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프라하 성 네온사인 하트와 성탄의 별

<나눔터 제29호>

프라하 성 네온사인 하트와 성탄의 별

어두움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별처럼 스산하고 우울하고 어두운 길고 긴 겨울 밤에 프라하 성의 하트모양의 빨간 네온사인이 밝게 빛난다. 이 네온사인은 하벨 대통령이 편지 말미에 상징적으로 즐겨 쓰는 하트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대단한 체코 예술가가 하벨의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공산독재와 맞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그의 편지를 받고 지지한 서방 정치 지도자들에게 감사와 작별인사를 올리는 표시로 작년 11월 프라하에서 열린 나토정상회의에 맞추어 그 자태를 드러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하벨의 모습이 나토회의로 모여든 서방 지도자들의 가슴에 프라하 성의 아름다운 야경과 더불어 빨간 네온사인으로 다시 확인되고 각인되었으리라.

고풍스러운 성과 현대식 네온사인, 자신을 죽이며 성의 고색(古色)을 은은히 밤하늘에 비쳐주는 조명과 주위를 더욱 어둡게 만들며 천박한 빨간색을 스스로 뽐내는 네온사인 그것도 선정적인 하트모양의… 무언가 부조화를 느끼지만 대예술가의 이름에 주눅이든 필자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감히 그 작품에 대해 평을 어찌 할 수 있으리요. 벌거벗은 임금의 옷도 아름답고, 이름있는 디자이너가 벌거벗겨놓은 모델의 시원스레 쑥 빠진 몸매를 긴장하여 침을 삼키며 훔쳐 보면서 그 의상을 감상하는 척 무식과 말초적인 인간성을 감출 뿐이다.

그런데 이제 예술 세계의 눈을 열어가는 예술학교 학생들이 어느날 사다리를 타고 성 꼭대기로 올라가 하트의 절반을 없애 그것을 ? (물음표)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프라하 성과 빨간 네온사인의 부조화에 대한 무식한 필자의 느낌에 확신이 생겼다. 선동적인 학생들로부터 용기를 얻은 것은 필자 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 성 아래 강변 식당들이 카드놀이에 나오는 다이아몬드, 스페이드, 크로버 모양의 네온사인을 제각각 지붕꼭대기에 매달아 갑자기 프라하 성 일대의 야경을 밤 유흥가로 변화시켜버렸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상징이 선동적인 학생들과 심술궂은 장사꾼들로 조롱을 당하는 듯 하였지만 오히려 이러한 해프닝(?)은 체코 공화국이 하벨이 세운 평화로운 자유 민주주의 국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해 아래 아무것도 감출 수 없듯이 역사 앞에서 모든 진실이 드러난 것인가? 하벨이 전생애를 걸고 투쟁한 평화와 민주 민주주의의 상징인 빨간 네온사인이 꺼지는 날, 즉 그의 대통령 집무 마지막날인 1월 31일(2월 2일 퇴임)에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하벨의 진실에 의문이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이날 하벨은 다른 유럽 7개국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서한에 서명을 하였다. 이에 대해 4개국에서 모인 그린피스 15명의 회원들은 하벨의 평화와 민주주의의 투쟁의 상징 하트에 “War ?” 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걸고 시위를 하였다. 그들은 하벨에게 “당신은 전쟁을 사랑한단 말인가?” 질문을 한 것이다. 그들은 공산독재와 맞서 생명을 걸고 비폭력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하벨과 이라크 전쟁 지지 서한에 서명한 하벨 사이에서 “당혹스러움과 배신감”을 느꼈다.

대량학살을 막기위해 이라크가 개발한 잔인한 생물 화학 무기를 강제로 무장해제 시켜야 된다는 미국의 입장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운명 공동체 유럽이 분열되고있다. 전쟁 없이 국제적인 협의와 외교적인 압력으로 재난을 피하는 노력은 인류의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이에 대해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미국은 더 큰 책임이 있다.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조기종결 한다는 명분으로 단지 두개의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에서 10만 여명, 나가사키에서 8만 여명의 사상자를 낸 끔찍한 재난의 경험을 인류에게 안겨준 나라가 바로 미국이 아닌가? 온 인류가 전쟁 없이 대량살상무기를 지구에서 추방하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얼마 전에 서양의 명절중의 명절인 성탄절이 지나갔다. 평화와 기쁨의 상징인 성탄 별은 헤롯 왕의 성 꼭대기가 아니라 가난한 예수가 누운 마구간 지붕 위에서 빛났다. 헤롯 왕의 궁전에서는 대량살상무기의 위협과 전쟁의 공포로 고통 받는 이들이 결국 자기 자신들임을 모른다. 오히려 그 성(城)에서는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대량학살 계획만이 있었을 뿐이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살며 생각하며] 나눔터 발간 세 돌의 만감

나눔터 발간 세 돌의 만감(萬感)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봉사 3년” 이렇게 석삼년을 참는 것이 옛날 우리네 며느리들의 미덕이었다. 옛 며느리들의 미덕은 요즈음엔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이며 비인간적이고 남성우위의 유산이라고 비난을 받는다. 이제는 누구도 이것을 미덕(美德)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요즈음 며느리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다. 아니, 이런 말을 꺼내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핀잔을 받을 것이다. 당장 “안 살고 말지!” 라는 대답이 불을 보듯 뻔하게 나올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옛날 우리네 며느리들의 미덕을 예찬하며 그 덕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들의 전통으로 이어가자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요즈음 며느리들도 석 삼년 죽어 지내며 시집살이 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석 삼년 속에 담겨있는 인내의 의미와 그 지혜를 오늘에 되살려내자는 뜻이다. 출가하면 외인이 되는 시대에 연약하고 어린 여인이 전혀 다른 문화권의 집안에서 그 식구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이 아닌 필자는 타 문화의 해외생활의 경험을 반추하면 그 어려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여린 고사리 같은 우리들의 옛 며느리들이 자신의 새로운 사회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했던 피 말리는 노력과 그 지혜가 언어도 문화도 토양도 전혀 다른 이 외국에서 뿌리 내리려는 우리들의 삶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억지일까?

돈을 버는 일과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다른 것이다. 필자는 어려서 광부인 아버지를 따라 광산촌의 광부 사택에서 자랐다. 하늘도, 땅도, 물도 검은 색깔의 세상에 정을 갖고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이웃을 보지 못했다. 막장의 검은 흙 때문에 검은 대륙의 판자촌 사택에서 살아갈 뿐이다. 그들의 꿈은 한밑천 잡아 검은 대륙을 탈출하는 것이다. 검은 대륙은 이미 그들에게 사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들이 버린 그 땅으로부터 결국 사람들은 버림을 받게 된다.

돈 버는 일이 모두가 아니다. 사회에서 뿌리 없는 삶은 공허하고 갈수록 갈증이 난다. 이리 저리 밀려다니는 부평초 인생이 되고 만다.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힘겨운 일들에 대해 주관과 가치관이 아니라 임기응변으로 대처한다. 그리고 그것을 앞 다투어 무 무용담처럼 허장성세 자랑으로 늘어놓는다. 돈과 권력과 이익의 냄새에 따라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새 떼처럼 살아간다. 혼자 있으면 불안하다. 다투면서도 함께 있어야 한다. 불안은 불신의 근원이 된다. 불안한 미래가 갑자기 어느날 현실로 닥쳐오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 뿌리 없는 삶에게 이미 예정된 불안이다. 불안의 그림자가 결국 모든 것을 뒤 덮는다.

나눔터는 체코의 한인사회가 체코사회에 뿌리내리기를 소망하는 조그마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형편없이 미약하다. 이제 만 세 돌이다. 말없이 봉사하는 이들과 독자의 관심이 없었다면 벌써 포기했을 일이다. 감사를 드리며 석 삼년의 옛 며느리들의 미덕의 의미와 지혜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노력할 것을 나눔터 발간 만 세 돌을 맞아 다시 다짐해 본다.

목사 이 종 실(나눔터 발간인)

좌절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

  • 한인 예배 (2003년 02월 23일)
  • 눅 8:4-15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30223
다빗 유레흐(통역: 남유정)
본문: 누가복음 8:4-15
제목: 좌절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

<본문>
제 8 장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설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기 위해 밭으로 나갔습니다.
밭은 씨 뿌리기 위해 특별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수확 후에  그냥  놀려두거나  아니면 그저 갈아 놓기만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11월이나 12월에 씨 뿌리기가 행해졌는데, 씨를 뿌리고 난 다음에도 계속 밭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또,  씨 뿌리는 사람 바로 뒤로 밭을 가는 사람이 따라가 뿌린 씨를 새들이 쪼아먹지 못하도록 곧바로 덮어주었습니다.
떨어진 씨는 어떤 밭으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운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매번 씨 뿌릴 때마다 여러 가지 운명으로 씨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4가지 종류의 밭으로 떨어지는 씨앗의 비유가 나오는데, 뿌려진 씨가 또한 4종류의 밭으로 1/4씩 똑같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씨를 뿌리고 나서  우리는 그 결과를 금방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씨가 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밭에 뿌려진 씨는 이미 보이지않게 자라나고 있으며, 다 자란 후에는 풍성한 열매를 기다립니다.
 
첫번째 씨들은 길가 또는 길 위로 떨어졌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밭에 그 밭을 가로지르는 작은 길들이 나 있었는데, 씨를 뿌릴 때 씨들이 쉽게 그 위로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밭들이 바로 옆에 서로 붙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밭 옆에 길이 있는 한  이러한 상황은 항상 반복될 것입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는  발에 밟히거나 새에게 쪼아 먹히는 운명이었습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들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죽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씨들도 더 나은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는 밭에는 바위가 매우 많고, 그 위로 곳곳에 얇은 흙이 덮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얇고, 또 낮 동안 뜨겁게 가열된 흙 속에서 씨앗은 밤이슬과 함께 빨리 자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씨는 땅속으로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 얇은 땅에  겨우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없었지만  씨는 높게 위로라도 자라났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빠른 성장은 강렬한 태양 빛에 금방 멈춰 버리고 말았습니다.
강렬한 팔레스타인의 태양 빛이 그 싹을 태워버렸습니다. 얇은 흙 속에는 싹에게 필요한 충분한 수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씨가 시든 원인은 싹이 강렬한 태양빛에 견딜 만한 충분한 수분을 빨아들일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한 밭에 있었습니다.

세 번째  씨들은 가시덤불이 있는 밭으로 떨어졌습니다.
가시덤불은 떨어진 밀의 씨와 함께 크게 자라났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밭에는 그야말로 어디에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었고, 그것을 없앤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가시덤불의 기운은 밀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밀이 자라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세 번째 씨들은 가시덤불 보다 더 느리게 자라났고, 결국엔 가시덤불에 의해 죽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마 이러한 씨는 분명 길 가나, 바위 , 또는 가시덤불 밭에 떨어진 씨보다 더 많았을 것입니다.
더 많지않았다 할지라도, 결과는 아주 좋았습니다.
좋은 땅에서 씨는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좋은 밭에서의 백배의 결실은 불모의 땅에 떨어졌던 처음 세가지 씨들의 손실을 다 보상해줍니다.
그것은 나쁜 땅의 메마름에 대한 좋은 땅의 풍성함의 승리입니다.
씨가 자라나 열매를 맺은 그 곳에 또한 씨와 땅의 사명도 충만케 이루어졌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백배의 결실도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성공에 대해서는 짧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실패에 대한 긴 묘사에 비해 성공에 대한  것은 눈에 띌 정도로 짧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실패가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어떠한 포기도 느낄 수 없습니다.
성공의 결실은 모든 손실을 극복해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영접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뿌리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들 편에서 보면 예수님에 대한 배척과 이해의 부족은 첫 눈에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이 널리 전파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속에 나타난 씨 뿌리는 사람과 같은 비슷한 실패를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셨고, 그로부터 예수님은 현실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갖게 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많은 일시적인 실패는 최종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비유말씀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비유에 대한 의미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며 그의 말씀을 영접하는 자들은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열쇠를 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에 대한 이해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비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옳지않게 받아들여진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신실한 사람들 안에서 옳게 받아들여진 말씀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인한 손실까지도 보상해주는 풍성한 열매가 있게 합니다.
4종류의 밭이 있다는 것은, 마땅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밭 옆에 그 손실까지 넘치게 보상해주는 좋은 밭이 늘 함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일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유의 제목을 `네 가지 밭에 관한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씨의 성장은 무엇보다 밭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말씀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올바른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야 하며 그 말씀 위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직접 말씀을 전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자신의 의지에 반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말씀 성장을 막는 다양한 장애물들을 둘 때, 말씀이 역사하는 것을 막는 것은 언제나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첫 번째 씨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중에 사탄이 와서  그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말씀을 깨달을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곧바로 이해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룰 시간이 없습니다.

두 번째 씨들은 하나님 말씀을 기쁘게 , 또 기꺼이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자세는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시련과 시험이 닥쳐올  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충분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고난과 아픔은 유혹으로 변하고, 그들은 그 유혹에 종속되게 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 그러한가 하는 충분한 근거와 깊은 묵상 없이 겉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빠르게 말씀을 받아들인 것처럼 빠르게 말씀을 또한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인내함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로서, 그들의 믿음은 시련의 때에도 매우 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러나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것들에 대해, 또는 말씀을 거스르는 것들에 대해 큰 열정을 쏟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 걱정과 재물, 인생의 향락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걱정, 재물, 인생의 향락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주의와 관심을 빼앗아 가며,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가로막히게 합니다.
이렇게, 성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사람은 그렇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파괴됩니다.
사람  속에 있는 내면의 갈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게 합니다. 

네 번째 씨들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받아들여지고 올바른 결실을 맺게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인내가 아름다운 결실로 인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사렛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실현됩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요, 그의 씨는 예수님께서 전파하시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의 씨,  은혜의 말씀의 씨를 뿌리십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직접 말씀하시고 행하십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씨 뿌리는 자의 일, 즉 그리스도의 일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뿌려진 씨 중에 많은 것들이 쓸모 없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희망이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씨들이 몇 갑절의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결실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 말씀의 선교 사명으로 부르고 있으며, 또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은 이 세상에서 100%의 성공을 거두고 있지 못합니다.
항상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좋은 결실을 맺을 사람들 또한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속은 결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전파의 사명으로부터 물러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말씀의 전파를 올바르게 영접하는 몇 명의 사람들에게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4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떤 부류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들 입니까?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좋은 결실을 맺고 있습니까?

아멘.

바울의 선교

  • 한인 예배 (2003년 02월 16일)
  • 행 13:13-43
  • 설교자: 이종실

030216

사도행전 13장 13-43절

바울의 선교

<본문>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2 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설교>

사도 바울은 살아 생전에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구브로, 바보, 버가와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거쳐 다시 처음 출발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여정가운데 있었던 전도여행입니다.

개역성경에 구브로라는 섬은 오늘날 키프러스 섬을 말합니다.

키프러스 섬에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살고있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직함은 총독이었습니다.

총독은 그 당시 로마로부터 지역통치를 위임 받은 사람입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이 사도 바울을 만나 회심을 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키프러스는 기독교인에 의해 통치된 첫번째 지역으로 역사에 기록되고있습니다.

총독의 회심으로 키프러스에서 이제 막 생겨난 어린교회는 박해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았고 그래서 복음을 넓게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일행은 날마다 성장해 가는 키프러스의 교회를 뒤로하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의 남쪽해안(지금의 터어키 남쪽해안)으로 건너와 거기서 육로를 이용해서 버가로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버가에서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산을 넘어 내륙을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곧장 안디옥에 도착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도착한 14절의 안디옥과 1절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안수하여 전도여행을 떠나보낸 교회가 있던 안디옥은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다른 도시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비시디아의 안디옥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 일행은 키프러스의 경우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러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빈 자리에 앉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혼란을 겪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던 그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이에 유대교 회당과 유대 기독교인들의 신앙공동체와 이방 기독교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혼재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경계선을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선교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사도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일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는 자기 종교, 자기 교파를 위해 절대 맹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새 역사의 증인이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찾아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렸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교회들간의 경쟁과 교파교회로 분열되는 유럽의 한인교회들의 경험은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의 동기와 목표가 진심으로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회당을 찾아가 안식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평상시 대로 예식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예배의 첫번째 순서는 신앙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으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이스라엘인들의 신앙고백을 쉐마라고 합니다.

신앙고백이 끝나면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을 큰 소리로 낭독합니다.

그리고 성경낭독이 끝나면 유대 남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권면의 말씀을 하도록 부탁을 받게 됩니다.

오늘 예배의 권면의 말씀을 위해 회당장은 바울 일행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특별히 바울과 바나바가 여행객으로 낯선 사람들이어서 랍비의 눈에 띄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서 온 여행객 바울에게 오늘 예배의 권면의 말씀을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의 회당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새 역사에 대해 증언할 기회를 갖게된 것입니다.

바울의 증언의 내용은 16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러분, 나의 말을 들으십시오.”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예배에 참석한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라고 불렀고,
안식일을 지키지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러분”하고 불러 참석자 모두를 설교에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바울이 예배 드린 유대인의 회당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민족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민족이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들을 큰 민족으로 높여 주시고,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17절)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를 감동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출애굽, 사사시대, 왕국시대와 다윗의 왕 즉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 역사가 지금 설교를 듣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차별과 소외감을 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역사는 무엇보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도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 만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상관이 없는 그의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거론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구주를 세워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으니, 그가 곧 예수입니다.”(23절)

이 한 줄의 말씀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싶은 두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자가 이미 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청중인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성경의 상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그들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끄셨고 어떻게 구원의 역사의 한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는지 설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포함하는 구약의 말씀은 물론이거니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와 더불어 나사렛 예수가 오실 메시야였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들은 분명히 이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27절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말도 깨닫지 못해서, 그를 정죄함으로써, 예언자들의 말을 그대로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 일상생활처럼 된 유대인들이 그 말씀을 지나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자들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완전히 반대로 말했습니다.

그가 메시아였기에 그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선교는 선교의 대상을 믿는 우리 자신들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해 하나님을 늘 배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뽑혀서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일을 그렇게도 많이 겪어본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된 메시아를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생겨난 교회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를 예로 그것을 우리들에게 적용시켜 설명해 본다면, 오늘 하나님께 먼저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아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잘 알고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는 기독교회들과
기독교인들로 이해를 해도 틀리지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존적인 질문을 스스로 해야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있는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책임을 맡은 사도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일꾼입니까?

아니면, 그러 한 종, 일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죄인들입니까?

아니면, 어떨 때 는 이렇고 어떨 때는 저런 사람들입니까?

우리들은 이중적이고 모순된 실존으로 살아갑니다.

늘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그러한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있습니다.

오늘 본문 38-39절에서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어떤 일에 있어서도 결코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를 힘입어서 의롭게 됩니다.” 라고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증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자기 자신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실존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죄인 가운데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시고 신실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자기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발견과 동시에 다가온 이 두가지 새로운 깨달음은 그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가 생명을 구원하는 사도로 바뀌어 졌습니다.

자기 종파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율법으로 자기 의를 구축하는 삶이 은혜 안에서 그 은혜에 응답해 가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가 지금까지 쌓았던 세상의 지식과 경험과 지위와 명예를 배설물로 여기고 오히려 자신의 깨어지기 쉬운 이중적이고 모순된 자신의 연약함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오히려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 받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음을 날마다 체험해갔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에서 예배 참석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호칭에 변화가 있음을 여러분들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 여러분”이라고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구분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를 힘입어 의롭게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죽었고 죄 용서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오직 믿는 사람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죄 용서로 구원 받았고 죄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모세의 율법으로 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차별이 더 이상 중요성이 없어졌습니다.

오직 우리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한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 믿음의 문제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믿고 그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은 곧 그 은혜에 대해 응답하는 삶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믿음으로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오늘 본문 41절에서 하바국 1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고 망하여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할 터인데, 그 일을 누가 너희에게 말하여 줄지라도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않을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41절)

태양이 비치지만 빛을 거부하고 문을 닫고있으면 우리들에게 어둠만이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게 되고 스스로 빛이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은 참된 행복과 삶의 충족감을 맛보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실존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않는 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배 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43절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은 은혜를 간직하고 붙잡으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이 기독교인으로서 오고 가는 짧은 만남 속에 교회로 모이는 그 만남 자체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교회로 모이면서 세상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의 선교의 과제

  • 연합 예배 (2003년 03월 02일)
  • 행 11:;12: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30302
사도행전 11장 12장
<본문>
제 11 장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제 12 장
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설교>

이방인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은 당시 교회에 대해 대단히 도전적인 일입니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이것은 바로 교회이고 이방인이 유대인들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법과 제도를 거스리는 것이며 전통과 그들의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지 않은 것이며, 심지어 베드로는 성령의 명령을 받을 때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리고 그의 사도들은 어떠한 하늘의 뜻에도 복종하였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제단의 음식들을 이방인들이 먹게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세리 사개오 이야기를 압니다.
그 같은 죄인이 얼마나 남몰래 하나님을 갈망하였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발견하고 그와 함께 먹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의 예도 있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큰 믿음을 가졌습니까!
그녀는 주의 식탁에 모든이들이 참석할 수 있고 그것을 감히 요구할 수 있다는 대담한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을 개에 비유를 하며 개들도 주인의 상 아래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우리들이 먹을 때 – 주의 성만찬을 함께할 때, 진실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무엇이 성만찬이며 무엇이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그것은 경계선을 전례없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입니다. 큰 변화입니다.
그것은 쓸모없는 이들,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이들
주의 만찬에 참여한 이들도 누가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선택된 손님들의 모임의 반대입니다.
멸망하는 것을 찾아 구원하기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의로운 자들이 아니라 죄인들을 찾으시고 부르시고 환영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초청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며 우리들의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의 수준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전체 교회에 퍼지자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판이 터져나왔습니다. 거룩하지 못한이들과
함께한 베드로의 식탁은 제사를 드리기에 불결하게 되었기에 유대 기독교인들의 눈으로 볼 때 복음의 섬김을 위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4가지 관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령강림 시대에 성령의 은사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임을 깨달은 모든 유대 디아스포라들에게 임하였을 때, 2. 믿음의 모든 공동체는 세례를 받았고 아무조건없이 이방인들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였습니다.
3. 성만찬을 행함으로 베드로는 그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4. 완성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은 놀라와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게하시고 교회로 인도하셨다. 하며 놀라와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감옥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교회가 환란과 박해를 경험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죽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이전 동업자 어부였습니다.
헤롯은 군중심리를 이용해 기독교를 유대사회에서 내쫓으려하고 베드로를 잡아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금세 표적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회의 문을 이방인들에게 여는데 찬성했던 자이었기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에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기적으로 감옥을 나온 후 베드로는 박해로 열정이 크게 사라진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야고보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오랫동안 베드로에 대해 사람들이 알지못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이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사람들 가운데 단지 일부만이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몰락의 조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인 바나바와 사울에게 다시 주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예루살렘의 교회는 자신의 문제에 빠져있었고 기적을 기다렸습니다.
나중에도 볼 수 있겠지만 부활절이 가까워질수록 박해뿐아니라 권력의 구성이 이루어집니다. 그 권력의 구성은 이방인들의 선교의 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이방인 사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디옥은 50만명의 인구로 로마제국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로 그의 찬란함으로 헬라문화적 전통과 동방의 신화와 신비의 중심도시였습니다.

회 공동체의 성장과 유대의 종교의식으로부터 점차적인 일탈과 그리고 점증하는 이방인의 경향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찍 독자적인
집단을 생각하게 하였고 그래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안디옥에서 그들을 기독교인 즉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론 없이 선교의 비전을 지닌 바나바는 중요한 사명을 받았고 바울은 그의 눈에 아주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그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아주 의미있는 공동체가 되게 한 교회의 스타일인 선교의 기회를 발견하였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바나바와 바울의 동역을 주선하여 자신의 교회 공동체의 미래의 여정을 분명히 설정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회당과 관련없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동시에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유대인들이 누렸던 특권을 상실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뿌리는 같지만 천년의 원수가 된 시작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제국에 무너집니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사명을 갖게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완전히 시작입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럽의 기독교의 몰락 아니면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새로운 세상의 건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