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일, 우리의 일

  • 연합 예배 (2002년 03월 03일)
  • 요 2:13-22
  • 설교자: 이종실

02/03/03(사순절 세번째주일)
본문: 요한복음 2:13-22


늘 복음서는 엄격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청결 이야기 입니다. 요한복음에 그 성전청결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첫번째 여행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대절기인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가셨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유월절 축제를 통해 매년 자신의 백성을 구원한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기억하고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갈 때 성전 뜰이 상업지역으로 바뀐 것을 보았습니다.


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던 그날 축제의 찬송을 부르며 경건하게 성전으로 들어갈 수 가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장사꾼들의 임시로
지은 조그마한 판매건물과 가판대 사이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장터는 성산 맞은편 올리브산에 열리게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짐승 파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의 그 행위를 반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짐승을 팔는 사람들은 장거리 여행을
하며 이 유월절 축제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성전 가까운 곳에서 짐승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환전하는
사람들 역시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나 다른 나라의 돈으로 헌금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로마
황제나 다른 통치자들의 그림이 있는 동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십계명은 그러한 다른 그림이 있는 돈을 헌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환전하는 사람들은 율법이 금하는 돈을 유대인의 법이 허락하는 돈으로 바꾸어주고 있습니다. 가축을 파는 사람들이나
환전하는 사람들이 일을 잘하면 그들의 일은 올바른 유월절 축제에 기여하는 일이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축파는 사람들과
환전하는사람들의 그 일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 장사행위를 하는 장소에 대해 공분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 안을
장터로 만든 것을 예수님은 싫어하고 계십니다.

한 성서학자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신을 지지하던 사업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영업을 허락한 그 년도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가야바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사업가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지지하는 사업가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확실하게 챙겨줍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던 그 해에 가야바의
결정이 내려졌다면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영업을 하던 사업가들에 매우 엄격하게 반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것입니다. 영업은
사업가들의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야바도 자신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일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 성전에서 이와 같은 세가지 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못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는 순종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 때문에 당시 사회질서와 권력의 구조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은 무슨 권한으로 당시 성전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그의 권한이 로마의 황제로부터 인지
아니면 빌라도로부터 부여 받은 것인지 질문합니다. 누가 장사하는 일들을 방해할 권한을 그에게 주었는가?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성전 안
영업방해 행위 허락서를 요청하였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문서를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의 전통에 따라 그들에게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청중들은 언제나 성전에 대한 그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수님의 제자들도 그리고 예수를 반대한 자들도 성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성전건축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성전을 자신의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사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부활
사건을 예고하고있습니다.

부활의 선언은 예수의 반대자들의 권력과 상업주의자들의 권력과 모든 권력구조에 도전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우상 숭배임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코 공화국에 좌파정부가 통치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엘 살바드로에서는 우파 정부가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남미에 있는
그 조그마한 나라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로메로“ 라는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불의한 우파 권력에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로메로는 자신의 생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암살특공대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1980년 3월 제단에서 성만찬을 집례하는
중에 총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 세상의 가치들이 어떻게 성만찬에 위협이 될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로메로 대주교로부터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일의 현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들이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더 넓은 시각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의 노력과 우리들의 비젼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애동안 우리들은 단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아름다운 사역의 조그마한 한 부분만을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뉴스도 모든 것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누구도 완전히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지못합니다.
어떠한 신앙고백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결과를 가져오는 어떠한 목회자의 심방도 없습니다. 교회의 전도와 봉사를 충족시키는
어떠한 선교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어떠한 목적도 목표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젠가 자라날
씨앗을 심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 안에서 심은 씨앗에 물을 뿌립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필요한 모퉁이 돌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노력이 우리들의 능력 이상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없지만 우리들은 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무엇인가 시도하도록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잘 하도록 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하는 하나님의 일이 불완전할 지라도 그것은 시작이며 우리들의 하나님의 일은 한걸음씩 더 멀리 전진할 것이며,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결과를 전혀 모른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포도원의 일꾼과 창조자의 차이점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꾼이지 창조자가 아니며 우리들은 신도들이지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예언자들이지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일하신 것 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일해야 합니다. 아멘

자신을 버리사

  • 한인 예배 (2002년 02월 24일)
  • 엡 5:1-8
  • 설교자: 이종실

02년 02월 24(사순절 두번째 주일)
본문: 에베소서 5:1-8절
제목: 자신을 버리사

<공동기도>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 기간에
대속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설교>

순절 기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새롭게 묵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렸다” 고 초대 교회가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의 십자가 처형을 받아야 했는지,
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님의 용서의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의 노예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그
주님의 구원은 공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그 구원을 은이나 금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입은 자녀” 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희생 제물을 받아주셨습니다.
그의 희생은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리들은 인생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얻을 수 없음을 알고있습니다. 이 조그마한 공동체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원합니다만 혼자 힘으로 그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얼만큼 자발적으로 희생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교회의 건설이 결정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실천과 자기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은 이 교훈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이 사랑이 그래서 우리들이 범사에 감사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오늘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의 삶에 늘 감사함이 떠나지 않는
다면 여러분들은 그리고 우리 교회는 지금  예수님의 희생과 은총 가운데 살고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감사가 없고 불평과 불만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 차 있다면 지금 우리들은 우리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신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과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잊는 자녀는 이미 자녀가 아니듯이 그리고 아내의 사랑을 잊는
남편 – 남편의 사랑을 잊는 아내는 이미 부부가 아니듯이 우리들이 그리고 교회가 우리를 구원 하시고자 하는 그 주님의 뜻과 그의
고난과 희생과 사랑을 잊는다면 우리는, 우리 교회는 이미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순절에
주의 은총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표현해야 될 것 입니다.

어떻게 감사를 표현할 것인가? 바로 전도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에게 우리 주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이신지 고백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될 것 입니다. 전도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속담에 자식자랑이나
남편과 아내자랑 하는 사람은 반쪽인간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들 정서에 내놓고 자식자랑 남편 또는 아내자랑 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정말 좋으면 “나는 팔푼이라도 좋다.” 상관하지 않고 자랑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수연이가 현대체조에서 2등을 해서 은메달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체코 한인역사에 이렇게 체코전국대회에서 한국인이 입상한 것은 처음 있는 경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들은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상을 받은 그 사실 보다 말 다르고 낯선 곳에서 꿋꿋이 살아가 주는 딸 자식이 그냥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연이 어머님은 딸 자식을 자랑하고 싶어 어쩔 줄 을 모르는 것이 얼굴에 씌여있었어요.


리가 예수님의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면 이렇게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프라하에 사시면서 교회 다니지
않는 많은 체코의 한국 교민들에게 그 동안 몇 번이나 예수님 자랑을 해보셨습니까? 솔직히 예수님 자랑하기가 조금 민망스럽게 느낀
적은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서 살지 못하니 예수님 자랑할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까?

해외생활이 만들어내는 우리들의 삶의 양태가 있는 데 그 중에 하나가 자기 과시하는 것입니다.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자기 자랑 아니면 남 흉보는 것입니다.

흉보는 것은 결국 자기 자랑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가만히 보면, 사람들에게 은근히 이곳에 오래 살았다는 과시를 저도 모르게
합니다. 이제 갖 온 분이 체코에 대해 혼자 모든 것을 아는 척 하는 것을 보면 “너는 그 동안 뭐했냐?” 하는 소리로 들려 괜히
무시당하는 것 같아 은근히 부아가 납니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는 이야기 까지 죽 자랑 삼아 늘어놓습니다. 나를 인정해달라는
뜻입니다.

고린도교회에 고린도로 이주해서 오래 살던 유대인들이 외부에서 선교한다고 갖 온 사도 바울이 설쳐대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면서 사도 바울을 평가절하 합니다. “바울의 편지는 무게도 있고 단호하기도
하지만 막상 대해 보면 그는 약하기 짝이 없고 말하는 것도 별 것 아니다.”(고후 10:10)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비판하는
의도는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참으로 인정
받을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 주시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고후 10:17-18) “내가
여러분들 처럼 구태여 자랑하라고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고후 11:30)

우리가 주님을 자랑한다는 것은
나의 약점 나의 부족한 점 나의 죄가 주님의 고난과 희생으로 우리들이 거룩하게 된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어두움이지만 이제 주 안에서 우리의 존재는 빛입니다.” (엡 5:8) 주님을 자랑한다는 것은 그리고 주 안에서 내 약점을
자랑한다는 것은 어두움의 자녀의 삶의 모습에서 빛의 자녀의 삶의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변화는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신비하게 변화했던 것 처럼 종교적인 신비한 능력이 임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변화가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가 되고 불행한 자가 행복한 자로 그리고 불치의 병자가 고침을 받은 기적이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변화는 우상숭배자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그 변화가 외향적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 입니다. 즉 음행하던 자, 온갖 부정직한 자 그리고 탐욕스러운 자 이 죄인의 모습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교양과 예의가 있는 삶의 차원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음을 자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아직도 결별하지
못한 음행과 부정직과 탐욕의 우상숭배자의 삶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5:6) 권면 합니다. 불행하게도 이론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존재들이 된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빛 된 존재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행과 온갖 거짓과 탐욕의
우상숭배자의 삶을 극복하는 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사랑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버리는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를 복음을 자랑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빛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그의 동시대인에게 당시의 더욱 타락한 세대에 대해 이렇게 상기시켰습니다. “터키인을 기독교로 개종 시키려 한다면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
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 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이 사순절에 우리들의 신앙고백으로 삼읍시다. 자신을 버림으로 우리를
구원해준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된 것을 기억하십시다. 값없이 얻은 구원의 그 사랑을 감사하고 감격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음행과 온갖 거짓과 탐욕의 우상숭배자의 삶에서 빛의 자녀의 삶으로 나를 변화시켜주신 것이 놀라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사랑을 모르는 이들을 나는 결단코 단념할 수 없다는 감격이 넘치는 사순절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그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그 예수님을 똑같이 흉내내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 성도들이 평생토록 걸어가 볼만한  길입니다.

<설교 후 기도>

기를 버려 음행과 거짓과 욕망으로 가득차고 넘쳐 나는 나 같은 죄인을 빛의 자녀로 삼아주신 주님, 그 구원의 감격으로 늘 주님을
자랑하는 삶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죄인이지만 주님 안에서 주의 사랑을 흠모하고 실천하는 삶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감격과 감사가 날마다 새롭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콘서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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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주일 에큐메니칼 예배 그리고 오후 5시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치고 다음날 삐섹에서 프랑스어 김나지움 방문, 오후 2시 김나지움 학생초청회, 오후 4시콘서트등의 선교여행을 마친 프랑스 장로교회 선교단이 화요일 오전 9시 교회를 출발 저녁 10시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해드립니다.

관련사진 자료는 사진첩에 그리고 선교보고는 교회 선교활동 게시판에 게제됩니다.

위의 사진은 삐섹 벨리바 찻집에 학생들을 초청하여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며 아래의 사진은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치는 콘서트 장면입니다.

콘서트 안내

3월 3일 오후 5시 꼬빌리시 교회당에서 콘서트가 있습니다. 파리한인장로교회의 교인이면서 파리에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분들이 체코선교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인솔자: 성원용 목사
선교위원회 총무: 서병조 집사
소프라노: 함혜경 사모, 이명진 성도, 이현정 성도
피아노: 임미아 성도, 이경희 성도
플룻: 유현수 성도

이 분들은 3월 4일 삐섹에서 오전에 두차례 프랑스 김나지움(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실에서 만남의 시간을 갖고 오후 2시에 벨리바 찻집으로 학생들을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눈후 오후 4시에 콘서트를 갖고 프라하로 돌아와 다음날 5일 파리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프로필
소프라노 함혜경(Soprano HAM, Hye Gyung)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 Ecole Normale de Musique de Paris과 블로뉴 국립음악원에서 성악 전공 중이며, Evry Cathedrale 합창단의 솔리스트와 파리 한인장로교회 성가대 지휘자 역임

소프라노 이명진(LEE Myung Jin)
조선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 광주 시립합창단 단원과 광주 오페라 단원/KBS Amteur Music concert 및 다수의 오페라에서 연주

소프라노 이현정(LEE, Hyun Jung)
호남신학대학교 교회음악과 졸업/프랑스 Ecole Normale de Musique de Paris 와 Conservatoire de Rueil Malmaison 에서 성악 공부 중

테너 서병조(SUH Byung Jo)
고려대학교 법과 대학 및 파리 5대학 법학박사 과정 수료/주 OECD 대한민국 대표부 근무/ 에클레시아 합창단, 바하 합창단 활동

피아노 임미아(IM Mi A)
숙명여자 대학교 피아노과 졸업/프랑스 Ecole Norme de Musique de Paris의 최고연주자 과정에 재학중이며, 프랑스 St. Nom la Breteche Piano Concour에서 2등 입상

피아노 이경희(LEE Kyoung Hee)
이화여자 대학교, 동 대학원 피아노과 졸업/프랑스 Ecole Norme de Musique de Paris에서 피아노 공부 중

풀릇 유현수(YU Hyun Soo)
이화여자 대학교 피아노과 졸업/서울 국립음악원과 프랑스 국립 음악원 졸업/ C.N.R de Reuil-Malmaison과 Ecole Norme de Musique de Paris에서 풀릇 공부 중

흙으로 돌아가리라

  • 한인 예배 (2002년 02월 17일)
  • 창 3:8-19
  • 설교자: 이종실

02년 02월 17일(사순절 첫째주일)
본문: 창세기 3: 8-19
제목: 흙으로 돌아가리라

<공동기도>
구원의 하나님 아버지
죽음의 날을 기억하는 겸손한 삶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의 불순종을 대속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는 사순절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설교>
오늘은 사순절의 첫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
전 6주간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어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을 묵상합니다. 사순절을 “lent”라고 하는 데 이 말의 어원은 “lengthen”에서
왔습니다. 봄에 낮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사순절의 원래기간은 40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무덤에 머물러 계시던 시간을 기억하며 금식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것이 3세기 초에 6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800년에
40일이 되었습니다. 이 전통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던 40일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시작은 부활절 전 일요일을 포함하지 않은 40일입니다. 이 날은 수요일인데 특별이 이 수요일을 교회력에서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지난 주 수요일인 2월 13일이 바로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재의 수요일은 회개의 날을 상징합니다. 재위에 앉아 재를 머리위로 뿌리며 회개자는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절규합니다. 이것이 후에 카톨릭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의 인사였다고 합니다.

오늘 창세기 기자는 사순절의 첫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흙으로 돌아가리라”즉 “죽음을 기억하라!” 고 우리를 기억시키고 있습니다.


세기 기자는 매우 냉정하게 단호하게 우리들의 이 땅 위에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죽음 –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죄의 값입니다. 이 창세기의 신앙 전통에 따라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명제를 선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금단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사악하게도 그것을 먹었을 때 하나님의
탄식이 울려퍼졌습니다. “오호라, 사람이 선과 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되었구나.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의 실과를 따먹고
영원히 사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겠구나.”(22절)

하나님을 탄식케 한 인간의 불순종이 죄입니다. 우리들의 귀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불순종을 유혹하는 뱀의 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이 되는 것 만큼 즐거운 유혹은 없습니다. 한번 알게 된 달콤한 유혹과 욕망은 인간 안에서 성장해
갑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룰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생의 한계를 설정합니다. “(흙)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생은 마지막 종점이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는 그 순간은 인생의 마지막 종점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모두 남기고 떠나야만 합니다.

“흙
으로 돌아가리라” 이 선언은 우리 인간이 신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 이 선언은 죽음은 인생 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위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달력과 시계를 사용합니까? 날이 어두워지기 전 서둘러 일을 계속해야 되는 강박관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젊음이
지나가 것을 안타까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평범한 말들과 사실들 그 배후에 우리는 시간 시간 우리가 죽어가고 있고
우리에게는 제한된 시간만이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속에서 생각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우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날이라는 특급열차에 몸을 싣고 있음을 알기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명을 연장할 수 있지만 죽음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음의 초읽기에 당혹스러워 하는 인간을 보며 즐거워하는 잔인한 하나님이신가?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세상에 질고와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야 된다는
선언입니다.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닙니다. 인간이 피조물임을 거부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망가진 하나님의 창조가 고통과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의 손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과 다시 붙잡고 화해하게 함으로써 망가진 하나님의 창조가
수리된것입니다. 인생의 질고와 죽음이 사라진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사라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 죽음이 다른 질과 내용을 갖게된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시간과
영원사이에 가로놓인 담장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과 영원을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된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우리는
죽지않고 모두 변화할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은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켰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라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고린도전서 15: 50-58절 말씀입니다.

하나
님은 “네가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위협을 하면서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실과를 따먹었고 그래서 심판의 번개가 내리쳤습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
심판은 뱀에게도 역시 내려졌습니다. “네가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미 선언되었지만 그 사형선고는 즉시 인간에게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금방 죽는 대신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인간은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형선고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사망의 그늘이지만 그래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가 은밀히 감추어져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다가오는 밤에 나는 나의 영혼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아직 살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리에게 결코 죽음의 운명에서 해방된다는 약속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잠시 동안 생명을 부지 하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전쟁과 폭동과 질병과 사건사고와 자연환경의 위협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폭풍구름 저 너머에 화해의 표시로서 무지개를
만드셨습니다.

가시와 엉겅퀴와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우리들의 고통과 압박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보잘 것 없는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라는 것을 기억 시킵니다.

리고 고통이나 애통, 울부짖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눈에서 눈물이 씻겨지고 원수의 하나까지 모두 쳐 부셔진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아래 거할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지, 하나님 그분이 얼마나 신실한 분이신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깊은 심연에서 울부짖을 때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고통의 심연에서 다윗은 목자 되시는 여호와를 발견하고 그를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리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편 전체)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사순절의 첫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죽음을 향하는 존재,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기억하십시다. 죽음을 기억하는 자,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
존재를 아는 자만이 죽음과 고통 너머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위로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겸손한 삶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이 사순절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
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사순절의 첫 주일에 다시 기억합니다. 주님앞에 진실하게 하시며 주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마음의 욕망이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임을 알고 욕망을 비운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신비로
채워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