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 되는 길

  • 한인 예배 (2003년 01월 26일)
  • 잠 3:27-35
  • 설교자: 이종실

030126 (세번째 주현주일)

본문: 잠언 3:27-35

제목: 이웃이 되는 길

<본문>

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28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29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30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31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5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설교>

부모가 자녀를 키우다 보면 꾸짖고 매를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랑의 매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행하는 폭력은 자녀와의 친교와 신뢰에서 비롯되고 역으로 친교와 신뢰를 강화시켜줍니다.

부모와 자녀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면서 부모는 자녀를 이해하고 자녀는 부모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젖을 빨면서 성숙해져 갑니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다 보면 사회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사회적 불의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때 교회는 사회의 친교와 신뢰에서 비롯된 사랑의 매를 들고 사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바르게 나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이것을 교회의 빛과 소금의 사명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교회로 모이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사회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십시다.

복음을 전하면 체코의 우리의 이웃들은 배타적이고 조롱합니다.

심지어 더 나아가 교회를 체코 한인사회의 암적 존재로 까지 인식합니다.

교회 교인이라는 것이 떳떳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느낌이 아니라 10여년을 체코에서 살면서 늘 느끼는 느낌입니다.

한국에서도 교회당이 동네에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지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합니다.

교회당이 그리고 교인이 이웃에 있으면 더 기대에 부풀고 환영하고 좋아해야 되는 것이 상식일 텐데 교회당과 교인을 이웃과 사회가 회피합니다.

교인들을 만나면 물들고 사람을 버려 가급적 피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이런 상황에 까지 처해있습니다.

저는 체코교회를 종친회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입니다.

우리는 자기만족과 자기세력을 지속시키고 강화하려는 종친회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지 못하면 맛 잃은 소금이 쓸데없어 길바닥에 버려지는 것 처럼 우리는 사회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그런 모임이 될 것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질문을 합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듯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래 너가 많이 정확히 알고 있구나.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을것이다.

그러자 율법사는 성경에 대한 지적인 욕구를 발동시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었습니다.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을 상황에서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려졌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심지어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완전히 회복될 때 까지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만약 치료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올 때에 갚겠다고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사람이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었음을 율법사는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로 모이는 저희들이 우리들의 이웃과 사회에 이웃이 되어주면 우리들을 배타하고 적대할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율법사처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천입니다.

이 실천을 우리가 믿음과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건강하고 바른 신앙인이 됩니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않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유럽순회를 하는 대학합창단을 이끌고 오신 단장님을 만났습니다.

그 인편에 제 친구목사가 제게 물건을 보냈기에 그 물건을 받으러 그분을 잠시 만났습니다.

단원들이 다음날 일찍 바로 헝가리로 가야하는데 간식을 준비못했다는 말을 듣고 늦은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교회부근의 테스코로 왔습니다.

단원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지휘자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취침과 기상시간을 엄격히 관리하셨습니다.

저녁 10시 30분에 소등하고 취침을 하면서 보고를 받고 아침 6시에 정확히 일어나도록 지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중앙역앞 길에서 구시가지로 잠시 빠져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프라하성 야경을 보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호텔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호텔은 뿌르호니쩨에 있는 클럽호텔이었습니다.

10시 30분 취침시간이 되었는데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이들 꾸중들을 것 같아 고속도로 입구니 20분안에는 도착할겁니다.

거짓말을 하고 아이들을 보며 멋적게 웃었습니다.

순간 저 아이들이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성방송 아리랑에서 간혹 한국영화나 한국 드라마를 방송합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친구가 연인들이 서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거짓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말했던 제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조그마한 일 하나도 아는 것 하고 아는 대로 사는 것하고 일치하기가 참 쉽지않습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인간의 재산이며 영적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사람이 습관이 어떻게 붙느냐에 따라서 대인이 되기도 하고 소인이 되기도 합니다.

의로운 인생이 되기도 하고 불의한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는 습관이 붙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행의 습관입니다.

선행이란 먼저 27절에 자신의 능력 안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움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 돕는 것입니다.

자신이 능력이 안되면 미안하다 내가 도울 수 없지만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함께 부탁을 드려보자. 이렇게 이야기 해야 될 것입니다.

한인사회의 역사가 짧은 체코의 경우에 이 말씀은 매우 소중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 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잊지않아야 합니다.

자칫 선을 행하면서 자기를 자랑과 자기 과시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 스스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28절 말씀은 선행은 아끼지 말고 지체함이 없이 베풀어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마음 내켰을 때 아끼지 말고 지체 없이 해야지 시간을 끌면 시험이 듭니다.

인색한 마음이 한번 들면 계속 계획을 축소시켜 결국 선행을 베풀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의 말씀에 하나님은 부득이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나 인색한 마음 또는 억지로 선을 행하는 것보다 즐거운 마음 자원하는 심정으로 선을 베푸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창세기 18장과 19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절 이하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셨습니다.

정오에 길 지나가는 행인 셋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그들에게 달려가 자기 장막으로 초대를 하면서 발 씻을 물을 떠다 드리고 고운 가루 세 스아를 반죽하여 떡을 만들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서 특별 요리를 만들고 버터와 우유를 짜서 손님들에게 대접을 하였습니다.

길 지나가던 손님들은 마음이 흡족하여 큰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창세기 19장 1절에 보시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여호와가 두 천사의 모습으로 롯에게 나타납니다.

롯은 그들을 아브라함처럼 장막안으로 모셔 식탁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식탁 내용은 아브라함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마른 무교병 한 조각을 구워냈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의 경제적 상황을 직접 비교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이별하던 상황을 추론해 보면 롯은 아브라함 못지않은 재산이 있었고 그가 선택한 땅은 아브라함 보다 초목과 물이 있는 더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이해하면 롯은 아브라함 보다 가진 것이 없어서 그렇게 초라한 식탁을 손님들에게 내어놓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롯은 깍쟁이 노릇을 했던것입니다.

그 다음날 소돔성에 내리는 유황불에 의하여 모든 소유와 재물과 가정과 짐승 떼를 다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잠언 11장 24절에서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케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웃과 사회에 대한 선행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됩니다.

처음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는 것은 곧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나라 옛말에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바위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푼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잊지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조그마한 도움도 도움을 베푼 사람에게는 그것 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은 사람은 도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만큼 그것은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 받던 사람들 사이에 틈이 생기고 결국 원수가 되어 등을 돌립니다.

선행을 베푼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잊지않고 의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다툼과 분쟁으로 풀지않고 자신의 마음에 잘 정립시켜나가면 하나님은 이것을 고귀한 증거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시면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아벨의 예물 즉 행위가 하나님에게 증거가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선행은 하나님에게 증거가 되는 곧 아벨의 예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 예물로 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임까지 당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옳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성경에서 한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던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잣집앞 쓰레기통을 뒤지며 버려진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부자와 거지는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 부자는 죽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던 부자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집 앞에서 그래도 쓰레기일지언정
우리집에서 나온 음식으로 굶주림을 피한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동화 같은 이 예수님의 비유는 선행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을 베풀 능력이 있음에도 선을 베풀지 않은 것은 그의 집 앞에 있는 한 사람의 고난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 교회지역의 고통 받는 이웃들에 사회 선교적인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 그 근거를 제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선을 베풀지 아니한 인생은 누구에게로부터 선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선을 심어서 긍휼을 거두고, 악을 심어서 형벌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베푼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어떠하든지 이웃과 사회를 향해 선을 베푸는 좋은 습관을 붙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행의 좋은 습관이 붙은 사람은 오늘 본문 29절에서 31절에 나오는 악한 습관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는 이웃을 모함할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히 나쁘게 하지 않은 사람을 모함하거나 그와 다투지 않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습니다.

선을 베푸는 좋은 습관은 단순히 물질이 풍요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콩 한쪽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을 베푼다는 것은 물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정신으로, 말로, 기도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씀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 … 그리하여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 (표준새번역 딤전 6:18-19)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이 한해 저희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오니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는 삶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복의 터전의 기초를 세워 참된 생명과 하늘로부터 오는 복을 얻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섬김

  • 한인 예배 (2003년 01월 19일)
  • 마 20:25-28
  • 설교자: 크리스띠안 꼬스떼츠끼

030119 주현주일후 두번째 주일
설교: 크리스띠안 꼬스떼츠끼
본문: 마태복음 20장 25-28절

Text: Matthew 20,25-28
When
the ten heard about this, they were indignant with the two brothers.
Jesus called them together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eir high officials exercise authority
over them. Not so with you. Instead,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your
slave –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International
Version Bible)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 인들은  그들이 믿는 존재를  표현하는데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은 하나이고 유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형성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인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공동체역사에 있어서  믿는자들이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로인한 하나님의 형상을 분명히 하였던 다양한 방법들을  볼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그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가에 관한것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올바른 하나님의 형상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일반적인 의미에서뿐아니라, 개인적으로 그분을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이시고 내  믿음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질과 다른 사람 과의 관계가 우리가 올바른 성경적인 하나님의 상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할때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나 묘사들을 매우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에게 신학적인 언어로된 추상적 개념보다 훨씬 잘 하나님의 특성을  나타내줍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이러한 식으로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게 말씀하곤 했습니다.
후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때때로 다른 하나님의 상이,  심지어 나쁘고 올바르지 못한 하나님 상이 지배적인 때가 있었습니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심지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 시중들도록 요구하시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요구하시는 통치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상은 하나님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평범한 삶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신 멀리있는 통치자 정도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된 그림에서는 우리가 인간의 문제 한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할 수 없게 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하나님 상은 잘못된 것 일뿐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하여 유사한 통치를 하려는 태도를 불러 이르키기 때문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 시대는 거의 모든사람이 가능한한 많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에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성경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계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되기 위하여서, 인간의 삶과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서 인간에게 오셨습니다.
성경은 과거 역사상에서 뿐만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 우리 회중에, 또한 우리 개인 개인의 인생에서 살아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완연히 상반된 상태의 두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제자중 두 명이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와  이 세상 나라와의 완연한 차이를 저희에게 인식하게 하십니다.
 이말씀은 요한 복음에  명확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 내 나라는 이세상에 속한것이 아니라.’
초대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차이는 예수님과 가이사와의 차이에서 명백히 보여졌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구주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식으로 그들은 가이사처럼 통치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을 종으로 만들지 않으시는 하나님안에 그들의 신앙을 선포했습니다.
진정한 성경적인 하나님은 그의 신민들과 하나님 나라의 모든 백성들을 섬기기 원하시는 구세주로 오십니다.
이말은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다른사람을 작게 만드는 위대하심이 아니며 , 하나님의 강하심은 다른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강함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은 다른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강한사람은 다름이 아닌 다른 사람을 강하게 하기위하여 권력과 힘을 사용하는 그런 사람인것입니다.
주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그가 하고 계심과 같이 우리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서 온 세상에 주님의 진정한 모습이 명백하게 보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Christians use different ways, in which they express, what they believe in.
The center of christian faith is one and unique– it is the new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 established through Christ.
However,
in the history of christian communities we find various ways, in which
believers articulated their relation to God, and therefore their image
of God.
Even in the Bible itself we can find different means, how to
characterize God, and the way in which is He related to all the other
beings.

For every believing Christian it is of vital importance to find proper and correct image of God.
It is really important for us to find out, who is God, who is He not only generally, but quite personally.
Who is He and which kind of role does He play in my own life of faith.
It
is important, because the quality of our faith and our relation to
other people depends on whether we  have correct, biblical image of God.

When the Bible speaks about God, it uses very often images and pictures, taken from ordinary life.
These pictures reveal to us the peculiarity of God’s character better than abstract concepts of theological language.
Jesus Himself, and his disciples used to speak in this way – simply and plainly.
Later,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n some of its periods, predominated
sometimes different, and sometimes even bad or incorrect images of God’s
character. 

Many people in the history, and many even today,
think of God as about Sovereign, who sits on the throne and requires all
the other beings to serve Him and praise Him glory.
This image presents God as a distant ruler, who doesn’t really care about daily, ordinary life of His subjects.
This static picture doesn’t allow for people to hope in God’s action amidst problems of human life.
And
moreover, such an image of God is not only wrong, but it leads to
serious consequences, because it produces similar ruling attitude
towards the other people.

In our time almost everybody wants to have as much power over the others, as possible.
 In our time, it is important to hear to the voice of Scripture, which speaks about different God. 
Bible presents to us picture of God, who doesn’t sit on the throne.
God of Bible comes down. 
God comes to people, so as to become one of them, to share in the human life and human destiny. 
Bible
points to the living and acting God, not only in the past, in the
history, but especially in our own time, in our congregations, in our
individual lives.

In our text from Gospel of Matthew, we can find these two images, standing in a complete contradiction.
Two disciples of Jesus asked Him to give them highest positions in His Kingdom. 
In His reply Jesus makes us aware, that there is profound contradiction between God’s Kingdom and every kingdom of Earth. 
This idea is clearly expressed in the Gospel of John: “My Kingdom is not from this world” (John 18,36). 
This contradiction was for the first christians clearly visible as a contradiction between Christ and the Caesar.
They expressed their faith as a faith in Christ the Lord. 
In this way they proclaimed faith in God, who doesn’t want to rule as Caesar, to make others servants. 
True God of Bible comes as a Lord, who wants to serve to his subjects, to all the citizens of His Kingdom.
This
means that God’s greatness is not greatness, which makes others small.
God’s power is not power, which makes other powerless.
And it is exactly the same, which expects Jesus from His followers.
In the sight of Jesus only that one is great, who makes others great.
Only that one is strong, who is exercising power to make others stronger.
Jesus
wants all His followers to do the same, what is He doing, and in this
way to make God’s true character visible to all the world. Amen.

말과 마음이 통하는 축복

  • 한인 예배 (2003년 01월 12일)
  • 엡 4:1-16
  • 설교자: 이종실

2003-01-12
교회창립 3주년 기념예배
제목:  말과 마음이 통하는 축복
본문: 에베소서 4:1-16

<본문>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설교>
이제 저희들이 교회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 겨우 2년이 지났습니다.
짧은 2년이지만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어느 한인교회들도 시도하지 못한 현지교회와 함께 호흡을 같이하는 신앙 공동체를 저희들이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불과 1년이 조금 넘자 유럽교회들 안에 소문이 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독일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저희들의 에큐메니칼 예배를 자주 방문하고 있습니다.
유럽교회들과 유럽의 한인교회들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에 슈토렉 목사님과 저가 패널토의의 발제자로 참석하여 저희 교회 경험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유럽의 한인교회들이 저희 교회로 부터 배워 현지 교회들과의 교류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짧은 기간이지만 체코교회는 물론 유럽교회와 유럽의 한인교회에 우리교회는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 우려가 되는 것은 우리들이 어떻게 왜 이곳에 함께 모이게 되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시작을 점점 잊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뜻을 받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서로 매우 조심하며 말하고 행동하던 노력들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우리교회 세가지 생활실천 목표를 정한 것은 이러한 우리들의 시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여러분들도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첫째, 자기를 객관화하는 생활은 남을 판단하기 전에 제 자신을 돌보자는 뜻이고
둘째,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은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리자는 뜻이고
셋째, 숨은 봉사생활은 비판보다 나부터 실천해 보자는 뜻입니다.
이 노력과 함께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신앙생활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노력이 어느 정도 실천되고 있는지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온도계가 우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말(언어)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곧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통한다는 것은 곧 마음이 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마디 못하는 체코말로도 마음이 통하면 말이 통합니다.
하고싶은 말 다할 수 있고 상대방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창하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한국 사람들 끼리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말이 통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2,8)
말과 마음이 서로 통해 놀라서 하는 말입니다.
말과 마음이 통하니 서로 만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우리 주위에 말이 통하는 한 사람의 친구만 있다면 해외생활은 훨씬 덜 힘들 것입니다.
말과 마음이 통하면 자꾸 만나고 싶고, 자꾸 만나다 보면 음식을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가진 것을 좋아 하는 사람에게 퍼줍니다.
한국에서 누가 갖다 준 골뱅이 통조림, 과자, 유효기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싱싱한 라면… 귀하고 살수 없는 것을 막 줍니다.
결국 니것 내것 없이 통용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유무상통의 하나님 나라를 체험 하였습니다. 
사람이 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여 함께 떡을 떼면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많은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구원 얻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른 떡 한 조각만 먹으며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며 불편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난은 염려와 걱정에 긴장으로 모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음과 말이 통하면 그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며 화목하게 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넉넉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산다고 하여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평생을 다투며 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는 서로 말과 마음이 소통하는 화목으로 행복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어 박해 속에서도 성장해 가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우리교회의 모습이 되기를 이 새해에 그리고 3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교회의 생일날에 진심으로 소원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소원을 가지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함께 교회를 섬겨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우리들이 초대교회의 그런 모습을 원한다면 기도만 가지고 안됩니다.
기도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자기싸움을 해야 합니다.
욕심은 죄의 뿌리입니다.
죄가 성장하면 사망입니다.
우리들은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손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손해 보며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가치를 세우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priority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게 소중하던 것이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지금 까지 욕심을 부리며 소유했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팔아 그 밭을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의 새로운 삶의 가치의 발견과 변화로 이전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땅에 속한 모든 욕심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이 땅에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땅의 욕심을 버리려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보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땅의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라고 하면서도 땅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그 하늘은 땅의 욕심의 신기루이지 진정한 하늘이 아닐 것입니다.
성령을 기분으로 받은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땅의 욕심을 버릴 수 있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람들 사이에 말과 마음이 통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결혼을 앞둔 분이 성령의 역사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되면 결혼 상대자를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사업을 하는 분이 성령의 역사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되면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업 파트너를 만나게 됩니다.
이 들의 삶은 단지 사랑과 돈을 나누는 차원을 넘어 그 만남 자체가 삶의 생명력이 넘쳐 충족감을 주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됩니다.
한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이 그리고 자녀와 부모가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한다면 여러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화만사성 입니다.
집안이 평안하면 하는 일들에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지금 마른 떡 한 조각 갖고 있는 것에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 가정을 통하지 않으면 통할 곳이 없습니다.

지금 눈앞에 버는 돈을 보면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운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그리고 사업주와 종사자들이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말과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두려워하고 근신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받는 은사와 축복이 많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말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사랑의 은사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여도 우리가 모든 면에서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모든 은사를 한 사람에게 모두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나 한 부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부분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연합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사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진실로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의 특징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말합니다.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겔 34,17-19)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면 모든 것에 불평이 생깁니다.
불평은 불화의 뿌리입니다.
오늘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는 사람이 범한 죄는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업신여긴 죄입니다.
둘째 다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럽힌 죄입니다.
세번째 죄는 더럽혀진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양들이 먹게 한 죄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가정에서 사회에서 여러분들의 사업터전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다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마른 떡 한 조각으로도 감사할 줄 알고 행복을 만들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 그런 가정,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먼저 서로 좋은 점에 감사하고 칭찬하고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의 좋은 점에 칭찬하고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목회자가 부덕하여 더 좋고 더 많은 장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하고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그 또한 하나님이 주신것이기에 감사해 하는 교인들이 되십시다.
목회자인 저도 여러분들의 단점을 보기 보다 비록 작은 것일 지라도 하나님의 은사에 감사하며 그것을 격려하며 하나님의 양들인 여러분들을 이 한해 섬겨갈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와 격려는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을 비워야 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 속에 있는 죄와 욕심을 먼저 버려야만 합니다.
그것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보고, 하늘을 보고 살므로 땅의 욕심 버릴 수 있어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가정에서도 만나고 직장에서도 만나고 교회에서도 만나는 복을 우리 모두가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2년 12월 운영위원회

12월 운영위원회 회의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일시: 2002년 12월 6일 오후 6시 이종실 목사댁
참석자: 권영봉 고혜숙 김만석 송종식 이종실 홍성헌(가나다 순)

결의사항
1. 영수증관리와 처리요령에 대해 공지하기로
2. 예배회중 숫자 증가로 친교 준비비를 500꼬룬으로 재조정키로
3. 정기 년간 행사 주무 부서선정
바자회(12월 봉사부) 보흐니쩨 선물전달(12월 교육부)
성탄전야 축하모임(교육부) 교회창립예배(1월 선교부)
야외예배(5월 선교부) 찬송가 가족암창대회(6월 찬양대)
추석명절예배(선교부)
4. 2003년도 5월 야외예배는 체코교우들과 함께 연합해서 드리기로
5. 이종실 목사 주 선교후원단체인 여전도회와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6. 12월 28일 한인회 송년의 밤 행사 때 우리 교회의 이름으로 약간의 음식을 준비하기로
7. 체코교회가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독립을 위해 준비하는 personal fond에 작년과 마찬가지로 꼬빌리시 교회의 이름으로 50,000꼬룬 지원키로
8. 2003년 1월 운영위원회는 1월 첫째주 금요일 10일 오후 6시 김만석 집사댁에서 갖기로

거룩하신 예수님

  • 한인 예배 (2002년 12월 08일)
  • 눅 1:26-38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1208 (대강절 두번째 주일)
본문: 누가복음 1장 26-35절, 37-38절
설교자: 다빗 유레흐
제목: 거룩하신 예수님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개역한글판 눅 1장)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누가가 우리에게 남겨준 증언에 초점을 맞추어 보십시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깊게 생각하도록 하게 할 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이름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천사는 이스라엘의 보호자입니다.
그리고 이 천사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남쪽에 있는 조그만 도시 나사렛으로 옵니다.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이곳으로 옵니다.
이스라엘의 보호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 ,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라고 하는 한 약혼녀에게 다가 가고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로 인해 무엇인가를 알리시려 합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다가와 인사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그 상황이 어떠했을지 한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젊은 마리아는, 그녀에게 이렇게 인사하는 이 이름 모를 사람으로 인해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인사말은 그럭저럭 이해는 하지만,  은혜를 받은자여 이 인사는 무슨 뜻입니까?
천사가 설명합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다시말씀드려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녀를 덮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이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입니다.

천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구약에서 이 비슷한 천사 (여호와의 천사)의 말이 나옵니다. – 하갈의 아들의 탄생 때(창16:11)와 삼손의 탄생 때(삿 13:3) 입니다.
아사야서 에서 이런 약속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심이라는 뜻입니다) (사 7:14)
이 말씀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아는 자신의 힘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그는 선택된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는 들었습니다.
예수, 히브리어로 여호수와  – Jozue 는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라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가시고 있는 사람의 보내심은 인간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에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은 마리아로부터 메시아 즉  구원자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계속 말을 하였습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가브리엘의 이 메시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다시 구약성경을 살펴봅시다.

사야서에: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얻었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표준새번역 사 9:6-7)
다윗의 보좌 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은
사무엘하에서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하신 말씀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의 생애가 다하여서, 네가 너의 조상들과 함께
묻히면, 내가 네 몸에서 나올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서,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바로 그가 나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집을 지을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하여 주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저의 자식을 매로 때리거나 채찍으로 치듯이, 나도 그를 징계하겠다. (표준새번역 삼하 7:12-14)
마리아의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의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이 모든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같은  질문밖에 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렇습니다. 오늘날 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같은 질문만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남자와 동침을 하지 않은 처녀가 임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것에 대하여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대답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에서 덮으신다는 뜻은 그림자로 가린다 라는 뜻으로 즉 보호한다라는 의미입니다.

편 91편에서 우리는 덮어준다는 의미의 말씀을 더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의 깃으로 너를 덮어 주시고 너도 그의 날개
아래로 피할 것이니, 주의 진실하심이 너를 지켜 주는 방패와 성벽이 될 것이다. (표준새번역 시 91:4)
이곳은 산부인과 의학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은 우리의 믿음을 위한 곳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하심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섭리에 대한 믿음을 위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마리아로부터 거룩한 아이가 태어나는 일을 하십니다.
누가 거룩합니까?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표준새번역 사 6:3)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고 세상에 뛰어나고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분 그 분이 거룩합니다.
하나님은 이 처럼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 이름에 절대적인 거룩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신 그 분이 거룩하시며, 오직 거룩하신 한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고 거룩한 것을 알게하신 것 그것이 거룩합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깨달은 그 분 그가 거룩하십니다.
마리아로부터 태어날 이 아이가 바로 그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구원자이십니다.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드디어 이렇게 마리아는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가 되고 자신의 좋은 평판을 잃을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언자들과 같은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일에 자발적인 결심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누가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에서 구약의 말씀이 기다리던 그 분이 탄생할 아기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을 의미하는 이야기에 집중해 있는 매우 중요한 말씀인 오늘 성경본문을 저희들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간단히 되새겨 보십시다.

먼저 마리아에 대해서 입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마리아에 대해 잊어버리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마리아를 카톨릭적인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의심의 여지없이 구원의 역사 속에 특별한 사명을 받았고 여인들 가운데 축복을 받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메시야, 구원자를 신비롭게 인류에게 안내한 분으로 기억해야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오늘 성경본문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의미있는 길을 인류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기로 결정한 은혜롭고 사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태어날 그 분은 교육과 이데올로기를 위한 일반적인 사람, 철학자, 정치가, 인류의 지도자 또는 혁명가가 아닙니다.
태어나신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시고 하나님의 권능을 대신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된 메시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고 영원히 왕이 되십니다.

이천년 전에 태어나셨던 예수님 그리고 저희들이 두 주이상 그의 탄생을 기억하고 축하할  예수님, 그 분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사랑과 영원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저희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들의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신 그 사랑을 여호와께 찬양돌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