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물

  • 한인 예배 (2001년 12월 23일)
  • 엡 2:4-8
  • 설교자: 이종실

01/12/23 (대강절 넷째주일)
제목: 하나님의 선물
본문: 에베소서 2:4-8

< 공동기도>
아기 예수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던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
영생의 길을 걷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 교>

대강절 네 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라하의 성탄 분위기를 자아내는 성탄나무 시장과 잉어 시장이 지난 주부터 거리를 장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맘때 되면 체코가정 마다
성탄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성탄일을 앞두고 집마다 대청소를 합니다. 그리고 성탄과자를 구워냅니다.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면 과자
굽는 냄새가 집집마다 흘러나옵니다. 집안에 들어가면 성탄나무에서 은근히 풍기는 솔 나무 냄새와 과자 굽는 냄새가 어울려 후각의
성탄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습니다.

온 가족들이 성탄 선물을 준비해서 성탄장식나무 아래에 갖다 놓습니다. 욕조 안에는
살아있는 잉어 몇 마리가 헤엄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준비될 기름에 갖 튀겨낸 따근한 잉어튀김과 차가운 감자 샐러드와
잉어내장으로 만든 국 – 성탄 잔치음식을 생각하면 입안에서 군침이 돕니다.

며칠동안의 성탄절 방학까지 맞이한
아이들은 흥분해서 이 방 저 방 뛰어다닙니다. 성탄장식 나무아래 놓여있는 선물꾸러미를 24일 밤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몇번씩 만져보고 흔들어보고 소리를 들어봅니다. 포장지로 감추어진 물건을 손으로 더듬다가 그만 자지러지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깡충
깡충 뜁니다. 그 선물은 틀림없이 아이가 간절히 원하던 물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성탄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들 만큼 성탄의미를 잘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성탄은 가장 값지고 꼭 필요하고 그리고 때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좋은 것을 받는 신나는 날입니다.


탄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선물입니다. 요한 1서는 이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1 5:11-12)


선물은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다시말씀드려 아기 예수의 탄생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살아있는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리가 살면서 아이러니한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 엄청나게 좋은 것은 평상시에 좋고 감사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론 그것이
없다고 상상하면 그것의 귀중함이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만약에 부모님이 안 계신다면… 만약에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가정이
없었다면… 만약에 교회가 없었다면… 만약에 목사가 없었다면 그리고 성도가 없었다면 하나님이 내 곁에 데려다 놓은 교우가 없었다면…
한번 상상해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알기위해 먼저

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하나님이 세상에 결코 온 적이 없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이전과 그리스도 이후로 나누는
역사 연대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다는 희망이 없었을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징하는
성탄절 선물도 성탄절도 없었을 것입니다.
“탄일종이 땡 땡 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리네” 소외되고 잊혀진 자들을 기억하는 성탄절 노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없는 세상은 성탄절과 흰 눈이 없는 겨울과 같을것입니다.


수님이 없었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죄가운데서 의미없는 삶을 살다가 그녀는 죽었을것입니다. 세리 마태는 자신의 고향에서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평생했을 것입니다. 로마 군병의 잔인성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을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고기잡는 일 이외에 어떤
일도 더하지 못하였을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엄격한 율법주의의 바리새인을 벗어나지 못하였을것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자들은 육신과 영혼의 질병을 안고 살아갔을것입니다. 다리를 저는 자는 계속 다리를 절고, 눈 먼자는 어두움속에 계속
머물러있고, 듣지 못하는 자는 여전히 침묵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는 말을
우리들은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않았다면 우리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용서가 없다면 죄가 사라지지않고 죄에 대한 비난이 우리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오신적이 없다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 아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 8:11)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용서와 화해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단지 율법의 복종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정의와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하려고 하기보다 그들이 지켜야될 것을 아는 것을 더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받은 우리들 모두에게 용서가 선포되었습니다. 우리는 용서가 가져오는 자유함을 알게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용서할 수 있고 그리고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들에게 주신 용서와 그로인한 자유함의
체험이 있기때문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1 3:1)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양이 되어 죽으심으로 열어주신 은혜의 행위로 용서함을 받았기때문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용서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의 용서는 우리들의 삶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지하철을 타면 안에
광고들이 즐비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내무부에서 국민 계몽을 위한 광고가 있습니다. “내무부가 경고합니다. 부정부패는 성품을
파괴합니다.” 부정한 일, 나쁜 일은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괴시키고 타인과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파괴시킨다는
것입니다. 나쁜 음식 나쁜 공기를 마시면 육신이 망가지듯이 나쁜 행위, 나쁜 생각, 나쁜 말은 우리들의 인격과 성품에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가 우리들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회개와 정의와 봉사와 섬김과 나눔입니다. 이 말씀들을 듣는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들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인격과 성품 뿐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들의 영혼까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들의
영혼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이 해외에서 우리들이 아름다운 교회로 가꾸어가는 노력이 매우 소중한것입니다. 우리들의
인격과 성품과 존재 심지어 영생의 문제까지 영향을 주는 영혼을 주님의 모습으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선물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동번역 성경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단지 우리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는 날이 가면 갈수록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용서의 주님의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기에 그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주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선물 – 아기 예수 탄생은 우리에게 하늘의
소망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천국 가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고전 15:19)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영생의 소망이 존재하지 않으면 심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마 25:21) – 부활의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늘 현실이 모두 다입니다. 영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닫힌 관두껑과 차가운 무덤외에 어떤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기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다가올 기쁜 일들을 생각하며 악을 선으로 이기며 살아가는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늘의 선물을 주신 날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 아기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수님이 오셔서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 그리고 그분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용서를 경험하자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는 용서의 체험으로 영생과 하늘나라의 약속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 어디 있습니까?

<설교 후 기도>
주님을 기다리는 마지막 촛불이
켜졌습니다. 우리들 앞에 우리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하나님의 선물 –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들을 살리실 뿐 아니라 주의 모습으로 날마다 변화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빛을 받아 아버지앞에 가는 그날 까지 생명을 주는 주의 성탄의 빛을 드러내는 저희들의 삶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펀글] 체코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 아래의 글은 사이버미션2001 선교대회에 올린 글을 옮겨 놓은것입니다.
<체코교회와의 협력선교>를 체코선교 정책으로
를 체코 선교방법으로
택한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한글입니다.
…………………………………………………………………..
체코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번호: 88 이름: 이종실 날짜: 2001-12-10 조회수: 26

안녕하세요?
저는 체코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이종실 목사입니다.
대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게시판이 열리지 않는다고 진행본부로 메일을 보내면서 제가 관련하는 두개의 홈페이지를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 보내드렸는데 그것을 이 게시판에 올려주신것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파송선교사입니다. 체코에는 1993년 11월에 왔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것은 1997년입니다. 체코에 오기전에는 저의 교단 총회 세계선교부 간사로 만 4년, 그리고 필리핀에서 반년을 교단본부에서 실무로일할때 느꼇던 선교현장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을 가져보구요 그리고 영국에서 1년간 선교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선교와 관련해서 일한 햇수로 15년되었습니다.

체코교회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은 1985년도였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 이렇게 선교사로 살고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체코교회와의 협력선교\” 입니다.
많은 분들에게 질문을 받는것 가운데 하나가 \”왜 체코에서 체코교회와 협력선교를 해야됩니까?\” 였습니다.
현대선교신학의 경향이니 뭐니 하는 설명은 이미 강의시간에 들으셨으리라 생각되어 그런 이야기는 뒤로 하고 …

이유는 1000년의 역사가 넘는 체코교회가 있기때문이에요.
교회 역사가 1000년이 되었으니 체코는 카톨릭이나 아니면 다른 개신교회의 국가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국가 통계로 30% 실제예배 출석교인이 8%도 되지않아요. 카톨릭과 개신교 교회들 모두 합해서요. 금년에 10년마다 열리는 인구조사에서 카톨릭 교인수가 10년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어요. 그러면 나머지 인구는 아직 종교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 \”나는 무신론자 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에요.

이 무신론자들의 숲속에서 체코교회는 바람앞에 등불같아요. 공산주의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니 체코교회가 발전할수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새로운 변화의 시대가 오히려 체코교회를 더 어렵게하고 있어요. 공산주의 시대의 종교법은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교회활동에 대해서 다른하나는 교회재정에 대해서예요. 이제는 교회활동은 교회밖에서도 가능해졌어요. 그러나 교회재정의 법은 지금도 존속하고 있어요. 먼저 교회활동은 자유가 있으면 무엇해요? 교회는 별로 필요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지지않은 상황에서 교회의 자유는 무기력해요.

체코개신교회는 루터와 칼빈의 개혁교회보다 100년이 앞서서 시작되었어요. 그러니까 1400년대 부터 신앙의 자유를 위해 카톨릭과 오랜전쟁을 하고 완전한 자유가 1차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이 되는 1918년에 이루어졌어요. 그리고 얼마후에 나찌의 통치 그리고 공산통치 그러니 체코의 개혁교회가 언제 자유롭게 교회다운 교회로 한번 살아본적이 없는거예요. 그냥 생존을 위해서만 살았지요. 그러니 오늘날 체코교회는 마치 제가 잘 쓰는 표현으로 \”체코개혁가문의 종친회\”같아요. 교회일은 디아코니아(개신교회의 사회봉사조직)가 하고 교회는 그냥 모이는거예요. 전도해서 외부에서 새로운 신자가 들어오는 구조가 되질 못해요.

조금전에 공산통치때 종교법 가운데 교회재정법이 있다고 했지요? 이 법은 교회재산을 국유화 하는 대신 정부가 교회에 재정을 지원하는거예요. 목회자 사례비는 국가가 정한 봉급기준표에 의해 문화부 예산에서 집행되고 있어요. 여기에 복잡한 이야기 많아요. 생략하기로 하구요. 지금도 이법이 계속 존속하거든요. 그런데 문화부에서 \”우리는 이제 교회에게 줄 돈이 없다. 너희들 아라서 해라\” 그러니 교회가 돈이 있어야지요. 목회자 사례할 수 있는 교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정부 바지가랑이 붙잡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계속 지원해 줘야된다고 매달리고 있지요.

물론 제가 극단적인 표현을 쓴 부분도 있지만 이것이 체코교회의 현실이에요. 이 어려운 교회가 우리들의 지체라면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체코선교의 미래를 짊어질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가 기도하고 도와야되고 우리의 경험을 전해줘야되는 책임이 형제교회에 있는것이지요.

그리고 체코에 종교법이 있는한 별도로 교회를 개척해서 교단을 세워 선교의 지속성을 갖는다는것은 현실성이 없는 선교전략이예요. 현지교회가 바뀌면 그것이 곧 선교로 연결되고 1000년의 교회의 역사의 깊이가 완전히 새로운 선교자원으로 변모될거예요. 이것이 지속성있는 체코선교의 방법이예요. 그래서 저는 저의 선교전략을 \”체코교회와의 협력선교\”로 택한것이예요.

앞에서 제가 체코개신(개혁)교회를 체코개혁 가문들의 종친회로 묘사를 한것 기억나시지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가는 구조가 아닌 거의 폐쇄된 공간이예요. 그래서 저의 선교 프로그램은 체코교회를 상징하는 close house 의 대칭개념으로 open house 라 해요.

이교회 저교회에서 오픈 하우스 선교프로그램을 시도했지만 변변한 결과가 아직도 없네요. 그냥 폐쇄된 교회 구조들에 부딪혀 고전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언젠가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고 서두르지 않으면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여러분 기도해주세요.

프라하에서 체코-한인들이 함께 모이는 꼬빌리시 교회에서의 경험은 아직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이교회는 일반적인 이민교회가 아니라 체코에 거주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체코교회에 들어가 체코교회를 오픈 하우스로 만들고 있어요. 처음에 체코-한국 기독교인들의 연합예배를 추진하면서 체코교회의 교인가운데 두가정이 \”예배는 체코어로 드려야됩니다.\” 하면서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 주장이 우리들에게는 어거지 같이 들리지만 체코인들 입장에서는 가능해요. 중세시대때 기독교는 무슨언어로 예배를 드렸는지 아시지요? 예, 라틴어였어요. 성경도 라틴어 성경이었구요. 체코 개혁파들이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예배를 체코어로 들이자! 그리고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자!\” 주장하고 \”성만찬은 성서대로 하자!\” 해서 이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1400년 부터 1918년까지 투쟁을 했던거예요. 그러니 한국사람들이 들어와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니 혹시 이상한 나라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예배를 드릴까봐 반발이 있었던거예요. 그래도 이해하기 힘드세요? :-)

여러분들에게 생소한 나라 체코에 살아가는 체코교회 우리들의 형제 자매들의 상황을 장구하게 말씀드린것은 여러분들의 기도와 체코선교 비전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예요.

여러분들의 기도가 필요하구요.

1년에 짧은 기간도 괜찮아요. 그러나 매년 정기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단기선교팀이 올 수 있다면 대 환영을 할께요.
우선 우리 문화를 소개할 수있는 분들이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요리 탈춤 태권도 같은거요.

그리고 여름에 전도캠핑 같은 프로그램이 가능한 미국쪽에 계신 영어구사가 능숙한 젊은 분들도 오셨으면 좋겠어요.

혹시 한국영화필름을 제공해 주실 수 있는 분 계시면 체코어 자막을 처리해서 소개하고 싶어요. – 이런 프로그램이 왜 필요하냐구요? – 체코 사람들은 문화적인 욕구가 엄청나거든요. 그들과 접촉하는 매개체로 문화를 생각하기때문이예요. 지역교회가 주민들에게 이런 공간을 제공하면서 서서히 서서히 접근해 가는것이지요.

이제는 선교를 목사 혼자서 하는 시대가 아닌것 같아요. 많은 기도와 다양한 동역자들이 필요해요.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다시한번 더 저의 연락처를 남기는 의미에서 교회 홈페이지를 남깁니다.
http://praguechurch.kr

주의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빕니다.

이 종 실 올림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선교목사
체코형제개혁교단 총회목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 담임 목사

서버 접속 장애 안내

12월 17일 오전 9시에서 오후 2시 사이에서 본 홈페이지 접속에 장애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번 접속 장애는 호스팅 업체의 서버 업그레이드로 인한 것입니다. 예정상으로는 5시간여의 접속 장애입니다만, 이 시간대를 전후하여 접속 장애 시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으니 이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2월 당회보고

12월 당회(12월 10일) 주요 결정사항입니다.

1. 2월 중순경 수요일 저녁에 중간세대들의 만남 – 주제: 한국에 대해서

2. 예배의 찬송과 성만찬 예식에 대해 결의 없는 토론을 함 – 슈토렉 목사는 체코 개혁교회와 카톨릭 교회의 에큐메니칼적인 연대는 체코 기독교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며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와의 에큐메니칼 연대의 실천으로 예배 예전에 있어서 공통분모를 많이 가지려고 한다. 그의 이러한 노력에 대해 당회원들은 신학적인 으로 그리고 낯선 찬송에 대한 부담으로 부정적이었다.

3. 3월 17일 교회창립기념일 준비에 대한 의논

4. 다음회의 2002년 1월 7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 한인 예배 (2001년 12월 08일)
  • 요 1:19-28
  • 설교자: 이종실

01/12/08 (대강절 두번째 주일)
본문: 요한복음 1: 19-28
제목: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공동기도>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례 요한 처럼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세상이 메시야를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설교>

가는 아름다운 부부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눅 1: 5-6)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저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 사람들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으로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징이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것은 재앙이었으며 수태하지 못하는 여자와 후손이 없는 남자는 실패한 삶, 저주 받은
삶이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삶은 고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고통입니다.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던 레아가 그의 아들을 낳았을
때 수태를 하지못하던 야곱의 여인 라헬의 고통입니다. 마침내 아들 요셉을 낳았을 때 그녀는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셨다. 하나님이 나의 수치를 씻으셨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라헬의 이 고백 속에서 단지 아이를 갖지
못한 이유 때문에 당했을 억울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억울하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움을 겪은 여인들의 한들이
천지를 진동할 때 그 여인들의 태 속에 곧 다가올 새로운 시대가 요동을 치고있었습니다.

이것은 자녀 없는 부모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의미뿐 아니라 억울하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의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음서 가운데 특히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요한의 이야기와 병행시키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수태하지 못하는 엘리자벳의
남편 사가랴에게 요한의 수태를 알렸고, 처녀 마리아에게는 직접 예수탄생을 알립니다. 늙어 수태를 한 친척 엘리사벳을 보고 천사의
처녀 수태 예고를 받아들인 마리아가 어느날 해산이 가까운 엘리자벳을 방문합니다. 마리아가 찬양을 하고 사가랴도 찬양을 합니다.
비록 할례를 받는 난지 8일이 지날 때 까지 아들들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탄생 전에 이미 요한과 예수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많은 병행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병행되는 이야기들이 요한과 예수가 누가
그리스도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행되는 이야기 요한을 통해서 더 분명히 예수가 그리스도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그리스도의 탄생 불과 몇 달 앞에 태어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인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기다림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공회원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통하여 요한에게 질문을 합니다. 첫번째 질문이 “네가 누구냐?”입니다. 네가 과연 그리스도냐?는 매우 단정적인 질문입니다.


질문에 대해 성경은 “요한은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내어 말하다”란 말은
“고백하다”는 뜻입니다. “숨기지 아니하다”란 말은 “거절하지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에 대한 완벽하고 진실한 고백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자신은 아무 자격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외국인 눈에 비치는 한국인의 모습은 근면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일등에 대한 애착이 많은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외국기자는 “한국에는 일등은 많고 이등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외국인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우리나라 교육현장을 돌아보면 그들의 이야기를 어느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좀 극단적인 표현으로 모두 1등을 만들려고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교육이란 모두 1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게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도록 돕는것입니다. 자신의 역량이 무엇인지 장점이 무엇인지 알게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인정할 때 타인을 인정할 수 있어 비로소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됩니다.

철학의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명제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며칠전 여성도 성경 공부반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WEC 이라는 유수한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
선교단체가 선교사를 파송하기전 훈련을 하는 데 그때 가장 강조하는 훈련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 보다 6개월 형 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목수의 가문인 반면 요한은 제사장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아니더라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 아이가 장차 무엇이
될꼬?”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관심은 듣고 잊어버리는 매일 일어나는 뉴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지워 지지않는 요한의 탄생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 요한이 조그만 긍정했어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로 인정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꼭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면 모르냐” “꼭 내입으로 언급해야 너희가 알겠느냐?”는 식으로
이야기 했어도 그는 최소한 한 종파를 이루어 지도자로 군림했을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드러내어
숨기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아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잘아는 사람을 선택하여 자기를 긍정하게 하는
도구로 쓰십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그 겸손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용해서
일꾼삼으십니다. 모세가 “나는 입이 둔하여 적합한자가 아닙니다.” – 자기 부정을 했을 때 하나님은 말잘하는 아론을 동반하여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로 세워 애굽에 보냈습니다.

이사야가 “나는 입술이 부정합니다.” – 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 깨끗게 하시고 그를 말씀 전하는 선지자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했을때 예수께서는 그를 택하여 “사람을 취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을 택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 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대인의 격언가운데 “네 혀에게 ‘나는 알지 못한다’는 말을 가르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의 겸손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입니다. 철저히 그리스도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구원의 은총을 기다리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일 것입니다.

다음은 21절 과 22절에 나오는 두번째 질문입니다.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사냐?” 이에대해 요한은 “나는 아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요한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합니다.

“나는 아니라”고만 대답하고 자신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 요한에게 질문자는 계속 추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역시 계속해서 처음에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음에는 “나는 아니라” 마지막으로 “아니라” 부정을 하고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부정에 대해 그들은 요한 스스로 자기 증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 너는 너 자신을 무엇이라 하느냐? 

“나
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요한은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을 세번 부정한 후에 한 자기 긍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긍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기능적인 자기 자신 이었습니다. 자기 인격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PR하는
것이 아니라 부속품 같은 자기의 존재를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그리스도와 비교하여 자신을 한 인격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도구인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자신이 소리라는 것은 요한의 겸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앞에서 자기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이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리를 세상에 아름답게 내는 기능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인간-세상은 조화로왔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자신을 알고 자기 기능을 알고 자기 자신에 충실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는 겸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자기이해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네
가 어디있느냐?” 하나님이 인간 아담에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가인역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하갈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바른 답을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지금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질문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기 자신을 잘 알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리로 철저히 자기를 그리스도의 뒤로 감춘  세례요한의 대답이 여러분의 대답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기쁨이 이 대강절에 여러분의 생애를 지배하시길 빕니다.

<설교후 기도>

님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우리들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 단지 그리스도의 소리로 자신을 규정하며 주의 오심을
기다리던 요한 처럼 우리들의 삶이 오실 메시야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죽고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놀라운 역사 일어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