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부터… 비로소…

  • 한인 예배 (2001년 10월 28일)
  • 마 4:12-17
  • 설교자: 이종실

01/10/28(삼위일체후 스무번째 주일)
설교본문: 마태복음 4장 12-17절
설교제목: “이때부터 … 비로소 …”

<공동기도>
회개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복음의 빛으로 우리 어두운 모든 것을 비추어주시사
우리들을 진심으로 회개한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들이 받은 복음의 빛을 체코교회와 함께
이방의 갈릴리와 같은 체코사회에 비추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리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집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앚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설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여행경로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있습니다. 13절 14절 15절 16절을 여행 경로를 빼고 본문을 다시 읽으면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마치 때를 기다리던 사람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게 됨을 오늘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 탄생 때 멀리서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메시야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찾아오고, 들녘의 목동들이 천사의 구세주 탄생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메시야 탄생을 경계한 헤롯이 베들레헴 지역의 갓 태어난 아기들을 무참히 죽이자 주의 천사의 보호로 그 죽음의 터널을 지나 구사일생을 합니다. 장성하여 성인이 되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이미 충분히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이룰려고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요즈음 체코 의회에서 국가 예산심의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체코의 재단법인에 대한 국가재정 지원심의가 있었습니다. 하벨 대통령 이전 부인이 세운 “올가 재단” 그리고 침례교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아드라” 그 외 해외 단체들이 세운 유수한 재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도 짧고 단체 사무실이라야 별도로 없이 우리 꼬빌리시 교회로 공식적인 주소로 되어있고 유급직원도 없이 몇 몇 자원 봉사자들을 조직하여 슈토렉 목사님이 직접 단체를 운영하는 “디보께 후시”가 의회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고 의회가 이 단체의 활동 지원으로 천이백오십만 꼬룬 (미화 약 35만불)을 예산 편성키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 결정이 바로 언론에 알려 지고 여기 저기서 슈토렉 목사님께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있다는 이 이야기를 제 아내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제 아내가 “당신은 언제 슈토렉 목사님 처럼 그렇게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느냐?”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지 제게 물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 이룰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무엇이 되려고 하고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평가 받고 인정 받고 싶어합니다. “20대 30대는 사랑으로 살고 40대는 돈으로 살고 50대는 명예로 산다”고 하는 세간의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타인으로부터 무엇인가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를 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익혔습니다. 키가 자라고 성장하면서 더욱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회당에서 지내기를 즐겨하셨고 그리고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단지 자신을 단련하고 준비할 뿐 무엇을 하려고 그리고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 비로소 …”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데뷰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거나 모든 사람들이 혹할 만한 메시지를 준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헤롯 정권의 탄압을 받아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의 빈자리나 매꾸려는 듯이 요한이 선포하던 똑 같은 설교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 시작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 1500년대의 종교개혁을 위해 투쟁을 하던 체코 개혁파들은 “사탄이 악으로 신실한 종들을 거두어갔지만 하나님은 선으로 자신의 약속에 따라 곧 바로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준비하셨다.” 라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혜성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성장시켜 열매 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이십니다. 이땅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뿌려진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우리들이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장시켜가십니다. 하나님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고백하는 삶으로 준비된 교회와 신자들을 우리 하나님은 세례 요한의 빈자리를 채우듯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 처럼 일하게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어떤 존재인지 질문도 하지않고 하나님의 뜻에 기대어 일하는 일꾼들이 들판에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꾼들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되어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를 우리들은 체험합니다.

예 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요지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너가 너 힘과 능력으로 한번 너의 사명을 감당해보라고 요청을합니다. 너가 메시야라면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이고, 저 예루살렘 꼭대기에서 번지 점프를 하듯 뛰어내려 천사가 보호해주는 이벤트를 너의 데뷔전에 선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너를 알아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 비로소 …” 오늘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이 두 단어가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들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나라의 증언입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합니다.

한 국에서는 교회의 삶 과 세상의 삶을 따로 살아도 감출 수 있지만 이 해외에서는 감추어 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호구지책을 위한 세상의 삶이 곧 신자의 삶이며 교회의 삶이됩니다. 세상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사업과 학업과 인생의 가치관을 성공적으로 성취하기위해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두움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 내 자신이 얼마나 어두운 존재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회개가 나옵니다.
자 신을 바라보는 눈이 한번 열리면 닫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더욱 더 성장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조그마한 어두움까지도 발견하게 됩니다. 끝없이 밀려오고 생성되는 자기 자신의 어두움의 근원을 결국 찾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들은 하나님앞에 그리고 사람들앞에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의 짐을 벗어버리고 자유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빈자리를 단지 대신할 뿐이었습니다.자신의 주장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선포하라 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은 그대로 전할 뿐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듯이 똑같이 한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 물어 보았을 때 예수님이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선지자라고 한다는 것 입니다.   

이 제 우리는 예수님의 여행경로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지리는 제일 남쪽에 유대 그리고 북쪽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사마리아 그리고 갈릴리가 있었습니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유대에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인 예루살렘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 계시다가 세례 요한이 탄압을 받는 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기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반대 방향인 북쪽 갈릴리로 향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는 약 100키로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갈릴리는 이처럼 이스라엘의 북쪽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보통은 게네사렛 호수, 또 나중에는 디베랴 호수라고도 불리는 갈릴리 호수와 지중해안 평야 사이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 갈릴리에서도 고향동네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호수를 끼고있는 평야지대여서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았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갈릴리 지역에 204개의 부유한 마을과 15개의 요새도시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토지가 비옥하고 북방에 위치하다 보니 이웃 강대국들의 시달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구약성경 열왕기하 15장에 언급되어있습니다. 주전 743년 앗수르 임금 디글랏빌레셀이 갈릴리를 점령하여 앗수르 제국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켰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앗수르로 사로잡혀 가서, 갈릴리 주민들 가운데 유대인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전 8세기 이사야의 시대에 이 지역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헤롯 왕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교적인 헬라 주민층이 다시 늘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역사적 상황으로 갈릴리는 종교적으로 혼합신앙이 매우 성행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무시를 당하였고 경제적으로 중앙정부와 지방 관리들의 과도한 세금착취로 언제나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유대 광야를 떠나 북쪽 갈리리로 오신곳 이곳은; 인구 밀집지역으로 온갖 신앙이 혼합되어있고, 이교적인 헬라주민과 유대주민들간의 갈등도 많고 과도한 세금착취로 백성의 원성이 높은 온갖 문제들이 놓여있는 인간 사회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는 세례 요한 처럼 광야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이면서 신앙적으로 이미 이방의 땅이 된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방향을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은 이방의 땅 지중해 도시들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문화 종교 사상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설교를 하였고 회개를 요청하였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인간의 무질서와 죄악이 득실거리는 땅을 피하지 않고 사기꾼들이 있는 곳에 술집이 있는 곳에 사창가가 있는 그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저희와 같이 해외에 있는 우리 한인교회 공동체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걸어가신 예수님의 여행의 방향을 잘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으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동떨어진 세계 속에 남아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합니다. 이것은 유혹입니다.  광야에서 은둔하여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의 마태는 가버나움 세관의 세리였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은 당시에 로마 통치자의 앞잡이자 같은 동족을 착취하는 착취자였습니다. 죄인을 대표하는 예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죄인 마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빛을 보았습니다. 회개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빛은 죄인과 억압과 착취자의 가슴에 까지 비쳐지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를 만난 자신의 체험을 오늘 본문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놓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복음은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춰집니다. 사람의 눈을 피해 한적한 시간에 물길러 나온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동네 안으로 뛰어들어가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회개가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이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만족을 위해 그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회개하여 거듭난 자들을 통해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빛을 비취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이 세상 속에서 점점 성장하게 됩니다.

<설교 후 기도>
오 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일을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살펴보면서 오늘 저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한 존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해외에서 문화와 언어의 장벽으로 우리들만의 믿음의 동굴 속에 머무르는 유혹을 이기게 하셔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방의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저희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시월 마지막 주일은요…

시월 마지막 주일인 10월 28일은 <겨울시간>이 적용됩니다.

예전대로 나오시면 한시간 일찍나오시게 됩니다. 예배시간에 일찍 나오시는 것은 나쁘지않겠지만 시간 변경되는것은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날 저녁 7시에는 <공동체 가족회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회기말이 11월이어서 서로 의논할 내용들이 많이있습니다. 작년에 시작한 보흐니체 정신병원 환자들을 위한 성탄절 바자회도 금년에 지속되어야겠지요. 그리고 유명무실하지만 부서조직에 대한것, 2년마다 선임하기로한 총무선임등의 일정 그리고 교회의 선교에 대한 몇가지 보고사항도 있구요. 모든 교회 의논들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의논하고 기도로 마쳐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교회의 기쁨

  • 한인 예배 (2001년 10월 21일)
  • 눅14:34-15:10
  • 설교자: 이종실

01.10.21(삼위일체후 열아홉번쨰)

설교본문: 누가복음 14장 34 – 15장 10절
설교제목: 교회의 기쁨

<성경>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하시니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잃은 양 비유, 되찾은 드라크마 비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리라.”

<설교>

두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사람들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말
씀을 듣는 자”와 “계명을 지키는 자” 두 사람의 모습이 15장 1절과 2절 단지 두절 속에 모두 설명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자는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었는지에 대한 언급 대신에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와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또 실패한 인생을 살아간다 할 지라도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오는 세리와 죄인들의 모습을 우리는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로
나아오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을 향해 폭풍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 가는 베드로의 모습과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확인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예수를 원망하며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라고 권면한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악한 동무로 경계해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자녀
주위에 나쁜 친구들이 있는 것을 안다면 부모는 늘 마음이 염려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더러워 질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도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천하고 더러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똑 같이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과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누가복음
18장) 바리새인들에게 이 율법의 문제는 진리와 정의의 문제였습니다. 누구나 다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모두 지켜야 되는 것을
자신들이 잘 지키고 있기에 그들은 타인에 대해 우월심과 무시함과 원망을 갖게 된 것 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랑과
무시함과 원망이 팽배한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몸에 익숙한 신앙의 기준, 교양의 기준, 인간 됨의
기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윽박지릅니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을 가지게 되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심지어 마음의 분노가 생기는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교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느 정도 교회 안에서 질서가 있지만 해외 한인교회는 한국의 교회들 보다는 조금 더 무질서해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누구나 서로 인정하지도 귀담아 들어 주지도 않는 자기 의로움이 있습니다. 그 의로움들이 저마다 교회 공동체를
부수고 망가트리고 퇴색시켜갑니다. 심지어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조롱거리로 만듭니다.

이런 교회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너
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예수님이 질문 합니다. 청중들은 머리를 끄덕거렸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거예요. 그러나
게으른 목자들은 아마 다르게 했을 거예요.

그리고 주님은 자신의 청중들에게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그들 중에 하나를 잃으면 손을 털면서 말하기를 그러나 아직 아홉이 남아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 드라크마는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적지 않는 돈이었습니다. 돈을
잃어버린 여인은 자신의 하루 품삯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어두운 장소에 떨어진 동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빗자루로 온 집안 구석 구석 청소를 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모든 여자들은 머리를 끄덕거릴 것입니다: 물론이지요 우리도 그렇게
할거예요.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무엇을 잃어버린 경험들이 한번씩은 다 있을 줄 압니다.
무엇을 길거리에서 잃어버렸을 때 이미 우리들은 걸었던 길을 따라 몇 차례씩 돌며 주의 깊게 오른쪽 왼쪽을 살펴봅니다. 그래도 찾지 못하면 걱정이 되어 밤에 잠이 오지않습니다.
 

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아이러니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따르던 아흔 아홉의 양들 때문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던 길 잃은 말썽쟁이 한 마리 양 때문에 목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손안에 들어있던 아홉 드라크마 때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나의
것 하나 때문에 여자는 기뻤습니다. 

이 비유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드러내는 비유는 없습니다. 상실한
모든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그런 거만을 떠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는 인간의 죄를 참으시고 죄로 소외된 자를 찿고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라는 돌아올 집을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회는 교회라는 기관의 기준과 인간의 정의의 잣대로 들어가고 나가는 집이 아닙니다. 죄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들이 돌아와 거쳐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쁨의 집입니다. 교회는 잃은 것을 찾은 하나님의 기쁨과 동시에
죄인들 소외된 자들의 용서와 축제의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잃은 것을 찾는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만의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가 기뻐 찬양합니다.


사가 기뻐하는 모습이 누가복음에 또 나옵니다. 예수 탄생의 소식을 알릴 때였습니다. 기뻐 찬양하며 아기 예수 탄생의 소식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잃어 버린 생명을 찾은 하나님의 기쁨은 전우주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단지 기쁨의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죄인들에게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잔치에 친구와 이웃이 초대됩니다. 교회의 기쁨은 세상의
흥미거리로 이루어진 이벤트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벤트는 교회의 잃어버린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과 그 축제를 더 흥겹게 하는
수단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먹고 마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축제와 관련이 없는 교회의
이벤트는 서로 꺼려하고 서로 회피하고 서로 떠넘기는 일거리입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잃은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벗과 이웃이 우리들이라면 추운 교회당에서 의미도 모르고 예배 드리는 하나님의 기쁨 보흐니체 정신병원 수요 예배자들을 우리들은 기억했어야 될 것입니다.


제는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교회의 체험이자 감사의 노래입니다. 온 천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 거룩한 만찬은
감사의 잔치입니다. 축제의 주인공은 회개한 죄인들 그리고 찾은 잃어버린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들이 중심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죄인들 상실한 자들 희망이 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존경을 받고 기쁨을 얻어야 됩니다.


코 형제 자매들은 이 일을 지난 주 목요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기쁨을 교회의 공동체가 누리기 위해 알코올중독자, 약물 중독자들
가운데 치료가 끝나고 중독생활 그리고 치유의 오랜 기간에 이미 아내도 가족도 남이 되어 버린 상실한 세상에 돌아와 다시 삶의
뿌리를 내려야 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는 “끌라슈떼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될지 체코 교우들 잘 모릅니다. “이 목사, 나는 이 일을 할 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줄 믿는다. 함께 배우면서 그리고 기도하면서 해보자.” 슈토렉 목사님이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체코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우리 동포들이 계십니다. 이 분들이 돌아올 용서와 받아들임이 있는 하나님의 준비한 집이 우리 교회라고 우리들은 말할 수 있습니까?

“회
개할 것이 없는 의인”은 누구도 교회의 기쁨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계속해서 회개를 요청하는 의인들은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 기쁨을 가져 다 주지 못합니다.  반대로 중압적이고 불쾌한 분위기를 만들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인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영접하는 교회 공동체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독자의 위치가 되어 불신과 비난과 자기 자랑의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 깊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의롭지 못할 지라도 우리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들이 되려고 합니다.  대신 우리들의 공동체는 누구도 관심 있어
하지 않는 그리고 회피하는 교회의 모습이 되어 갈 것입니다. 기쁨의 초청의 자리가 불신과 자기 자랑, 다툼과 분쟁, 업신여김과
해외생활의 스트레스를 풀고 자기 감정을 푸는 자리로 느껴질 때 교회의 모든 선교적인 노력과 증언과 초청은 쓰레기 같이 소모적인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용서와 받아들임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과 축제가 있는 교회가 되려면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자세가 아니라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세리와 죄인의 자세가 우리들에게 요구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을 보기에 의로운 것이 없어서 남을 판단할 근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러분들에게 죄책감과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죄인을 위해
이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 죄의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옆과 앞
뒤에 불러두신 형제 자매들도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하나님을 대하듯
하는 태도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주기도를
새롭게 배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데 뛰어난 분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비유들은 완전히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리들이 진실로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될 것이다: “나는 절망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상실할 때 까지 자신의 생각대로 길을
떠나는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양입니다. 나는 더러운 바닥에 떨어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동전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반듯이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찾은 기쁨에 우리를 어깨에 메고 우리들의 집 이 교회로 돌아와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잔치가 있는 이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영혼의 충족감, 상처 받은 마음의 치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용서 그리고 소망을 체험하며 우리는 믿음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설교 후 기도)

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이 세리와 죄인의 모습으로 주님 곁에 나아가 말씀을 듣고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기쁨의 존재들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 피할 수 없는 죄인이오니 우리들을 용납하시고 우리들을 주의 전에 하나님의
기쁨으로 존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기쁨이 넘치는 축제가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어 잃어버린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이 날마다
더하는 일에 동참하는 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살며 생각하며] 영화 “군청색의 세계”

[살며 생각하며] 영화 “군청색의 세계”

나눔터 제 18호 (2001/ 10/ 01 발간)

영화 꼴리야 그리고 가공의 인물을 극화한 찌므르만 코메디 시리즈의 배우 즈데녝 스비에락은 체코인들이 좋아하는 대중적인 인물이다. 그의 아들 얀 스비에락은 현재 젊은 영화감독으로 아버지 못지않은 대중성을 갖고 있다.

아들 스비에락이 제작한 “군청색의 세계”는 월별 관람객을 기준으로 하는 체코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연일 새롭게 갱신한 화제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지않고 체코인들과의 대화에 동참할 수 없을 정도로 영화의 내용자체가 체코인들 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역사적인 소재거리로 풍부하다.

이 영화의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군청색”은 체코 파일럿을 의미한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에게 체코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하자 나라와 자신의 비행기를 잃은 파일럿들을 징병하여 히틀러와 대항하는 영국의 한 기지에 몇몇 체코 파일럿들이 모인다. 그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영국의 전쟁 미망인과의 사랑, 전우의 의리, 목숨을 건 독일군들과의 전투를 잔잔 하면서도 매우 재미있게 그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는 체코 파일럿을 사랑했던 영국 여인의 모습, 그러나 그 여인과 헤어져 체코로 돌아온 파일럿을 기다리던 것은 일상의 삶이 아니었다. 이미 결혼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랑했던 옛 애인과 1948년 공산혁명이라는 대 변혁의 삶이었다.  그는 나라와 정의를 위해 싸운 보람도 없이 집단 수용소에 갇혀 노동과 질병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전쟁은 끝나도 약소국들은 여전히 강대국의 전리품으로 총성 없는 전쟁터가 되고있다. 주인공인 한 체코 파일럿이 수용소 병실에 누워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영화의 내용은 전개된다. 

이 영화 속에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프라하 8 – 꼬빌리시 이야기가 나온다. 앞 길 전차 다니는 큰 거리 이름이 “스트제리츠나” 이다. “스트제리츠나”는 형용사로 동사는 “스트제리트” 로 “(총을)쏜다” 는 뜻이다. 미루어 짐작해서 이전에 “사격장”이 이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했었는데 영화의 이야기 속에 히틀러 당시에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 “사형장”이 있어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약 석 달간 사형을 당해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거리를 “스트제리츠나”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류의 재앙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현장 보다 더 떨리던 것은 그 현장을 매일 지나 다니면서도 인류 재앙의 과거 역사 그리고 강대국들의 제국성을 잊고 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다.   

이 종실 / 나눔터 발간인

2001년 10월 목회서신

<2001년 10월 목회서신>

제목: 2001년 우리 교회 공동체의 생활 목표의 실천을 간곡히 권면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우리들의 공동체를 하나님이 허락하셨음을 고백합니다.

불완전하고 아직 죄성(罪性)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불러모아 우리 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드러내고자 우리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의 교회와 그리고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의 죄성, 게으름, 이기심, 욕망, 우월심, 열등심 등의 불완전성이 이룬 모순의 심연에서 우리들은 날마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들을 다른 한쪽의 희망의 언덕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의 교회를 이루는 우리와 그리고 구원 받아야할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 사이를 오가는 삶은 마치 살얼음판을 딛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 긴장은 우리들을 날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거듭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 그것을 갈망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주의 성령이 우리들을 낙심하지 않도록 날마다 돕습니다.

좋은 교회란 완전한 교회가 아니라 이 긴장이 시퍼런 칼날처럼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회개와 용서가 쉼 없이 반복되는 교회입니다. 불완전하고 아직도 날마다 죽어야 할 것이 남아있는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공동체를 기대하고 또 그것을 이루려는 우리들의 희망은 어쩌면 욕심입니다. 우리들의 욕심스러운 희망을 주의 성령께 넘겨드리고 대신 우리들은 날마다 쉬지 않고 회개와 용서를 반복하며 주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십시다.

\"교회를 이루는 나\"와 \"불완전한 나\"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은 교회 생활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긴장이 하나님의 사람과 야곱이 씨름을 하던 바로 그 얍복강입니다. 그리고 이 긴장은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 교회\" 공동체가 세워진 자리입니다. 우리들은 아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긴장이 있기에 우리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는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안에서 이 긴장의 신앙의 씨름터가 사라지면 우리들은 종교의 껍데기만 남는 흉물스러운 세상 집단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잊지 않기를 간곡히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리면서 다시 한번 2001년 우리 교회 공동체의 생활 목표의 실천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첫째 \"자기를 객관화하는 생활\"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방하기 보다 타인들의 실수와 잘못이 내게는 없는지 먼저 자신을 살피는 삶의 자세입니다.

둘째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타인을 비방하여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 하는 말들을 하지 맙시다. 언어는 자신의 교양의 수준과 신앙의 성숙 정도를 드러내는 척도입니다.

셋째 \"숨은 봉사생활\"입니다.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자기를 죽이고 포기할 뿐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기꺼이 투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대가없는 봉사입니다. 그러나 봉사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게 하기에 봉사는 영혼의 충족감을 줍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인생의 만족이 무엇인지 봉사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2001년 10월 14일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를 섬기는 부족한 종 이 종 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