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 한인 예배 (2002년 11월 17일)
  • 엡 2:11-22
  • 설교자: 이성춘

021117
설교: 이성춘 목사
본문: 에베소서 2장 11-22, 
제목: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본문>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개역한글판)

<설교>
한국을 떠날 그때는, 저는 30세 초반이었고, 저희 아이들은 4살 그리고 2살이 이었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5년 그리고 독일에서 5년을 살다보니 처음 한국을 떠날 때와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큰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리 아이들이 이제는 12살, 14살 중고등학교 학생이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필리핀 땅을 밟을 그때에는, 낯설게 소리치는 필리핀
사람들이 다 도둑으로만 보여 공항 밖으로 한 발자욱을 더 넘어가지 못하여 마중 나온 선교사님을 만나지 못하고 밤늦은 시간에 2시간
동안 서로 찾아 헤메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필리핀에서도 그리고 이곳 독일에서도 아무런 거끼림이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 외국 생활을 시작하던 그때의 모습과 그리고 이제 지금의 모습에서 큰
차이와 성숙을 보면서 언어의 연수, 문화의 적응, 사역의 전개 등을 통해서 많은 어려움과 역경들을 이기도록 인도하시고 오늘의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숙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본문의 말씀, 11절부터 13절에서, 그때는
그리고 이제는 이라는 말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신분상 큰 차이점이 있고,
그리고 그 사이에는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데, 가로막는 담, 중간에 막힌 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천이나 산으로 지역을 구분하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이쪽 마을과 강 건너 마을은 서로 눈으로도 볼 수 있고, 소리질러 대화를 할 수도
있는 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멀고 먼 동네로 여기고 평생 한번도 건너가보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산 동편과 서편에
있는 두 마을은 거리상으로 정말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딴 나라에 사는 것처럼 왕래도 없고, 그리고 한쪽 동네 아이가
다른 동네를 지나칠 것 같으면 몰매를 맞기도 하면서 서로 낯설은 이방인처럼 살아왔습니다.  하천을 끼고 구분된 동네, 산을 끼고
거리가 있는 동네는 단순히 공간적인 거리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미움 감정과 편견과 그리고 서로가 받은 상처들로
인하여 깊이 페인 골과 간격을 가지고 평생 상종을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14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신 분이고,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신 분입니다.
그리스인들은 당대의 사람들을 그리스인과 바바리안이라는 야만인으로 구분을 하여 자신들을 아주 문화인으로 특권을 가진자로 인정을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한족들만이 세상의 중심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 주변에 있는 나라의 사람들을 오랑케로 여기면서 한국도 동쪽에
있는 오랑케라는 뜻을 지닌 동이로 불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오랫동안 양반과 상놈으로 신분을 구분하여 왔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으로 여기고, 자신들 외의 모든 백성들을 이방인이라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단지
이방인들을 지옥의 연료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 땅에 두었다고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 아이를 낳으면, 연료감이 더
늘어난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이방인과 결혼을 하지 않지만, 혹 결혼하는 사람이 생겨나면,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장례식을 치루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편견은 좀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이 안듭니까 ?  유대인으로
이러한 취급을 받은 이방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좋은 모습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적대감, 원수됨, 벽이 있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담은 양보하지 않고  남편 마음대로 하려는 모습 속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도
부부 사이에도 있습니다. 또한 나눌 줄 모르고 베풀 줄 모르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해 어렵고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도
미움과 원수라는 담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 지역 공간 안에 함께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 사이에도 깊은 문화의 장벽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장벽들을 허물어 주신 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들의 뜰, 이스라엘인의 뜰,
제사장의 뜰, 그리고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고, 각 뜰들은 담과 건물들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1871년에 발견된 돌판에는, 이방인이
경계선인 울타리를 넘어 성전 안으로 들어오면, 돌을 맞아 죽을지라도 자기의 책임, 과실이라는 경고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구분하는 돌담은 견고하고, 그리고 그 결과는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밖의 삶에서도 그
구분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막힌 담, 경계선을 허물어 버린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그 막힌 담을
헐어버렸습니까 ? 인부들을 돈을 주고 사서 헐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로마 유대전쟁을 통해서 로마병사들이 그 담들을
헐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담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허신 분입니다.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원수된 것을 소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화평입니다.

영국이 나은 제 2의 나이팅게일이라는
카펠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독일군에게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을 때, 마지막 하나님과 진리 앞에서 남길 말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죽이는 군인들에게, 이 세상에서 애국심만을 가지고 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에는 카펠의
동상이 있고, 그 동상에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애국심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강으로나 산으로, 그리고
언어나 인종으로 구분된 차이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야합니다. 

5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둘, 곧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새사람은
누구를 가르키고 있습니까 ? 예수님은 화평이시기에 어느 한편, 곧 유대인 편에 서서 이방인을 멸시하지 않으셨고, 또한 이방인의
편에 서서 유대인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F.F. Bruce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들거나,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 3삼의 인물인 그리스도인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주님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후에 예수를 믿는자들이
핍박을 받게 되자 흩어지면서 안디옥에 까지 오게 되어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한 바나바가 목회자로, 그리고 바나나의 초청으로 바울이 함께 목회에 동참한 교회입니다. 이
안디옥교회에서 비로서 처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에서 다수가 소수를 흡수하여
자기의 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하나님의 편이 되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되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 함께 예배드리는 체코인- 한국인 예배공동체도 힘 있는 쪽으로 주도권이 이동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편에 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시에 링컨 대통령이 이끄는 북군이 처음부터 강한
이기는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군의 화력이 더 우세했습니다. 이 때에 링컨 대통령은 각료들과 함께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때에 링컨은 북군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편이 되어달라고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군이던, 북군이던 하나님 편에 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편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연약한 북군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승리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을 가졌다고 자랑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을 페하여,
새로운 율법인 그리스도의 법 곧 사랑의 법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주님은 겞뺐  율법이나 선지자를 페하려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려 왔다궛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페하고 완성한다는 의미는 율법을 폐지시킨 것이 아니라 율법의 잘못된
해석을 고치고 율법의 본래의 의도인 사랑의 법을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법은 원수도 사랑하라는 사랑의 실천으로
요약됩니다.

갈 5, 6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제가 이 말씀을 다르게 설명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도 더 이상 없고,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도 더 이상 없고,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을 자랑하는 기독교인만이 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사랑으로
실천하는 믿음이 아주 중요한 덕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번 2-3일에 걸쳐서 팔레스틴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화평을 저들은 전혀 지켜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도 더
이상 있지 않고 그리스도인만이 존재하여 서로 공존하며 사랑하며 섬긴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요?  그런데 역사는 우리의 기대와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주님 앞에 더욱 엎드려 무릎 꿇는 모습이 되어야합니다. 팔레스타인들이 폭탄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면, 이스라엘사람들은 무장한 군인들을 보내어 돌을 던지며 대항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모습입니다. 이는 이,
눈은 눈 이라는 탈리오 규칙도 지키지 않고 한 사람이 죽으면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일상적인 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팔레스틴 현장에 있지 않지만,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리고 시기하고 경쟁하면서 담을 쌓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보혈로 허물어 버린 담 위에 우리는 또 다른 담을 쌓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  이러한 담들이
높아질 때,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도 그 담 안에 갇히고 맙니다.

16절의
말씀에, 예수님은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했습니다.  그리고 18절의 말씀과
같이 한 성령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습니다. 페르시아 왕국에서는 왕에게 나아가 알현하고 인사를 드리고자 원하는
사람이나,  자기들의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려는 사람들을 왕에게 소개하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관원인데 관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18절의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고 하는 말이 곧 이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곧 왕 앞에서 다른
사람의 소개나 허락을 받지 않고 직접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신분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리를
놓아줄 유력한 사람이 이제는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 기독교인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유력한 사람들입니다.

19
절의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우리는
전에는 외인이고 나그네였는데, 이제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외인은 나라나 고향을 잃어버리고 아직 정착지를
갖지 못하고 찾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나라의 관원들의 판단에 따라 그 나라의 땅을 밝고 살아 가던지 아니면 새로운 다른 나라를
향해 떠나야하는 연약하고 불쌍한 신세의 사람입니다. 나그네는 그래도 조금 상황이 나아서 정착을 하고 서서히 현지의 상황에 적응
해가는 단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외인도 나그네도 타향에서는 서러움에 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정착을 해야했고, 언어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법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외인이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씁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때에는 우리는 강건너 건너편 동네에도 못 갔습니다.
그리고 산 너머 다른 동네도 가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도양과 대서양을 건너 이곳의 유럽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는 강건너 다른 동네의 사람들하고도 말을 건네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독일 사람, 체코
사람, 미국 사람하고도 함께 대화하면서 교제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새로운 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우리들을 서로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며 한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세계화의 현장 속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멀리 이곳 체코에 까지 와서 우리의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 가야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 유럽 땅에서 우리는 더 이상
체코에 있는 한인교회의 교인으로만, 또는 독일의 튀빙엔에 있는 한인교회의 교인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럽의
한인공동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년 5월에 있는 유럽 한인공동체의 신앙 축제에 여러 성도님들도 함께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체코에서 한인공동체에만 속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함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일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체코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저는 정말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정말 귀중한 일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저 자신도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을 중심으로한 독일어 영어 예배를 꿈꾸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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