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자 욥

  • 연합 예배 (2002년 11월 03일)
  • 욥 42:7-17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21103ek
설교: 슈토렉
제목: 중보자 욥
본문: 욥 42, 7 – 17

<본문>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세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15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설교>
종교대표자들, 데만 사람 엘리바스 그리고 그의 두 친구들이 마침내 입을 다물고 번제를 드리러 욥에게 가야만 합니다.
사탄이 시작한 이 죄의 사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여호와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설명들 사이로 진리의 빛이 스며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종교적인 연설이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거친 간구가 옳았다고 인정 받았습니다.

욥의 위치가 처음으로 현저한 변화를 겪고있습니다.
그때까지 큰 고통으로부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짖는 사람이었으며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공허한 하늘과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곳 가장 깊은 심연과 마주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특별하고 가치 있는 사명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분명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요단 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 하늘로부터 소리 같은 것이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고 예수님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너를 택하여 준비하였고 너는 나의 도구가 되리라. 왜냐하면 이 세상을 위해 너로 간구하게 하길 원하며 그리고 이 세상을 더없이 멋지게 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십니다.

기서 처음에 사탄(사탄은 고발자란 뜻이 있음) 즉 고발자의 말이 나오고 욥기서 마지막에 하나님 자신이 찾은 중보자로서의 욥의
마지막 말이 나오고, 하나님은 욥을 고통을 통해 지옥과 무덤과 같이 인간의 힘이 완전히 소진된 곳에서 그리고 하나님 없이 외로운
곳에서 그의 중보가 모든 능력을 갖도록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할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중보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행복하게 삽니다.
인간의 눈에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질 때 교회는 하나님의 중보의 사명자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애굽의 요셉 같은 욥, 모세 같은 욥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같은 욥은 중보자입니다.
헛되지 않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속에 들어간 첫번째 사람이 스데반 순교자 – 자신의 원수들을 위한 중보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러한 고통을 인내한후 스데반 처럼 중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체코 한국 유럽 아시아 미국의 교회가 모든이들이 보도록 둔, 산 위의 등불처럼 독자적인 사명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십시오.
그 빛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지 세상에 대한 불평과 세상에 대한 잡담 그리고 세상 죄에 대한 말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직후 하나님은 욥의 운명을 바꾸었고 욥이 이전에 소유한 것 보다 모두 두 배를 받았습니다.
   

에게 모든사람들이 돌아오는 이 아름다운 말씀 – 모든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과 전에 알던 모든 사람들 그를 진저리치게 싫어하던
사람들, 그와 이야기 나누길 싫어했던 사람들,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 계속 그에 대해 무언가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 하나님과
사람에게 해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가 지금 욥에게 돌아오고있고 욥은 오는 것을 막지도 그리고 선택적으로
오도록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의 집에서 욥과 함께 음식을 먹기위해 왔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비밀로 이 세상을 위한 아버지 곁에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가 성만찬(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성만찬은 고발과 심판의 시대가 끝남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중보의 능력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모든이들이 그리고 모든이들이 그리고 또 모든이들이 성만찬의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중보가 완전히 승리하는 그곳에 누구도 허물을 찾을 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 금 한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그에게 선물하였습니다.
이렇게 슬퍼하며 위로하자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에 저주받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상황이 다 끝난 지금 욥과 연대를 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인간의 유대는 앞서 하나님이 먼저 인간의 운명을 변화시킨 그곳에서 시작됩니다.
자, 거기에 모든이들이 모였습니다. – 주의 식탁이 좀 이상합니다. – 모두 죄인들이 둘러앉아있습니다.
욥에게 사람들이 몰려오고 각기 다른 선물을 들고왔습니다.
주의 만찬 직전에 우리들도 봉헌시간을 갖습니다.
봉헌과 성만찬이 이렇게 관련되어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기쁨으로 예물을 가지고옴으로써 이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암나귀 양 소 약대와 기타 짐승떼들이 있습니다 – 그 주 하나님이 능력을 펼치시어 여기서 사탄의 종교적인 숫자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욥은 처음처럼 일곱아들과 세딸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아들의 이름은 없고 딸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적이지 못합니다.
동양에서 여자들은 양지의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언가 시작하는 곳 거기서 모든 것이 변화하고 그리고 거기서 욥의 딸들인 여자들이 이름을 갖습니다.
모두 의미있는 이름들입니다.
예를들어 비둘기, 육계향, 화장할 때 쓰는 작은상자 입니다.
아름다운 이름들은 실용적이 못합니다.
예를들어 돈까스 접시, 좋은 요리사 등 등입니다. (번역자- 체코의 이름가운데 예를 든 것)
주 하나님은 비실용적이고 장식적인 것에 대해 의미를 가집니다.
동방정교회와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성화들이나 향들 이런 것들 없이 검소해야 된다는 개혁교도들의 전통에서 이러한 장식에 거부감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모든 축복 위에 축복을 하시고 욥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딸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이름을 썩 좋아하지 않을 지라도 주 하나님께 우리들이 세례받을 때 귀하게 귀하게 불려지는 우리의 이름을 들으시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장식이 된 것 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마치 자신의 얼굴을 우리들에게 그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모세의 얼굴이 변한 것 같이 우리들은 이제부터 변화된 얼굴을 가지고 갑니다.
어떤 성령파들 처럼 눈을 부릅뜰 필요가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일하심이 그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 그에 대해 여러분들은 아실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들에게 아들들 처럼 유산을 주었다고 덧붙입니다.
딸들에게 유산을 주는 이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특별한것입니다.
아낌없이 베푸는 아버지입니다.
아낌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아낌없이 베푸는 하나님의 특징을 세상속에서 드러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낭비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욥은 그 후에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습니다.
이로써 영광의 조상들과 결합됩니다. 욥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그에대해서 듣는 사람은 욥처럼 구원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후손을 보았습니다.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습니다.
아들도 손자도 없는 사람들, 육신의 후손으로 어떠한 미래도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식탁을 함께 한 수 소망을 가진 자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욥이 기한이 차서 죽었습니다 – 아름다운 욥의 생애의 이야기입니다.

주 늙어서 오래되어 그리고 기력이 쇠진하여 고통스럽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질적으로 만족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완벽한 성취를 이룬 생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기한이 찬 죽음을 맞이하기에 죽음을 만족하게
맞이합니다. (번역자-체코어로 기한이차다는 단어와 배가 부르고 만족하다는 단어가 어원이 같다.  그래서 기한이 찼다는 뜻은
만족하다는 의미로 이해가 가능하다.) 아멘 (Amen)

욥의 믿음

  • 연합 예배 (2002년 10월 06일)
  • 욥 11:1-3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21006ek
설교: 슈토렉
제목: 욥의 믿음

<본문>
Job 11,1-3  +  12,1-4  +  13,2-3+14-15  +  19,25-27

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3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개역한글판 욥 11장)

1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3 나도 너희 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개역한글판 욥 12장)

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개역한글판 욥 13장) 14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개역한글판 욥 13장)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개역한글판 욥 19장)

<설교>
왜 이들 종교지도자들이 이처럼 분노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욥의 대답에 불쾌해서 이토록 심한 말을 뱉습니다: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욥의 대답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하나님을 비웃는 것 처럼 들려 이와 같은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왜 성경에 이런 욥기서가 들어있습니까?
욥기서는 극단적이고 자극적입니까?
믿음과 신에 대한 모독이 뒤섞여 있습니다..
욥의 세친구는 문화의 세가지 영적인 전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각의 전통은 고난에 대해 각 각의 자신의 해결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전통들은 경륜이 있고 그 전통들의 대표들은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았고 그리고 그들은 존경 받는 유대 신앙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욥을 도우려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받는 욥을 도우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욥이 그들의 도움을 원치 않고 있는것입니다.
정말 욥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격한 말로 무엇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습니까?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다. 12:2-3a)
그렇습니다, 욥기서는 믿음에 대해 매우 개인적이고 극단적인 논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종교적으로 그리고 교회 생활적으로 교리교육적으로 배우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생각을 주장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13:2)
욥은 그의 논쟁이 피부 속으로 파고들어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 종교 지도자들의 신앙심 깊은 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13:12)
무엇을 누가 힘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할것인가!
누가 감히 불의와 고통과 우겨쌈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가!
우리들은 왜 욥이 그렇게 말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그는 나의 구원이 되리라(13:13-16)
욥은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욥에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이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욥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문제인것입니다.
그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욥의 문제이며 놀라운 비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문제이자 이것은 곧 동시에 하나님의 문제인 것입니다.
달리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욥기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마지막 고통의 종지부를 찍으실때 드러날 큰 비밀에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물론 그 비밀 가까이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도 있어야 합니다.
그 비밀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사람의 종교전통 가운데 가장 좋은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밀에 가까이 다가가기위해 큰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멀어지게 될 때 어떤 것도 마지막까지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을 돕지 못합니다.
어떤 신학적인 논쟁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종교적 전통의 역사적 위기까지 견디는 것을 돕지못합니다.
영적 전문가들이 남용하는 언어들을 참는 것 또는 참지않는 것을 돕지못합니다.
그것을 포기하는것과 지속하는 것을 돕지못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돕지못합니다.
새로운 시작과 갱신과 부활의 선물을 받는 것을 돕지못합니다.

바닥까지의 추락과 폐허의 고통과 방황하는 의식이  살을 째는 듯한 고통을 일으키고 억눌림을 당하는 것같습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19:25)
때론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의 생명 위에, 우리들의 사명 위에, 우리들의 존재 위에, 우리들의  모든 선행들 위에 서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잿더미 위에 서 계십니다.
거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생명력 없는 교훈과 가르침과 달리, 유럽과 미국 기독교 전통과 달리 우리들은 지금 이시간에 체코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잿더미로 그리고 처음 출발로 내려가고있습니다.
우리는 잿더미-상실을 겪는 것을 감행하여야 하며 그리고 많은 것을 잃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욥이 : 구원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재 위에 서실 것이라 한 것을 욥처럼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위기는 우리들에게 축복입니다.
모든 위기와 함께 위기를 겪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시대의 마지막 때 까지 말입니다.

나의 이 가죽 이 살덩이가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19:26-27)

가죽과 살이 없는 사람은 이미 지옥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여기서 오직 성령의 기적만이 도울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이 때의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이 고통 받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인간 존재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저항으로 동시에 어린이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욥은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인간 존재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비밀이 밝혀지는 그 자리까지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이 곧 삶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원래 누구에 의해 결정됩니까?
고통이 없는 성공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래되고 좋고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현재의 그분이 미래의 그분이고
미래의 그분이 현재의 그분입니다.
유명하지 않고 그러나 동일하신, 우리들이 들었고 그리고 살아계시고 그리고 스스로 있는 분이며 결국 우리들의 유일한 이야기인 우리 각자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욥의 믿음은 그의 저항으로 널리 전파되고있습니다.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 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19:27)“ 이러한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생생하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야 합니다.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19:27): 삶에 대한 갈망의 작은 불꽃이 우리 안에서 연기를 내고 큰 불을 일으키게 합시다:

적들이 정의로운 종교의 이름으로 욥을 반대하고 예수를 반대할 것이며 어떤 잘못을 찾으려고 할것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그에게 전가시키려고 할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자신들의 종교적인 견해를 폐기하지 않기 위하여 (잘못을 욥에게 전가시키려고 할것입니다.)
외견상의 종교적인 안정과 기관과 그들의 대표자들의 존경 위에 자신들의 정당함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욥은 예수님처럼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찌니라(19:29)
욥은 우리들에게 새롭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강한 담대함과 소망으로 예수를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AMEN

까를린 수해 봉사 활동을 다녀와서

까를린 수해 봉사 활동을 다녀와서…

이번 홍수가 100년만의 홍수라고 들었다. 다른 시각에선 800년만의 대홍수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고 들은 바 있지만 솔직히 나에겐 그리 큰 관심은 없었다. 더 그런 것이 그 때 나는 여기에 없었고 이웃나라인 폴란드에 있었을 때였다. 폴란드 경우는 비로인한 아무런 피해가 없었고 텔레비전과 신문지상으로만 체코와 독일쪽에 큰 홍수가 났다고 연일 기사화가 되긴 했는데 나로선 단지 그 순간만 남의 일인양 혀를 찼을 뿐 단지 일상의 뉴스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후에 내가 다시 프라하로 돌아왔을때는 이미 비는 다 멎은 상태고 남은 건 그로인한 많은 재산피해와 아픈 상처들… 듣기로는 인명피해도 있었다고 했다. 기차역에 도착해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는데 출입금지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순간 생각한 것은 수해를 당한 그들을 생각하기 전에 단지 나의 불편함을 먼저 떠올렸다는 것에 수해지역을 다녀온 뒤 필자는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내가 수해복구 봉사활동에 참여한 계기는 자발적이였으면 좋으련만 부끄럽게도… 목사님을 비롯 체코인 봉사자들과 한국인 4분이 승합차를 타고 수해 입은 한 마을로 진입했을 때 그 거리의 광경만 보고도 적지 않은 충격을 느꼈다. 정말 없는 것 조금 더해서 전쟁터의 뒷모습을 보는 듯했다. 수해를 입은 지역을 한국에서도 본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도착해서 도울 장소는 주택가의 아파트 단지였는데 1층 모두가 천정까지 물에 잠겼던 흔적이 보였다. 우린 장화를 신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장갑을 끼고 망치와 정과 곡괭이로 온 벽들을 뜯어내는 일. 그대로 두면 집이 썩어간다니… 내가 도왔던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사시던 곳이었는데 그 분들과 함께 종일 벽을 때리고 깨고 하는 일의 연속. 솔직히 나는 오후 정도에는 집에 가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 두 분은 몇 날 몇 일을 계속 일하였고 또 앞으로도 계속 해야 되는데 그러면서도 놀라웠던 것은 그 노부부의 얼굴에는 짜증이나 걱정스러움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에 나로서는 또 한번의 충격이었고 그들의 마음과 표정이 나에게 귀중한 가르침과 교훈을 주었다는 거. 예상치 못했던 변화와 두려움을 맞아 어떤 이는 주저 앉아 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 변화와 두려움에 당당히 맞서 결국엔 다시 일어난다. 후의 일들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노부부는 잘 참아내고 이겨내어 다시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을 거라 믿는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노부부가 우리에게 “감사하다.” “고맙다.”고 했다. 나도 “당신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했다. 더 열심히 도왔어야 했는데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그렇게 떠나오는 나의 마지막 심정은 타국의 남의 민족이 아닌 바로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생각이 들어 죄송하고 가슴 한 켠으로 마음이 저려왔다. 어느 평범한 농사꾼이 책을 펴낸 적이 있었다. 제목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요즈음 우리 살아가는 모습들을 볼 때 필자는 주제 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만 잘 살면 되지 하며 살아가는게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고 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권력과 금력과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나눔이고 또 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며 길고 짧고 잘나고 못난이들이 나누며 어우러져 아름답게 자연스럽게 살아갔음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도 역시 나눔을 정을 모르며 살아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이 부끄럽고 더욱 더 나를 되돌아보며 숙연하게 하는 의미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부디 많은 수재민들이 하루 빨리 그들의 온전한 삶 속으로 되돌아 가길 진심으로 빌며…

부끄러운 봉사자 유 수 영 <찬양대 지휘자>

자기 비움의 선교

21세기 한국선교의 나아갈 길 – 자기 비움의 선교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다. 이 명제를 교회가 얼마나 신실하게 따르고 있는가? 아무리 전혀 다른 시대가 도래한다고 할지라도 이 질문을 선교하는 교회가 자기를 비추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선교에 대한 교회의 신실성을 어떻게 가늠할 것인가? 그 잣대가 무엇인가? 선교사의 파송 숫자? 설립 교회 숫자? 세례교인 숫자? 선진화된 교회선교 정책? 선교사 복지의 선진화 정도? 만약 이러한 요인들이 잣대가 된다면 지금 선교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우리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선교 정책과 선교사 복지를 갖춘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서구 개신 교회와 그 선교단체의 선교의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구체적인 근거와 통계를 가지고 기독교의 소수 종파로의 전락에 대한 서구 선교 학자들의 예측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오직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자긍심을 가질 만 하다. 그러나 자긍심과 교만은 구별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경계를 넘어갔다. 십자가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선교를 수행 하는 교회에게 무슨 의미인가? 자기를 버림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버림이 바로 선교에 대한 교회의 신실성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기 버림은 하나님의 파송을 위탁 받아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와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 사이에 하나님의 일을 함께 수행한다는 신뢰를 형성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을 대신 해서 파송한 교회와 파송 받은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든다는 연대의식과 신뢰보다 더 근본 되는 선교정책과 지원은 없다. 총회의 선교 정책과 행정의 선진화 노력도 이 연대와 신뢰 형성을 목표로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가 깊어질수록 선교를 위한 연대의식과 신뢰가 더 폭 넓고 깊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선교사는 자신의 사명을 마치는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비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연결들이 완전히 단절된 생면부지의 오지에 파송된 선교사는 말하는 법과 생활 방법을 유치원 학생처럼 처음부터 새롭게 배워야 한다. 이 기간은 마치 수족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오직 뇌의 활동만 정상적인 불구자로 자기 자신이 느껴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노력 없이 정상적인 성격과 인격을 갖추어가기가 쉽지않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 가야 한다. 특별히 선교활동의 분야가 더욱 그렇다.  실패와 좌절 그리고 절박함과 기적들로 꽉 찬 일터와 현장은 선교사에게 용기와 희망이자 동시에 유혹이기도 하다. 자기 자랑이 될 수 있는 이러한 선교 현장 보고는 최대한 절제하고, 대신 부족하게 느낄 수도 있는 현지 교회와 신학이 자신의 선교현장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이것을 한국교회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부름심의 그 자유로 자신의 동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한국교회의 21세기 선교를 꿈면서…
<장로교 여성신문 기고>

[살며 생각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지사지를 풀어 설명하면 “처지를 바꾸어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본다”는 뜻이다. 최근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체코 일간지들의 보도를 접하면서 떠오른 말이다.

9월 17일 북일 정상들이 처음 만났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 민간인 납치문제에 대해 “참으로 불행한 일로서 솔직히 사과”를 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일제 식민지 역사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양 국가 개선을 위한 정상들의 첫 만남의 의미와 그 미래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민간인 납치 사망문제로 일본열도가 들끓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 일본열도의 분위기는 같은 날 체코 일간지를 통해 중부 유럽의 조그마한 나라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경제신문만 양 국 정상회담을 “일본 총리 KLDR 첫 방문”의 제목으로 비교적 객관적인 보도를 한 반면 인민일보, 드네스 등은 각 각 “KLDR 일본 민간인 납치 인정하다.” “김정일 인정하다: 우리가 일본인들을 납치하였다”의 제목으로 일본언론의 시각을 복사하여 전해주었다.

일방적인 감정을 보도하는 이 기사들을 접하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일본 시민들로 무고하게 가족을 잃은 자들의 아픔이 있게 한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20세기의 반 문명과 그 야만성을 드러냈던 일본 군국주의와 일본열도 안에서는 일개 사병에 불과하지만 바다를 건너기만 하면 천황의 군인으로서 무한대적인 우월의식으로 온갖 만행을 자행했던 그 때 그 역사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종군 위안부로 아름다운 인생의 꿈을 접고 질기디 질긴 명줄을 끊지 못해 여지껏 생존해 있는 우리 할머니들의 눈물이 떠오르면서 일본의 입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체코 일간지들의 시각에 대한 분노였다.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인들의 입장을 전하는 체코 일간지의 기자들의 시각은 일본 언론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다른 한편 공산주의에 대한 우파 체코 언론들의 말초 감각적인 혐오감을 그 배경으로 하고있다.

작은 나라 체코는 언제나 주위의 강대국들의 흥정거리였다.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뀌어왔다. 체코 언론들이 그 불운의 역사를 기억하며 북한과 일본의 정상회담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생생한 가까운 이데올로기 경험이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의 대상으로서 약탈과 강탈을 당한 옛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수덴 독일인들의 초법적이고 폭력적인 베네쉬 독트린 철폐와 재산환수 요구에 대해 히틀러의 야만성을 회상 시킨 체코 언론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아니면 어느새 체코언론들은 테러리즘으로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감추어 보려는 세태에 물들어버린 것인가?
<나눔터 2002년 10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