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운영위원회

<2003년 1월 운영위원회 회의보고>
1월 9일 저녁6시 김만석 집사댁
참석자: 목사 회계 부장- 교육부 봉사부 찬양대 / 위임: 총무

결의 및 건의사항

1. 봉사부 / 다음 바자회 2가지 정도로 음식을 간소화하고
물건 준비를 건의

2. 찬양대/ 휴대용전자오르간과 부대 부품구입 관리키로

3. 교육부/ 탁구대 구입 관리키로

4. 김창수 집사를 체코인 한국인 교류위원으로 임명키로

5. 찬양대/ 헌금 특송순서 정하기로

6. 노윤택 성도 결혼 축의금은 관례대로 지출키로

7. 건의사항- 불우 이웃등 교회밖 봉사, 사경회, 송구영신
예배시간 조정, 체코내 한인기독교인 및 선교사들과의
교류의 건의사항을 이종실 목사가 연구하기로

이웃이 되는 길

  • 한인 예배 (2003년 01월 26일)
  • 잠 3:27-35
  • 설교자: 이종실

030126 (세번째 주현주일)

본문: 잠언 3:27-35

제목: 이웃이 되는 길

<본문>

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28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29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30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31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5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설교>

부모가 자녀를 키우다 보면 꾸짖고 매를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랑의 매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행하는 폭력은 자녀와의 친교와 신뢰에서 비롯되고 역으로 친교와 신뢰를 강화시켜줍니다.

부모와 자녀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면서 부모는 자녀를 이해하고 자녀는 부모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젖을 빨면서 성숙해져 갑니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다 보면 사회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사회적 불의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때 교회는 사회의 친교와 신뢰에서 비롯된 사랑의 매를 들고 사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바르게 나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이것을 교회의 빛과 소금의 사명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교회로 모이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사회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십시다.

복음을 전하면 체코의 우리의 이웃들은 배타적이고 조롱합니다.

심지어 더 나아가 교회를 체코 한인사회의 암적 존재로 까지 인식합니다.

교회 교인이라는 것이 떳떳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느낌이 아니라 10여년을 체코에서 살면서 늘 느끼는 느낌입니다.

한국에서도 교회당이 동네에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지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합니다.

교회당이 그리고 교인이 이웃에 있으면 더 기대에 부풀고 환영하고 좋아해야 되는 것이 상식일 텐데 교회당과 교인을 이웃과 사회가 회피합니다.

교인들을 만나면 물들고 사람을 버려 가급적 피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이런 상황에 까지 처해있습니다.

저는 체코교회를 종친회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입니다.

우리는 자기만족과 자기세력을 지속시키고 강화하려는 종친회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지 못하면 맛 잃은 소금이 쓸데없어 길바닥에 버려지는 것 처럼 우리는 사회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그런 모임이 될 것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질문을 합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듯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래 너가 많이 정확히 알고 있구나.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을것이다.

그러자 율법사는 성경에 대한 지적인 욕구를 발동시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었습니다.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을 상황에서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려졌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심지어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완전히 회복될 때 까지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만약 치료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올 때에 갚겠다고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사람이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었음을 율법사는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로 모이는 저희들이 우리들의 이웃과 사회에 이웃이 되어주면 우리들을 배타하고 적대할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율법사처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천입니다.

이 실천을 우리가 믿음과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건강하고 바른 신앙인이 됩니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않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유럽순회를 하는 대학합창단을 이끌고 오신 단장님을 만났습니다.

그 인편에 제 친구목사가 제게 물건을 보냈기에 그 물건을 받으러 그분을 잠시 만났습니다.

단원들이 다음날 일찍 바로 헝가리로 가야하는데 간식을 준비못했다는 말을 듣고 늦은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교회부근의 테스코로 왔습니다.

단원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지휘자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취침과 기상시간을 엄격히 관리하셨습니다.

저녁 10시 30분에 소등하고 취침을 하면서 보고를 받고 아침 6시에 정확히 일어나도록 지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중앙역앞 길에서 구시가지로 잠시 빠져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프라하성 야경을 보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호텔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호텔은 뿌르호니쩨에 있는 클럽호텔이었습니다.

10시 30분 취침시간이 되었는데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이들 꾸중들을 것 같아 고속도로 입구니 20분안에는 도착할겁니다.

거짓말을 하고 아이들을 보며 멋적게 웃었습니다.

순간 저 아이들이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성방송 아리랑에서 간혹 한국영화나 한국 드라마를 방송합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친구가 연인들이 서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거짓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말했던 제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조그마한 일 하나도 아는 것 하고 아는 대로 사는 것하고 일치하기가 참 쉽지않습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인간의 재산이며 영적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사람이 습관이 어떻게 붙느냐에 따라서 대인이 되기도 하고 소인이 되기도 합니다.

의로운 인생이 되기도 하고 불의한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는 습관이 붙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행의 습관입니다.

선행이란 먼저 27절에 자신의 능력 안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움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 돕는 것입니다.

자신이 능력이 안되면 미안하다 내가 도울 수 없지만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함께 부탁을 드려보자. 이렇게 이야기 해야 될 것입니다.

한인사회의 역사가 짧은 체코의 경우에 이 말씀은 매우 소중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 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잊지않아야 합니다.

자칫 선을 행하면서 자기를 자랑과 자기 과시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 스스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28절 말씀은 선행은 아끼지 말고 지체함이 없이 베풀어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마음 내켰을 때 아끼지 말고 지체 없이 해야지 시간을 끌면 시험이 듭니다.

인색한 마음이 한번 들면 계속 계획을 축소시켜 결국 선행을 베풀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의 말씀에 하나님은 부득이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나 인색한 마음 또는 억지로 선을 행하는 것보다 즐거운 마음 자원하는 심정으로 선을 베푸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창세기 18장과 19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절 이하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셨습니다.

정오에 길 지나가는 행인 셋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그들에게 달려가 자기 장막으로 초대를 하면서 발 씻을 물을 떠다 드리고 고운 가루 세 스아를 반죽하여 떡을 만들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서 특별 요리를 만들고 버터와 우유를 짜서 손님들에게 대접을 하였습니다.

길 지나가던 손님들은 마음이 흡족하여 큰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창세기 19장 1절에 보시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여호와가 두 천사의 모습으로 롯에게 나타납니다.

롯은 그들을 아브라함처럼 장막안으로 모셔 식탁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식탁 내용은 아브라함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마른 무교병 한 조각을 구워냈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의 경제적 상황을 직접 비교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이별하던 상황을 추론해 보면 롯은 아브라함 못지않은 재산이 있었고 그가 선택한 땅은 아브라함 보다 초목과 물이 있는 더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이해하면 롯은 아브라함 보다 가진 것이 없어서 그렇게 초라한 식탁을 손님들에게 내어놓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롯은 깍쟁이 노릇을 했던것입니다.

그 다음날 소돔성에 내리는 유황불에 의하여 모든 소유와 재물과 가정과 짐승 떼를 다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잠언 11장 24절에서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케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웃과 사회에 대한 선행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됩니다.

처음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는 것은 곧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나라 옛말에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바위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푼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잊지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조그마한 도움도 도움을 베푼 사람에게는 그것 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은 사람은 도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만큼 그것은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 받던 사람들 사이에 틈이 생기고 결국 원수가 되어 등을 돌립니다.

선행을 베푼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잊지않고 의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다툼과 분쟁으로 풀지않고 자신의 마음에 잘 정립시켜나가면 하나님은 이것을 고귀한 증거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시면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아벨의 예물 즉 행위가 하나님에게 증거가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선행은 하나님에게 증거가 되는 곧 아벨의 예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 예물로 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임까지 당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옳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성경에서 한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던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잣집앞 쓰레기통을 뒤지며 버려진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부자와 거지는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 부자는 죽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던 부자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집 앞에서 그래도 쓰레기일지언정
우리집에서 나온 음식으로 굶주림을 피한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동화 같은 이 예수님의 비유는 선행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을 베풀 능력이 있음에도 선을 베풀지 않은 것은 그의 집 앞에 있는 한 사람의 고난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 교회지역의 고통 받는 이웃들에 사회 선교적인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 그 근거를 제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선을 베풀지 아니한 인생은 누구에게로부터 선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선을 심어서 긍휼을 거두고, 악을 심어서 형벌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베푼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어떠하든지 이웃과 사회를 향해 선을 베푸는 좋은 습관을 붙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행의 좋은 습관이 붙은 사람은 오늘 본문 29절에서 31절에 나오는 악한 습관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는 이웃을 모함할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히 나쁘게 하지 않은 사람을 모함하거나 그와 다투지 않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습니다.

선을 베푸는 좋은 습관은 단순히 물질이 풍요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콩 한쪽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을 베푼다는 것은 물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정신으로, 말로, 기도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씀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 … 그리하여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 (표준새번역 딤전 6:18-19)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이 한해 저희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오니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는 삶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복의 터전의 기초를 세워 참된 생명과 하늘로부터 오는 복을 얻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섬김

  • 한인 예배 (2003년 01월 19일)
  • 마 20:25-28
  • 설교자: 크리스띠안 꼬스떼츠끼

030119 주현주일후 두번째 주일
설교: 크리스띠안 꼬스떼츠끼
본문: 마태복음 20장 25-28절

Text: Matthew 20,25-28
When
the ten heard about this, they were indignant with the two brothers.
Jesus called them together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eir high officials exercise authority
over them. Not so with you. Instead,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your
slave –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International
Version Bible)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 인들은  그들이 믿는 존재를  표현하는데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은 하나이고 유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형성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인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공동체역사에 있어서  믿는자들이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로인한 하나님의 형상을 분명히 하였던 다양한 방법들을  볼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그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가에 관한것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올바른 하나님의 형상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일반적인 의미에서뿐아니라, 개인적으로 그분을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이시고 내  믿음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질과 다른 사람 과의 관계가 우리가 올바른 성경적인 하나님의 상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할때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나 묘사들을 매우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에게 신학적인 언어로된 추상적 개념보다 훨씬 잘 하나님의 특성을  나타내줍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이러한 식으로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게 말씀하곤 했습니다.
후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때때로 다른 하나님의 상이,  심지어 나쁘고 올바르지 못한 하나님 상이 지배적인 때가 있었습니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심지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 시중들도록 요구하시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요구하시는 통치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상은 하나님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평범한 삶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신 멀리있는 통치자 정도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된 그림에서는 우리가 인간의 문제 한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할 수 없게 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하나님 상은 잘못된 것 일뿐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하여 유사한 통치를 하려는 태도를 불러 이르키기 때문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 시대는 거의 모든사람이 가능한한 많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에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성경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계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되기 위하여서, 인간의 삶과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서 인간에게 오셨습니다.
성경은 과거 역사상에서 뿐만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 우리 회중에, 또한 우리 개인 개인의 인생에서 살아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완연히 상반된 상태의 두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제자중 두 명이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와  이 세상 나라와의 완연한 차이를 저희에게 인식하게 하십니다.
 이말씀은 요한 복음에  명확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 내 나라는 이세상에 속한것이 아니라.’
초대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차이는 예수님과 가이사와의 차이에서 명백히 보여졌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구주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식으로 그들은 가이사처럼 통치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을 종으로 만들지 않으시는 하나님안에 그들의 신앙을 선포했습니다.
진정한 성경적인 하나님은 그의 신민들과 하나님 나라의 모든 백성들을 섬기기 원하시는 구세주로 오십니다.
이말은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다른사람을 작게 만드는 위대하심이 아니며 , 하나님의 강하심은 다른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강함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은 다른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강한사람은 다름이 아닌 다른 사람을 강하게 하기위하여 권력과 힘을 사용하는 그런 사람인것입니다.
주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그가 하고 계심과 같이 우리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서 온 세상에 주님의 진정한 모습이 명백하게 보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Christians use different ways, in which they express, what they believe in.
The center of christian faith is one and unique– it is the new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 established through Christ.
However,
in the history of christian communities we find various ways, in which
believers articulated their relation to God, and therefore their image
of God.
Even in the Bible itself we can find different means, how to
characterize God, and the way in which is He related to all the other
beings.

For every believing Christian it is of vital importance to find proper and correct image of God.
It is really important for us to find out, who is God, who is He not only generally, but quite personally.
Who is He and which kind of role does He play in my own life of faith.
It
is important, because the quality of our faith and our relation to
other people depends on whether we  have correct, biblical image of God.

When the Bible speaks about God, it uses very often images and pictures, taken from ordinary life.
These pictures reveal to us the peculiarity of God’s character better than abstract concepts of theological language.
Jesus Himself, and his disciples used to speak in this way – simply and plainly.
Later,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n some of its periods, predominated
sometimes different, and sometimes even bad or incorrect images of God’s
character. 

Many people in the history, and many even today,
think of God as about Sovereign, who sits on the throne and requires all
the other beings to serve Him and praise Him glory.
This image presents God as a distant ruler, who doesn’t really care about daily, ordinary life of His subjects.
This static picture doesn’t allow for people to hope in God’s action amidst problems of human life.
And
moreover, such an image of God is not only wrong, but it leads to
serious consequences, because it produces similar ruling attitude
towards the other people.

In our time almost everybody wants to have as much power over the others, as possible.
 In our time, it is important to hear to the voice of Scripture, which speaks about different God. 
Bible presents to us picture of God, who doesn’t sit on the throne.
God of Bible comes down. 
God comes to people, so as to become one of them, to share in the human life and human destiny. 
Bible
points to the living and acting God, not only in the past, in the
history, but especially in our own time, in our congregations, in our
individual lives.

In our text from Gospel of Matthew, we can find these two images, standing in a complete contradiction.
Two disciples of Jesus asked Him to give them highest positions in His Kingdom. 
In His reply Jesus makes us aware, that there is profound contradiction between God’s Kingdom and every kingdom of Earth. 
This idea is clearly expressed in the Gospel of John: “My Kingdom is not from this world” (John 18,36). 
This contradiction was for the first christians clearly visible as a contradiction between Christ and the Caesar.
They expressed their faith as a faith in Christ the Lord. 
In this way they proclaimed faith in God, who doesn’t want to rule as Caesar, to make others servants. 
True God of Bible comes as a Lord, who wants to serve to his subjects, to all the citizens of His Kingdom.
This
means that God’s greatness is not greatness, which makes others small.
God’s power is not power, which makes other powerless.
And it is exactly the same, which expects Jesus from His followers.
In the sight of Jesus only that one is great, who makes others great.
Only that one is strong, who is exercising power to make others stronger.
Jesus
wants all His followers to do the same, what is He doing, and in this
way to make God’s true character visible to all the world. Amen.

말과 마음이 통하는 축복

  • 한인 예배 (2003년 01월 12일)
  • 엡 4:1-16
  • 설교자: 이종실

2003-01-12
교회창립 3주년 기념예배
제목:  말과 마음이 통하는 축복
본문: 에베소서 4:1-16

<본문>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설교>
이제 저희들이 교회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 겨우 2년이 지났습니다.
짧은 2년이지만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어느 한인교회들도 시도하지 못한 현지교회와 함께 호흡을 같이하는 신앙 공동체를 저희들이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불과 1년이 조금 넘자 유럽교회들 안에 소문이 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독일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저희들의 에큐메니칼 예배를 자주 방문하고 있습니다.
유럽교회들과 유럽의 한인교회들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에 슈토렉 목사님과 저가 패널토의의 발제자로 참석하여 저희 교회 경험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유럽의 한인교회들이 저희 교회로 부터 배워 현지 교회들과의 교류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짧은 기간이지만 체코교회는 물론 유럽교회와 유럽의 한인교회에 우리교회는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 우려가 되는 것은 우리들이 어떻게 왜 이곳에 함께 모이게 되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시작을 점점 잊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뜻을 받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서로 매우 조심하며 말하고 행동하던 노력들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우리교회 세가지 생활실천 목표를 정한 것은 이러한 우리들의 시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여러분들도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첫째, 자기를 객관화하는 생활은 남을 판단하기 전에 제 자신을 돌보자는 뜻이고
둘째,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은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리자는 뜻이고
셋째, 숨은 봉사생활은 비판보다 나부터 실천해 보자는 뜻입니다.
이 노력과 함께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신앙생활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노력이 어느 정도 실천되고 있는지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온도계가 우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말(언어)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곧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통한다는 것은 곧 마음이 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마디 못하는 체코말로도 마음이 통하면 말이 통합니다.
하고싶은 말 다할 수 있고 상대방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창하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한국 사람들 끼리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말이 통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2,8)
말과 마음이 서로 통해 놀라서 하는 말입니다.
말과 마음이 통하니 서로 만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우리 주위에 말이 통하는 한 사람의 친구만 있다면 해외생활은 훨씬 덜 힘들 것입니다.
말과 마음이 통하면 자꾸 만나고 싶고, 자꾸 만나다 보면 음식을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가진 것을 좋아 하는 사람에게 퍼줍니다.
한국에서 누가 갖다 준 골뱅이 통조림, 과자, 유효기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싱싱한 라면… 귀하고 살수 없는 것을 막 줍니다.
결국 니것 내것 없이 통용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유무상통의 하나님 나라를 체험 하였습니다. 
사람이 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여 함께 떡을 떼면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많은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구원 얻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른 떡 한 조각만 먹으며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며 불편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난은 염려와 걱정에 긴장으로 모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음과 말이 통하면 그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며 화목하게 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넉넉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산다고 하여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평생을 다투며 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는 서로 말과 마음이 소통하는 화목으로 행복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어 박해 속에서도 성장해 가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우리교회의 모습이 되기를 이 새해에 그리고 3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교회의 생일날에 진심으로 소원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소원을 가지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함께 교회를 섬겨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우리들이 초대교회의 그런 모습을 원한다면 기도만 가지고 안됩니다.
기도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자기싸움을 해야 합니다.
욕심은 죄의 뿌리입니다.
죄가 성장하면 사망입니다.
우리들은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손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손해 보며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가치를 세우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priority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게 소중하던 것이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지금 까지 욕심을 부리며 소유했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팔아 그 밭을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의 새로운 삶의 가치의 발견과 변화로 이전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땅에 속한 모든 욕심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이 땅에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땅의 욕심을 버리려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보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땅의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라고 하면서도 땅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그 하늘은 땅의 욕심의 신기루이지 진정한 하늘이 아닐 것입니다.
성령을 기분으로 받은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땅의 욕심을 버릴 수 있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람들 사이에 말과 마음이 통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결혼을 앞둔 분이 성령의 역사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되면 결혼 상대자를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사업을 하는 분이 성령의 역사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되면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업 파트너를 만나게 됩니다.
이 들의 삶은 단지 사랑과 돈을 나누는 차원을 넘어 그 만남 자체가 삶의 생명력이 넘쳐 충족감을 주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됩니다.
한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이 그리고 자녀와 부모가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한다면 여러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화만사성 입니다.
집안이 평안하면 하는 일들에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지금 마른 떡 한 조각 갖고 있는 것에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 가정을 통하지 않으면 통할 곳이 없습니다.

지금 눈앞에 버는 돈을 보면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운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그리고 사업주와 종사자들이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말과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두려워하고 근신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받는 은사와 축복이 많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말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사랑의 은사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여도 우리가 모든 면에서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모든 은사를 한 사람에게 모두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나 한 부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부분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연합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사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진실로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의 특징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말합니다.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겔 34,17-19)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면 모든 것에 불평이 생깁니다.
불평은 불화의 뿌리입니다.
오늘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는 사람이 범한 죄는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업신여긴 죄입니다.
둘째 다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럽힌 죄입니다.
세번째 죄는 더럽혀진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양들이 먹게 한 죄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가정에서 사회에서 여러분들의 사업터전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다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마른 떡 한 조각으로도 감사할 줄 알고 행복을 만들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 그런 가정,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먼저 서로 좋은 점에 감사하고 칭찬하고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의 좋은 점에 칭찬하고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목회자가 부덕하여 더 좋고 더 많은 장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하고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그 또한 하나님이 주신것이기에 감사해 하는 교인들이 되십시다.
목회자인 저도 여러분들의 단점을 보기 보다 비록 작은 것일 지라도 하나님의 은사에 감사하며 그것을 격려하며 하나님의 양들인 여러분들을 이 한해 섬겨갈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와 격려는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을 비워야 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 속에 있는 죄와 욕심을 먼저 버려야만 합니다.
그것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보고, 하늘을 보고 살므로 땅의 욕심 버릴 수 있어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가정에서도 만나고 직장에서도 만나고 교회에서도 만나는 복을 우리 모두가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