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1-11>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 성탄절 직전 주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성탄절은 거룩한 탄생의 날, 즉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보통의 인간들처럼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4,18)

죄로 엉망이 된 이 세상을 회복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두려움을 조장하거나 힘으로 찍어눌러 단번에 세상을 뒤집어엎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와 같으면서도 다른 한 인생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 그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놓는 방식,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초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1:21,25)

성탄의 밤은 고요했습니다. 떠들썩하지 않고 조용했습니다. 메시야가 그처럼 낮고 천한 곳에서 의존성과 연약함을 지닌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리라 예상하고 맞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탄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비롭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요란하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그분은 우리보다 몇 길 위에서 일하십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던 날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주시려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14:27)

히브리 전통 속에서 ‘평화’(샬롬)은 “관계의 온전함, 그리고 거기서 발원하는 조화와 번영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시 로마황제가 내세우며 추구하던 평화(팍스 로마나)는 힘으로 모든 소요를 잠재우며 로마중심의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것, 다시 말해 평화를 명분으로 한 전쟁수행이었고, 그 이후로도 여러 시대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 그 가짜 평화의 길을 답습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당신의 아들을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주시는 것, 그리고 그 아들의 생명까지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평화의 길이 되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압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평화가 어떤 것이라는 걸. 가난한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으로 들어와 함께 거하시고,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또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평화를 점점 더 풍성히 누릴뿐 아니라,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 그 참된 평화를 세상에 이루어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이 평화의 길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또 성령 안에서 교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위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2:1-2)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당시 빌립보교회 안에 분쟁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개, 그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두 여성도를 중심으로 교우들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빌립보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개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바울은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습니다. 또한 성도들에게 모든 면에서 같아지라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마음’을 품으라 말합니다. ‘같은 사랑’에서 발원하는 ‘같은 마음’, 즉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함께 품으라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이어지는 6-7절에서 바울은 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있으신 그분이 기꺼이 그 특권을 내려놓고 섬기는 자세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자기를 비워’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자기로 꽉 채우지 않고, 그 안에 하나님을 위한 공간,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있게 하는 마음을 말할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최초 인간의 죄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욕망 속에 그분의 명령을 어긴 데서 비롯되었음을 말합니다. 역으로 인간의 구원은 죄인이 우리가 자기 안에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안에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거할 때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바울은 이 겸손한 자기-비움의 영성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다툼이나 허영으로 일하지 말라!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라! 자기 실속만 차리며 살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도 돌보며 살아가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죄인인 우리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우리 안에 함께 품고 겸손히 서로 섬기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쉬운 일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에 말씀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서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5:7-9)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죄인들 가운데 함께 거한다는 것, 심지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결코 당연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것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과정이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가 함께 품어야 할 마음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저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삭개오 이야기를 거듭 떠올리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 삭개오의 집에 예수님은 기꺼이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삭개오를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삭개오는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누구든 들어와 함께 거할 수 있는 공간을 자기 안에 마련해 놓고 죄인들 가운데 함께 거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자기를 비우고 낮추었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그분의 영광으로 채우시고 높이셨습니다. 스스로 ‘종’의 길을 갔던 그를 모든 사람이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공의롭게 마무리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길은 자기-비움을 통한 겸손과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그분이 가신 그 길이 세상에 참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었고, 오늘날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우리 안에 품고 예수님 가신 그 겸손한 평화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