 시행하게 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인들 가운데 체코종교개혁시대의 독일인 후스추종자들의 실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후스종교개혁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후스의 죽음 이후 많은 독일인들이 체코 선생들 보다 더 열정적으로 성찬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얀 드라엔도르프는 1417년에 양종성찬을 시행하는 교회에서 신부서품을 받았다. 다른사람들은 후스파 종교개혁 프로그램의 열정적인 전파자들이 되어 그들 대부분은 독일에서 종교재판의 희생자들로 화형장에서 사라졌다.

현재 후스파의 역사를 지닌 건물 „검은장미의 집“에서 제정시대 풍의 건물전면의 발코니의 금색바탕위에 검은장미의 옛 문장을 볼 수 있다.

„검은 장미의 집“으로부터 아주 예쁘게 수리된 넓은 보행길 „나 프지꼬삐에(Na Příkopě)“ (이전에 구시가의 토성으로 제방이었다.) (옮긴이 – 프지꼬프의 뜻을 뚝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거리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같은 쪽에 얼마가지 않아 고전적인 교회당 성 크지쉬(sv. Kříž). 약 100미터 역시 같은 쪽에 있는 슬로반스끼 집(Slovanský dům) 걸어간다. 이 집은 프지호브스끼 귀족가문을 위해 전통적인 양식으로 18세기말에 건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작은 고딕양식의 집이였으며 1414년부터 뜨로즈노브의 얀 쉬쉬까(Jan Žižka z Trocnova) 소유였다. 당시 그는 „왕실 문지기“ 였고 그리고 „애꾸눈 야넥“ 으로 유명하였다. 거리의 끝나는 곳에 있는 화약문(Prašna brána)으로 불리우는 신고딕양식의 탑까지 걸어간다.
정확한 이름은 화약탑(Prašná věž)이다. 후스종교개혁 시대에 구시가를 둘러쌓고 있는 8개의 탑가운데 하나였다. 1475년에 블라디슬라브 2세 야겔론스끼(Vladislav II. Jagellonský)가 원래의 화약탑에 새로운 더 크고 아름답고 웅장한 르네상스양식의 탑을 세웠다. 그러나 이 탑이 완성되지 못하였다. 1757년에 프라하를 포위하여 공격할 때 크게 파괴되었고 후에 오늘날의 유사 고딕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8세기 초에 그 탑안에 화약을 넣어두었기에 화약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계속해서 걸어가면 원래 프라하시의 성문이 나온다 – 이 곳에 현재 시민회관(Obecní dům)이 있다 – 중세시대에 바츨라프 4세(Václav IV) (+ 1419)에 의해 세워진 왕의 궁전(Královský dvůr 또는 Králův dvůr)으로 불리우는 체코 통치자의 구시가 성이 1383년부터 있었다. 그의 계승자들 가운데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 이지 (Jiří z poděbrad) (+1471) 까지 여기에 거주하였고 그 다음 계승자인 블라디슬라브 2세 야겔론스끼(Vladislav II. Jagellonský) (+1516)가 흐라드차니에 있는 자신의 궁전으로 이사를 하였다.

연대기적으로 구시가의 왕의 궁전(Královský dvůr)은 얀 후스 선생(M. Jan Hus)의 프라하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 1414년 8월 26일 콘스탄츠로 가는 것을 결정하기전 성문에 이단자로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붙였다. 왕 바츨라프 4세의 새로운 명령으로 그를 반대하는 어떠한 증거도 누구도 제시하지 못해 그를 신임하기위해 소환명령을 내렸다. 만약에 그가 이단임을 증명하게 되면 콘스탄츠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그를 세워 이단으로 벌을 받게하겠다고 하였다. – 격변의 1420년에 꼬란다 스다르쉬(V. Koranda Starší) 신부에 의해 지도되는 따보르파들이 황폐화된 궁전에 주둔하였고 그들은 비뜨꼬바 산(山) 전투를 앞둔 프라하 시민들을 돕기위해 왔다.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가 자신의 거주지로 1458년부터 왕의 궁전을 사용하였다. 1462년 8월 10일 공회 참석자들이 „콤팍따따“가 무효임이 선언되고 그리고 왕 이지는 왕관의 맹세로 이단을 축출해야만 한다는 교황으로부터 온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왕은 „나는 왕위를 위해 신앙을 팔지않을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깨닫게 한 것은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자녀들 우리들은 위대한 왕위와 생명까지도 내어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후 공회에 중요한 것은 이지가 1467년 4월 공회에서 교황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고, 다음 공의회에 교황의 결정 철회를 요청한 것이다. – 왕의 궁전에서 1471년 3월 25일 후스파의 왕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의 시신은 성 비뜨 성당의 왕의 묘지에 모셨고 그의 심장은 은 상자에 넣어 띤 성당에 두었다.

광적인 카톨릭 신자로서 형제단을 억압하고 소유를 몰수하려고 한 왕 블라디슬라브 2세(Vladislav II.) 는 새로운 프라하 소란의 시기인 1483년에 성에 거주하였다. 왜냐하면 구시가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소위 제2차 프라하 투척사건이 발생하였다. 왕의 임명을 받은 부패한 집정관들이 시청 창 밖으로 투척 되었다.) 버려진 궁전은 곧 황폐화되고 점차적으로 이웃하고 있는 수도원에서 사용하다가 후에 군거주지 그리고 시청직원들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20세기 초에 원래의 왕의 궁전의 모든 건물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프라하 시민회관(Obecní dům)의 대표적 인 건물이 들어섰다. 큰 홀에서 1918년 12월 17-18일 체코 개혁파들
(당시 루터와 칼빈의 신앙고백 교회들)의 총회가 열려 이 회의에서 두 교회는 체코형제개혁교회(Českobratrskou církev evangelickou) (III/3)로통합선언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