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큰 자

<마태복음 18:1-10>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멧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들이 이 질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곧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회복될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신이 서열 몇 위에 랭크될지 내심 궁금해하며 한 자리 차지하고 싶은 욕망에 불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이 대답은 제자들을 적잖이 당황케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천국에 이미 들어와 있다고 가정하고 그 질문을 한 것인데,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일부터가 근본적인 방향전환이 없이는 그 누구에게도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여기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는 마음에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스스로 결단하여 돌이키는 일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하던 일에 뭐 하나를 더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던 방향에 추진력을 더하여 기존의 목표가 성취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던 길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거기서 단호히 돌아서 그 반대방향으로 움직여간다는 의미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돌이킴’(convert)을 통해서. ‘회개’(repent)를 통해서. 그런 근본적인 방향전환이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에 이처럼 ‘돌이킴’ 혹은 ‘회개’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는 구원의 요건이 요한복음에는 ‘거듭남’이란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구원,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마치 새로 태어나는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 하시고, 이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5)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와 같이’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도록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로운 초청에 순수한 마음, 가난한 마음, 신뢰의 마음으로 나아와 응답하며 수용하는 모습을 가리킬 것입니다. 천국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포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는 어린 아이의 그런 속성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그 당시 어린 아이들의 사회적 위치를 염두에 둔 말씀으로 보입니다. 4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 아이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 때문에 그 사회 속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을 대변합니다.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 고대사회 속에서 어린 아이는 아무런 권세나 특권을 갖지 못하고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무력한 존재,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지위의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란 “Whoever takes the lowly position of this child”(NIV), 즉 ‘어린 아이의 낮은 위치를 취하는 사람’, ‘어린 아이와 같은 낮은 위치로 스스로 내려서는 사람’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보이지 않게 들어와 현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가장 위대하고 존귀하게 여겨질 사람은 세상의 높은 자리를 향해 올라서려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낮은 자리를 향해 스스로 내려서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현실과 너무나 반대이지 않습니까?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 애쓰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천국,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전혀 다른 통치원리, 전혀 다른 가치체계가 작동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천국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과는 다른, 완전히 전도된 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이킴’ 혹은 ‘거듭남’이란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일이 일어났나요? 이제 모든 것을 다른 틀 속에서 보고 계시나요?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계신가요?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 여전히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바라며 그 일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본 것일까요? 천국이 어떤 곳인지 과연 알고 있는 것일까요? 천국에서 누가 큰가를 따지기 이전에, 과연 그들은 천국에 들어와 있기는 한 것일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천국백성의 삶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2-45)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기 위해 말로만이 아니라 어떻게 삶으로 본을 보이셨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와 같은 낮은 위치로 자기를 낮춘다는 것, 세상의 낮은 자리를 향해 스스로 내려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뜻일까요? 5절 말씀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작다 여겨지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영접하는 삶, 즉 내 안에 그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용납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하나를 영접하면, 그것은 곧 우리 주님을 영접하는 일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작다 여겨지는 사람들을 자기 안에 용납하며 섬기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 주님께서 자신과 동일시하시며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며 영접하시고 섬기셨던 것을 생각하며 나도 그분이 귀히 여기시는 다른 사람들을 동일한 마음과 태도로 대하며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주 안에서 귀히 여기며 영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짓는 요소라면, 그와 반대되는 모습이 6절 이하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예수님을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란 그리스도인 중에 한 사회 속에서나 한 교회 안에서 작다 여겨지는 사람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신앙적 배경이나 성숙도로 인해 누군가가 교회 공동체 내에서 작다 여겨지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누군가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죄를 짓게 하거나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실수로 다른 누군가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도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나의 어떤 태도나 행동이 내 형제자매를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 즉시 자제하며 수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상황을 주님께서 너무나 심각한 잘못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심각한 잘못이어서 커다란 멧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벌로도 모자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그 일을 행하는 내 손과 발을 찍어 내버리고 그 일이 멈춰지게 하는 게 낫다,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업신여기듯 상대를 바라보는 내 눈을 빼어 내버리고 그 일이 멈춰지게 하는 게 낫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4:13)

당시 교회 공동체 안에 어떤 이들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채소만 먹었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한 분 주님만 계실 뿐이라는 믿음으로 아무 음식이나 거리낌없이 먹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정죄하였습니다. 이것이 공동체 안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14:10,15)

물론 바울 본인은 음식에 대해 자유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20) 하지만 그는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이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제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9:13)

그리고 말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1,7)

이렇게 행동하는 바울의 모습이 바로 ‘천국에서 큰 자’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온 세상 모든 죄인을 품으셨던 예수님의 넓은 가슴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 받던 삭개오의 집에 기꺼이 들어가셨던 예수님,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기꺼이 식탁에 앉으셨던 예수님, 그들이 회개한 후에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셨던 예수님,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확증해주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천국에서 큰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1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것을 기억하며 세상에서 작다 여겨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영접하며 섬기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