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23년 5월 7일)
- 마태복음 14장 13-21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마14,13-21.docx
<마태복음 14:13-21>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네 개의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여겨졌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일은 한 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 한번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기적을 통해 당시의 제자들이 깨닫고 배운 것,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이 깨닫고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셨습니다. 사람들 많은 곳을 떠나 잠시 따로 있는 시간을 갖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전도여행에서 방금 돌아온 제자들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고자 하셨습니다(막6:31). 그런데 예수께서 빈 들로 가신 또다른 이유를 암시하는 말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13) 예수님은 들으시고 떠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어 장사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헤롯의 칼날에 희생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무덤을 향해 가시지 않고 빈 들로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잠시 피하는 움직임이었을 수 있겠습니다. 그를 위협하는 ‘헤롯의 칼날’만이 아니라 그를 이용하려는 ‘대중의 요구’로부터 잠시 피하며 물러나는 움직임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무리가 듣고 여러 마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도착할 즈음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가르치셨다는 언급도 나옵니다(막6:34). 이처럼 쉬러 가시고 피하러 가셨는데, 그 빈 들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따라온 사람들을 예수님은 외면치 않으시고 ‘영접’하셨습니다(눅9:11). 이것이 뒤에 이어질 기적에 배경이 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의도하고 빈 들로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의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포용과 긍휼의 마음이라 할 것입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합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5) 현실적인 판단이요 제안입니다. 인원이 많습니다. 모두가 배고픕니다. 그런데 그곳엔 먹을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모든 사람을 위한 식사를 예수님과 제자들이 책임지는 건 무리입니다. 그들을 해산시켜 각자 알아서 식사를 해결하게 하는 게 상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의외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본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5장 32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내가 먹을 것을 주리라” 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그것을 제자들의 일로 규정하시고, 그들을 교육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빌립이 대답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개월치의 임금으로도 부족하리라는 현실적인 계산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돈으로 음식을 사서 그들을 먹일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질문을 하신 것은, 주님의 방법이 우리의 일반적인 접근법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깨우쳐주시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빌립과 다른 접근을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드레였습니다. 그는 거기 있는 것, 그들이 지금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아와 말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리고 뒤에 소심하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자신도 그것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님께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말씀하십니다. 이어, 아이가 내어놓은 그 적은 음식이 예수님 손에 들려집니다. 그리고 잠시후 기적이 일어나, 그것으로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께서 당시의 제자들에게, 또 오늘의 교회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역사는 우리의 현실적인 계산과 우리 능력의 범위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일의 필요성을 인식했을 때, 그 일을 성공시키기에 충분한 재원과 능력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를 기준으로 그 일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러므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크하는 일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일을 우리가 심사하여 추진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에 대한 첫 순종이자 주님의 역사에 시작점이 될 첫 예물로 우리에게 있는 그것을 주님 손에 내어드리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것이 우리 인간의 일이기 이전에 주님의 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도록 부르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분이 거기에 더하시고 신비롭게 역사하실 여지를 생각하고 소망하며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함께 품는 일, 그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있고, 그 결단이 섰다면, 안드레처럼 우리는 지금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을 소망 중에 주님 손에 내어드리는 데서 시작해 주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손에 들려진 그 빵과 물고기는 정말 소박한 음식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헬라어 원문에서 그 물고기는 ‘익투스’가 아닌 ‘옵사리온’이란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크고 실한 물고기(익투스)가 아니라, 크기도 작고 맛도 별로여서 그물에 걸려들어도 어부들이 그냥 바닷가에 던져버리는 고기입니다.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다가 흙을 털어내고 소금을 치고 말려서 먹는데, 그 아이가 그날 가지고 있다가 내어놓은 물고기가 바로 이 ‘옵사리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소박한 음식을 손에 잡으시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먹은 사람이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다 합니다. 오늘날에도 기적을 바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구상의 어떤 곳에서는 남는 음식이 너무 많아 음식쓰레기 처리에 골머리를 앓는데, 아직도 지구상의 어떤 곳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뭔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정말 기적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꿈꾸고 바라는 기적은 무엇입니까? 이천년전 그날에 있었던 기적은 소량의 음식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불어나 산처럼 쌓이는 ‘대박’의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손에서 빵이 쪼개지고 생선이 찢어질 때마다, 나누고 나누고 나누어도 계속해서 나누어 줄 것이 있었던 ‘나눔’의 기적이었습니다. 그 떼어 나눔이 모두의 배부름이 되는 기적이었습니다.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예수님은 이 나눔의 기적이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길 바라셨습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이 그날 먹은 음식은 예수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받은 음식이 아니라, 그분께 전해받은 제자들이 다시 그들에게 전해준 음식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셨고, 그 일이 실제 그들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향한 주님의 긍휼의 마음에서 비롯된 그 나눔의 기적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루어지길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 왜 음식이 남게 하셨을까? 남은 조각을 바구니에 거두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열두 바구니였을까? ‘열둘’(12)이란 숫자는 열두 제자를 연상시킵니다. 그날의 일정이 모두 마쳐진 후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손에는 남은 음식들로 가득찬 바구니 하나씩이 들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조각’, 즉 쪼개진 음식이었습니다. 그날의 기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억하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후에 제자들이 그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수중에 빵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염려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8:19,21)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우리 교회 다민족공동체의 날입니다. 우리 교회에 함께 속해 있는 다민족 교우들, 또한 우리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식사하고 교제하는 날입니다. 단지 먹는 일만 생각하면, 여기서 먹으나 저기서 먹으나 별 차이 없겠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먹는 것은 단순한 음식섭취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떡’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되새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찢긴 주님의 몸, 그 쪼개진 빵을 우리는 함께 먹고 동일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놀라운 나눔의 기적을 동일하게 은혜로 체험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 서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기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신 주님께서 우리가 함께 이루어가도록 부르시는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나눌 것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어진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에겐 언제나 나눌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고, 주님이 하시려는 일에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 기꺼이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적을 볼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