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신하며 기다림

  • 한인 예배 (2002년 11월 24일)
  • 눅 12:42-48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1124
본문: 누가복음 12: 42-48
제목: 경계와 기다림
설교자: 다빗 유레흐

<본문>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5)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늘은 교회달력의 마지막 주일이며, 다음 주일은 아드벤트 첫번째 주일로 새해의 시작입니다. 아드벤트는 강림 이란뜻입니다. 그리고
아드벤트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아드벤트 단어의 뜻 속에 이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매년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를 하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구원의 역사를 위한 이 특별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탄생과 이 세상에 오심과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선물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만약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번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청지기들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고 올바른 삶의 길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경말씀은 우리들에게 무엇이 하나님의 눈에 옳고 그른지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말씀과 비유로 우리가 자기를 건축할 충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신실한 청지기처럼 우리들은 그것을
기억해야만 하며 그것에 따라살아야합니다. 다시말씀드려 여호와가 우리들에게 기대하는 것을 실천하고 그것을 잊지않는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불충한 청지기의 행위가 나옵니다. 그 종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심지어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그종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려 그 불충한 청지기는 자신의 주인이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쩌면 겉으로는 자신의 주위사람들과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주인이 당연히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주인의 대리인으로서 충성을 표하였고  그리고 주인이 믿고 그를 대리인으로 세웠던 사람으로서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흉내를 냈습니다. 어쩌면 일주일에 한번 주일날에 주인의 집에 와서 책임을 다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주인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을 위한 일들만 하였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허락한 직위를 남용하고
악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청지기로 위탁한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가서 일의 대가를
계산해야될지 잘 알았지만 그렇게 살지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되는지 잘 알았고 심지어 그 일을 위탁받고 그 일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이익을 혜택으로 받았지만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이제 주인이 돌아오자 충성된 종은 높임을 받고
불충한 종은 해고를 당하고 주인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않은 사람은 그것을 알지못해 책망받을 짓을 한 사람보다 더 악하다고 합니다.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 48b)

무슨 뜻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진실로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세례로 우리들은 이미
이전부터 우리들을 긍휼히여겨 우리를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선물로 주시려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복음의 섬김으로 불러주셨고 성경으로 우리들에게 삶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셔서 삶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세상에  증거하게 하십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우리의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해야합니다. 기독교인인 우리들에게 믿지않는 자들 보다 더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은 믿지않는 자들 보다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십니다. 성경 두곳을 읽어드립니다.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개역한글판 마 5장)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쌔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개역한글판 마 25장)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청지기입니다. 어떤 새로운 법도 없습니다. 모든것은 성경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합니까? 몇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리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상호간의 적의와 논쟁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용서함을 배워야합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타인을 비난해서는 안될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일어났던 나쁜일들을 잊지맙시다. 이것은 우리들의 인생에 중요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합시다.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의 기도에서 우리들이 용서한다고 하나님께 말하면서 우리가
용서하지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사명은 잘못된 길을 따라 가는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것 입니다.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하는 파멸의 길로 우리의 이웃이 걸어가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제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에게 이야기를 하고 바른 길로 그를 안내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단지 믿음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닐것입니다. 술과 마약에 빠진 사람, 가족 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모든 곳에서 우리들의 사명은 바른 이웃으로서의
증언입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연약한 자들은 우리의 주목을 받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실천적인 도움을 아는 우리 기독교인들보다 다른 사람들이 연약한 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 부자들
성공한이들은 대체로 단지 자신들만을 생각하기에 연약한 이들과의 연대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기쁨은 기독교인의
특징입니다. 세상의 어떤 물질로부터 오는 기쁨은 진짜 기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새 자동차로 새 옷 새로운 모바일 전화기를
가졌을 때 정말 기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역시 사랑과 소망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식의 깊이에서 바르고
뿌리깊은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러한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삶의 중요한 요소인 기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기쁨안에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자신과 이웃과 모든 세상을 위해 간구를 합니다.

우리들 사이에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해 바른 삶을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바른것을 찾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권능이 있으셔서
우리들이 영원히 살도록 그리고 오늘 본문의 충성된 청지기가 칭찬을 받는 것 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날에 칭찬을
받도록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며 힘주실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설교의 결론으로 성경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13 너희끼리 화목하라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1)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개역한글판 살전 5장 13-24절)  Amen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 한인 예배 (2002년 11월 17일)
  • 엡 2:11-22
  • 설교자: 이성춘

021117
설교: 이성춘 목사
본문: 에베소서 2장 11-22, 
제목: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본문>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개역한글판)

<설교>
한국을 떠날 그때는, 저는 30세 초반이었고, 저희 아이들은 4살 그리고 2살이 이었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5년 그리고 독일에서 5년을 살다보니 처음 한국을 떠날 때와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큰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리 아이들이 이제는 12살, 14살 중고등학교 학생이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필리핀 땅을 밟을 그때에는, 낯설게 소리치는 필리핀
사람들이 다 도둑으로만 보여 공항 밖으로 한 발자욱을 더 넘어가지 못하여 마중 나온 선교사님을 만나지 못하고 밤늦은 시간에 2시간
동안 서로 찾아 헤메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필리핀에서도 그리고 이곳 독일에서도 아무런 거끼림이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 외국 생활을 시작하던 그때의 모습과 그리고 이제 지금의 모습에서 큰
차이와 성숙을 보면서 언어의 연수, 문화의 적응, 사역의 전개 등을 통해서 많은 어려움과 역경들을 이기도록 인도하시고 오늘의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숙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본문의 말씀, 11절부터 13절에서, 그때는
그리고 이제는 이라는 말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신분상 큰 차이점이 있고,
그리고 그 사이에는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데, 가로막는 담, 중간에 막힌 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천이나 산으로 지역을 구분하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이쪽 마을과 강 건너 마을은 서로 눈으로도 볼 수 있고, 소리질러 대화를 할 수도
있는 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멀고 먼 동네로 여기고 평생 한번도 건너가보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산 동편과 서편에
있는 두 마을은 거리상으로 정말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딴 나라에 사는 것처럼 왕래도 없고, 그리고 한쪽 동네 아이가
다른 동네를 지나칠 것 같으면 몰매를 맞기도 하면서 서로 낯설은 이방인처럼 살아왔습니다.  하천을 끼고 구분된 동네, 산을 끼고
거리가 있는 동네는 단순히 공간적인 거리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미움 감정과 편견과 그리고 서로가 받은 상처들로
인하여 깊이 페인 골과 간격을 가지고 평생 상종을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14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신 분이고,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신 분입니다.
그리스인들은 당대의 사람들을 그리스인과 바바리안이라는 야만인으로 구분을 하여 자신들을 아주 문화인으로 특권을 가진자로 인정을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한족들만이 세상의 중심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 주변에 있는 나라의 사람들을 오랑케로 여기면서 한국도 동쪽에
있는 오랑케라는 뜻을 지닌 동이로 불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오랫동안 양반과 상놈으로 신분을 구분하여 왔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으로 여기고, 자신들 외의 모든 백성들을 이방인이라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단지
이방인들을 지옥의 연료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 땅에 두었다고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 아이를 낳으면, 연료감이 더
늘어난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이방인과 결혼을 하지 않지만, 혹 결혼하는 사람이 생겨나면,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장례식을 치루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편견은 좀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이 안듭니까 ?  유대인으로
이러한 취급을 받은 이방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좋은 모습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적대감, 원수됨, 벽이 있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담은 양보하지 않고  남편 마음대로 하려는 모습 속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도
부부 사이에도 있습니다. 또한 나눌 줄 모르고 베풀 줄 모르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해 어렵고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도
미움과 원수라는 담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 지역 공간 안에 함께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 사이에도 깊은 문화의 장벽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장벽들을 허물어 주신 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들의 뜰, 이스라엘인의 뜰,
제사장의 뜰, 그리고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고, 각 뜰들은 담과 건물들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1871년에 발견된 돌판에는, 이방인이
경계선인 울타리를 넘어 성전 안으로 들어오면, 돌을 맞아 죽을지라도 자기의 책임, 과실이라는 경고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구분하는 돌담은 견고하고, 그리고 그 결과는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밖의 삶에서도 그
구분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막힌 담, 경계선을 허물어 버린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그 막힌 담을
헐어버렸습니까 ? 인부들을 돈을 주고 사서 헐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로마 유대전쟁을 통해서 로마병사들이 그 담들을
헐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담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허신 분입니다.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원수된 것을 소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화평입니다.

영국이 나은 제 2의 나이팅게일이라는
카펠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독일군에게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을 때, 마지막 하나님과 진리 앞에서 남길 말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죽이는 군인들에게, 이 세상에서 애국심만을 가지고 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에는 카펠의
동상이 있고, 그 동상에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애국심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강으로나 산으로, 그리고
언어나 인종으로 구분된 차이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야합니다. 

5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둘, 곧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새사람은
누구를 가르키고 있습니까 ? 예수님은 화평이시기에 어느 한편, 곧 유대인 편에 서서 이방인을 멸시하지 않으셨고, 또한 이방인의
편에 서서 유대인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F.F. Bruce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들거나,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 3삼의 인물인 그리스도인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주님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후에 예수를 믿는자들이
핍박을 받게 되자 흩어지면서 안디옥에 까지 오게 되어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한 바나바가 목회자로, 그리고 바나나의 초청으로 바울이 함께 목회에 동참한 교회입니다. 이
안디옥교회에서 비로서 처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에서 다수가 소수를 흡수하여
자기의 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하나님의 편이 되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되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 함께 예배드리는 체코인- 한국인 예배공동체도 힘 있는 쪽으로 주도권이 이동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편에 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시에 링컨 대통령이 이끄는 북군이 처음부터 강한
이기는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군의 화력이 더 우세했습니다. 이 때에 링컨 대통령은 각료들과 함께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때에 링컨은 북군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편이 되어달라고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군이던, 북군이던 하나님 편에 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편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연약한 북군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승리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을 가졌다고 자랑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을 페하여,
새로운 율법인 그리스도의 법 곧 사랑의 법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주님은 겞뺐  율법이나 선지자를 페하려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려 왔다궛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페하고 완성한다는 의미는 율법을 폐지시킨 것이 아니라 율법의 잘못된
해석을 고치고 율법의 본래의 의도인 사랑의 법을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법은 원수도 사랑하라는 사랑의 실천으로
요약됩니다.

갈 5, 6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제가 이 말씀을 다르게 설명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도 더 이상 없고,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도 더 이상 없고,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을 자랑하는 기독교인만이 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사랑으로
실천하는 믿음이 아주 중요한 덕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번 2-3일에 걸쳐서 팔레스틴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화평을 저들은 전혀 지켜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도 더
이상 있지 않고 그리스도인만이 존재하여 서로 공존하며 사랑하며 섬긴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요?  그런데 역사는 우리의 기대와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주님 앞에 더욱 엎드려 무릎 꿇는 모습이 되어야합니다. 팔레스타인들이 폭탄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면, 이스라엘사람들은 무장한 군인들을 보내어 돌을 던지며 대항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모습입니다. 이는 이,
눈은 눈 이라는 탈리오 규칙도 지키지 않고 한 사람이 죽으면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일상적인 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팔레스틴 현장에 있지 않지만,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리고 시기하고 경쟁하면서 담을 쌓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보혈로 허물어 버린 담 위에 우리는 또 다른 담을 쌓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  이러한 담들이
높아질 때,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도 그 담 안에 갇히고 맙니다.

16절의
말씀에, 예수님은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했습니다.  그리고 18절의 말씀과
같이 한 성령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습니다. 페르시아 왕국에서는 왕에게 나아가 알현하고 인사를 드리고자 원하는
사람이나,  자기들의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려는 사람들을 왕에게 소개하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관원인데 관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18절의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고 하는 말이 곧 이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곧 왕 앞에서 다른
사람의 소개나 허락을 받지 않고 직접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신분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리를
놓아줄 유력한 사람이 이제는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 기독교인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유력한 사람들입니다.

19
절의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우리는
전에는 외인이고 나그네였는데, 이제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외인은 나라나 고향을 잃어버리고 아직 정착지를
갖지 못하고 찾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나라의 관원들의 판단에 따라 그 나라의 땅을 밝고 살아 가던지 아니면 새로운 다른 나라를
향해 떠나야하는 연약하고 불쌍한 신세의 사람입니다. 나그네는 그래도 조금 상황이 나아서 정착을 하고 서서히 현지의 상황에 적응
해가는 단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외인도 나그네도 타향에서는 서러움에 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정착을 해야했고, 언어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법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외인이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씁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때에는 우리는 강건너 건너편 동네에도 못 갔습니다.
그리고 산 너머 다른 동네도 가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도양과 대서양을 건너 이곳의 유럽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는 강건너 다른 동네의 사람들하고도 말을 건네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독일 사람, 체코
사람, 미국 사람하고도 함께 대화하면서 교제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새로운 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우리들을 서로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며 한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세계화의 현장 속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멀리 이곳 체코에 까지 와서 우리의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 가야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 유럽 땅에서 우리는 더 이상
체코에 있는 한인교회의 교인으로만, 또는 독일의 튀빙엔에 있는 한인교회의 교인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럽의
한인공동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년 5월에 있는 유럽 한인공동체의 신앙 축제에 여러 성도님들도 함께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체코에서 한인공동체에만 속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함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일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체코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저는 정말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정말 귀중한 일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저 자신도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을 중심으로한 독일어 영어 예배를 꿈꾸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포도원 일꾼들의 주의사항

  • 한인 예배 (2002년 09월 22일)
  • 마 20:1-16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0922 (열 일곱번째 삼위일체 주일)
설교자: 다빗 유레흐
본문: 마태복음 20:1-16
제목: 포도원 일꾼들의 주의사항

사랑하는 자매와 형제여러분,


도원 비유의 하나님의 일꾼들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설명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 나오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찾는 집 주인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이었습니다. 일하는 시간은 동쪽에 해가 있을 때 시작해서
해가 서쪽으로 질 때까지 입니다.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집 주인은 일꾼들과 품삯을 협상하였습니다. 구두계약은 유효하며 협상한
봉급을 지불해야 될 책임이 있고 일꾼들은 일을 해야될 책임이 있었다. 데나리온은  서로 협상한 정확한 금액을 나타내며 관례에 따라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포도원 주인은 제 삼시(요즈음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들 시간으로
아침 6 시부터 시간계산을 합니다.)에 다시 장터에 나가 아직도 일이 없어 고용자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발견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새 일꾼들을 불르러 간 이유를 우리들은 모릅니다. 이른 아침에 일꾼들이 충분하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일이 많아서 일꾼들이 더
필요했는지 우리들은 모릅니다. 여기서 그들과 품삯에 대해 협상을 하지 않고 4절에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리라“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첫번째로 온 일꾼들의 품삯을 기준으로해서 약 3/4 데나리온은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포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주인은 제 육시와 제 구시에(요즈음 시간으로 정오와 오후 3시에) 불러서  제 삼시때 고용한 사람들처럼 적당하게 지불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그래서 그들은 1/2이나 아니면 1/4를 받을 것을 상상하였을 것입니다.)


지어 하루가 끝날 무렵인 제 십일시(오후 5시)에도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장터에서 발견을하였습니다. 질문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대답하길: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주인은 그들을 자신의 포도원에
보내면서 품삯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않았습니다. 이들 역시 하루 품삯 가운데 극히 일부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일하는 시간이 한시간이라도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포도원 주인은 세 종류의 일꾼들이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품삯으로 구분하면 1) 한 데나리온 품삯 일꾼들(아침부터 일한사람들), 2) 적당한 품삯을 약속받은 일꾼들(제 삼시,
육시, 구시부터 일한 사람들) 그리고 품삯을 전혀 약속하지 않아 단지 하루 품삯 가운데 일부만 기대하는 일꾼들(제 11시부터
일한 사람들) 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여기서 일꾼 채용에 대한 비유의 첫번째 장면이 끝납니다. 하루 종일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을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는 장면에서 포도원 주인의 선하심이 드러납니다. 비유의 두 번째 장면에서 주인의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저녁이 되는 제 십이시, 하나 둘 뜨는 하늘의 별들은 하루의 일하는 시간이
끝남을 알렸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모든 일꾼들을 먼저 온자들로부터 나중온자들까지 구분하지 말고 모두 똑같이 품삯을
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구약의 율법(레위기 19:13, 신명기 24:15)에 따라 일한 후 저녁에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가장 가난한 자들과 일용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관리 방식이 독특합니다. 직접
일꾼을 찾아다니며 고용하는 사람이 주인이고 단지 품삯을 시키는데로 지불하는 사람이 청지기입니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품삯은 모든 이들에게 지불될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특별히 처음과 마지막에 채용된 일꾼들과 포도원주인이 주연이고 다른 이들은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라마틱한 세개의 관점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우리들에게 이 비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있습니다. 품삯 지불은 제일 나중에 채용된 자들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이 처음이 되었습니다.

모든이들이 한
데나리온씩 똑같이 받았습니다. 한시간 일한 사람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도 똑 같이 받았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임금 지불이었습니다. 나중에 채용된 사람들 보다 더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처음 채용된 사람들이 받은 것보다 실제로 나중에
채용된 사람들이 더 많이 받은 셈입니다. 그래서 처음 채용된 사람들이 주인에게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우리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견딜수 없는 더위에서 하루종일 어떤사람들은 일했고 그리고 어떤사람들은 해가 지는 서늘한 저녁에 단지 한시간을
일했습니다. 그래서 형평성 문제로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법적인 면으로 따지자면 분명히 정의롭지 못하고 우리들의 상식도 그것을
동의하기 힘듭니다.

주인은 매우 부드럽게 대답합니다. 원망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주인은 친구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개해서 그가 포도원의 주인이란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주인은 처음에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였기에
잘못을 하지않았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약속한대로 받았다면 누구도 불평을 할 수 없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자신의 품삯을
받았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뜻대로 그리고 자원해서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 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지불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이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채용된 사람들은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품삯을 받아 돌아갈 수 있지만 자신의 입장 때문에 힘들어 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좋은 마음씨 때문에 질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평을 하면서 질투심에서 자신들만의 성공을 인정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꼴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평함에 대한  의미만을 생각했지 주인의 선한 뜻은 물론 자신의 이웃의 필요에 대해 고려하고 있지않습니다. 한 데나리온도 안되는
품삯으로 그들의 가족이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주인은 선함과 자비함을 베풀었습니다. 주인은 인간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근무시간에 따른 품삯의 차등 지급을 반대하고 일률적으로 지급하였습니다.  처음 채용된 사람과 나중에 채용된 사람들의 차이점이
없습니다. 나중에 일하러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건 없이 일하러 왔습니다. 평가의 순서가 달라졌습니다. 다른 일꾼들과
달리 처음에 특별하게 계약을 하여 채용된 첫번째로 일하러 온 일꾼들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오늘 본문의 비유의 배경은
포도원이 아니라 장터입니다. 장터는 기다림의 장소이며 포도원은 약속된 장소입니다. 장터와 포도원 두 장소를 주인이 연결하고
있습니다. 고용된 일꾼들의 노동시간과 규칙에 대해 우리들은 알지못합니다. 비유에서 일꾼들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 중심부에
있습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가라, 내가 너희들에게 공정하게 주었다. 그러나 무엇이 공정합니까? 여기서 두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공정함과 주인의 공정함입니다. 공정함이란 말에서 우리들은 노동의 시간과 일꾼의 능력에 따른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주인은 그러나 우리들이 상상했던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공정함은 그에게 다른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일꾼들에게 지불한 후 그들이 주인의 일을 평가할 때, 그리고 그들이 주인의 품삯
지불과 고용방식에 불평을 할 때 제일 먼저 주인은 일꾼들의 노동을 평가합니다. 어떻게 불평을 하겠는가라고 주인이 우리들을
꾸짖습니다. 주인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목전에서 나중 온 사람들에게 지불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좋지않은 아들이 분에 넘치게 많이 받은 탕자의 비유를 연상시킵니다. „포도원의 일꾼에 대한“ 이 비유는 „선한 고용주에
대한“ 비유로 이름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포도원 주인은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행위에 대해 ,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에 대해,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그리고 당신의 사랑의 초월적인 권능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꾼 고용은 실제 삶에서 나온 생생한 현실 이야기 같고 일꾼의 품삯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형식화된 이야기 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사람들의 관례와는 다르게 행하셨습니다. 품삯 지불 과정에서 이 주인처럼
행하는 것은 단지 전지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에게 공정성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불공평한 주인의 행위는 실제로 누구에게도 불의를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법적인 공평성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월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잣대는 인간의
잣대와는 완전히 다르기때문입니다.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있는 차별을 꾸짖는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이며 그리고 새롭게 차별을 만드는 인간의 악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이
어떤 공로나 업적 없이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을 감사하지 않을 때 인간의 악의는 나중된 자가
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어떤 권리를 하나님과 흥정을 원하는 사람을 비판합니다. 먼저 고용된 일꾼들의 일이 하나님
나라와의 관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 초청을 받았을 뿐 어떠한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특별히 자신의 종교적인 집착에 대한 정당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러한 정당성으로 다른 이들을 무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위험합니다. 교회에서 우리 모두가 빚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신실함
위에 기초를 둔 우리 모두에게 거울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들의 자기 의와 자기 공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심지어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인간의 자기주장까지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들의 생각과 다른 것은 모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인간의 잣대를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권리의 특징위에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이 있습니다.


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의 법적인 계산과 관습과 관련이 없는 주님이심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행위는 법의 경계를 넘어가며 불의를 향하지
않으며 선한 뜻의 불공평함을 지향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모습으로 하나님은 기분에 따라서 그리고 정의를 왜곡하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랑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사랑은 선행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하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의 자비하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선한 뜻인
자비로 모든 이들에게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품삯은
하나님의 자유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의 행위이며 그래서 구원은 인간의 어떠한 공적보다도 높은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구원 그 이상의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인간들 사이에 구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구원의
하나님의 선물은 모든 이들에게 똑 같습니다. 각 사람마다 공적이 서로 다루지만 모두 똑같이 선물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받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여 그
이상 더 가질 수 없습니다. 한 데나리온을 얕보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부터 멀어지지않도록 모든 사람들이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특별한 품삯을 요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을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구원의 선물의
소유자이시기에 우리들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닌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길 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유롭게 구원의 선물을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모든이들에게 선물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포도원의 일꾼들이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불평할 모든 경우를 경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Amen

2002년 11월 3일

슈토렉 목사는 현재 암으로 투병중이다. 매주 월요일 검진 그리고 화요일 항암치료로 하루 하루를 종말론적인 삶을 살고 있다. 투병중 그의 설교는 더 감동적이다. 가급적 슈토렉 목사에게 더 많은 설교의 기회갖게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건강에 자신이 없어 늘 망설인다. 이종실 목사가 예비적으로 함께 설교를 준비한다. 만약 그가 갑자기 건강문제로 설교를 준비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해서 함께 준비한다.

이날 많은 교인들이 참석하였다. 150석의 좌석이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