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3년 1월 1일)
- 골로새서 1장 15-23절
- 설교자: 손신일 목사
- 23.01.01 한국어예배 - 손신일 목사.docx
<골로새서 1:15-23>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2023년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새해를 맞아 주님께 있는 소망에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해에는 소망의 말씀이 어울릴 것입니다. 소망은 바라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소원이, 장래, 실현하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언젠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가능성이 보일 때 소망이 생깁니다. 전혀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일에 소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이 아닌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소망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가능성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소원(욕망)은 가질 수 있어도, 대통령이 된다는 소망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려면 그 일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가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소망의 빛이 켜지는 것입니다.
‘소망’이라는 말처럼 한자의 바랄 ‘망’ 자가를 포함하는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 바라는 마음, ‘바람’이 우리 마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소망, 희망, 대망, 욕망, 선망, 실망, 절망 등이 곧바로 생각납니다. 다만, 같은 바라는 ‘망’ 자가 사용되어 있어도, 그 뜻은 각기 다릅니다. ‘욕망’도 ‘소망’도 바라는 바를 일컫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 뜻하는 바는 전혀 달라집니다. ‘욕망’은 육신의 욕심, 소유욕이나 명예욕 등 탐욕이 담긴 것(이기적인 바람)인 한편, ‘소망’이라 하면, 개인의 바람이라 하기보다는, 모두가 함께 바라는 것, 즉 모든 사람의 행복이나 세상의 평화와 같은 선하고 진실한 일의 성취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소망은 욕망과는 달리, 우리 마음속 깊은 데서 복받쳐 오르는 바람, 기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큰 부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나의 소망이 될 수도 있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나의 욕망인 것입니다. 한편,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소망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욕망은 개인의 제멋대로의 바람이지만, 소망은 함께 살아 가는 사람들이 어울려서 바라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욕망은 세상에 죄를 낳을 것이며, 소망은 세상에 빛을 비칠 것입니다. 욕망은 육에서 나와 사람에게 선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소망은 욕망이나 선망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바람, 영에서 나오는 바람일 수 있습니다. 소망은 우리의 죄 된 욕망과는 구별되며, 죄에 물든 욕망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질 때 솟아오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망의 반대말은 실망, 혹은 절망이 되겠습니다. 소망을 잃는 것이 실망이고, 소망이 끊어지는 것이 절망입니다.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실망하고 욕망이 끊겼다고 생각할 때 절망을 느낍니다. 실연하거나 대학 수험에 실패하거나 하면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절망하고, 절망하고 자살하기에 이르기도 합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절망은,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한탄하는 절망입니다. 세계에 소망이 보이지 않다고 절망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많든 적든 간에, 자신의 생활에서의 바람에 관여하는 일로 실망하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절망이란, 자신의 소원/욕망이 끊기는 절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나 세계에 소망을 갖지 못한다는 절망일 것입니다. 그 절망 — 세상에 소망을 갖지 못한다는 절망은, 바꿔 말하면, 세상에 믿을 만한 것을 찾지 못한다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무엇이든 믿는 것이 있을 때 사람은 소망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 것을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절망합니다. 그리고 소망을 잃었을 때,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죄에 물든 삶에 빠지고 마는 것이 아닌지요?
사람이란 누구든지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는 실망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지만, 사람 자신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욕심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사실에 견디지 못하고, 욕망의 포로가 되어 죄에 빠지거나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소망 뿐입니다.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절망하지 않게 사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소망이 흔들리지 않는 진실한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인간의 소망의 출처에 대해 말해 주는 ‘판도라의 상자(항아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우스 신이 인간에 대한 분노에서 재앙을 가져오기 위해 판도라라는 여자(선물이라는 의미)를 만들게 하여 지상에 보냅니다. 그때 판도라에게 하나의 상자를 가지게 하고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고 명합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매혹적인 상자였습니다. 결국 판도라는 호기심에서 상자를 열어 버리는데,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온갖 종류의 재앙들이었습니다. 역병, 슬픔, 결핍, 범죄, 욕심, 질투 등 인간에게 재앙이 되는 것들이 이 상자에서 튀어나옵니다. 그것을 본 판도라는 서둘러 뚜껑을 닫습니다만, 이미 대부분의 재앙들이 세상에 들어온 후였습니다. 다만, 그 상자에 하나만 남은 재앙이 소망이었다고 합니다. 왜 소망이 재앙이 되는 지, 어떤 해석에 따르면 하나만 남은 재앙은 ‘미래를 알게 된다’는 재앙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미래를 알게 된다는 재앙’은 면할 수 있었는데, 만일 미래를 알게 된다면 인간은 소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온갖 재앙 속에서도 인간에게 소망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장래 일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가 말하는 그러한 소망, 단지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라도 바랄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소망이, 진정한 소망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장래 일이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나 슈퍼스타가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그러한 소망이 진실한 소망일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진정한 약속에서만 올 것입니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약속, 믿을 만한 약속이 있어야 진정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죠. 미래에 성취될 확실한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진정한 소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외에 어디서도 소망의 근거를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믿음직하지 못한 인간의 약속에서는 막연한 소망 밖에 주지 못합니다. 믿을 만한 확실한 약속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 외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약속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소망,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에 근거한 소망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안에 있는 소망입니다. 골로새서 1장 5절의 말씀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 복음의 진리 속에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는 소망은 우리를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며, 이 지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우리에게 주는 복음이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얻고 있다는 은혜의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진 죄 사함의 약속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진실하고 확실함을 증거하는 말씀이, 오늘의 골로새서의 말씀입니다. 1장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형상이십니다. 사람이 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을 분명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은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함께 하는 성도들의 모임,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또한 우리의 소망의 반석이기도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부활의 소망,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이어받도록 죽은 자 가운데서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이 우리의 소망(영원한 생명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에 근거합니다. 19, 20절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나님의 충만하신 사랑의 뜻이 그리스도 안에 가득 채워져, 그가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인해 세상에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 된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 인생들을 비롯한 만물이 영원한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되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은혜가 세워졌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화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하여 확고한 하나님의 약속이 된 것이며,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근거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 안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사는 소망이 주어진 것입니다.
21-23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 흔들리지 않고 머무는 한, 우리는 복음 안에 있는 소망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실망도 절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깨서 나를 흠 없는 자, 죄가 없는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다는 소망, (아직은 죄인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믿음 안에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이어받는 자가 되는 소망) – 이 소망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진실한 만큼, 결코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결코 살아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는 이 소망 외에, 사람이 소망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가 말하는 소망과 같은 애매한 소망 – 단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그러한 소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모래 위의 누각과 같은 소망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고 계시는 주 하나님의 말씀(성자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는 소망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 소망입니다. 이 믿음에 서 있는 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이 소망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망에서 벗어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는 소망’을 나누며 서로 격려하면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우리 꼬빌리시교회 다민족신앙공동체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