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3년 7월 2일)
- 렘220:7-13, 고후4:8-10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 렘20,7-13, 고후4,8-10.docx
<예레미야 20:7-13>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고린도후서 4:8-10>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 성경에서 우리는 이런 고백들을 접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이런 말도 듣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은 내 편이실까요?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의 편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저 사람이 아닌 나와 함께 하신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길 바라는 마음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공통되게 가진 마음이겠지만,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는 건 아닐 겁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셔야 합니까? 내가 어떤 마음, 어떤 모습으로 살든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셔야 한다고 우길 수 있는 근거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럼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정확히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정하실 일이지 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는 사람, 그는 확실히 하나님과 한 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길 진정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는 자신이 지금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예배 시작할 때 봉독했던 시편 118편은 과거 고난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던 한 사람이 현재 새롭게 닥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결단을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난 날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셔서 넓은 곳에 세우셨던 일을 기억하면서 시인은 새롭게 닥친 고난의 현실 속에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고관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다는 시인의 믿음은 ‘의의 문’, 곧 ‘여호와의 문’으로 들어가겠다는 결단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 의의 길, 곧 하나님의 편에 서는 길을 택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다리겠다는 결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 방식이며 세상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극심한 고난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악이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은밀한 우상숭배와 가난한 이들 대한 학대를 일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렘3:12) 그러나 백성은 듣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바벨론이라는 몽둥이를 들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하기로 결심하십니다. 그리고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거짓선지자들이 일어나 그럴리가 없다고 외칩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렘6:14)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렘7:4) 하나님의 전이 여기 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불길한 예언을 전하는 선지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를 조롱합니다. 모욕합니다. 배척합니다.
예레미야라고 그런 말씀 전하고 싶어 전한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주께서 전하라 하시니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순종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과 핍박입니다. 심지어는 가까운 친척들과 친구들조차도 그를 대적하여 들고 일어납니다.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작심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불붙는 것 같고 뼈가 녹는 것 같아서 토해내지 않고는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다 합니다.
그에게서 불길한 예언이 선포될 때마다 박해도 심해져갑니다. 예레미야 20장 3절에 나오는 ‘마골밋사빕’이라는 히브리어가 당시 예레미야의 상태를 잘 묘사합니다. ‘사방으로 두려움’,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를 비방하고 위협하는 사람들, 그의 실수를 틈타 그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이 사방에 깔려 있습니다. 두려움이 사방에서 그를 엄습합니다.
그런데 11절에서 선지자의 어조가 바뀌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지금의 상황이 그러하지만,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나를 두렵게 하는 이들이 지금 사방에 깔려 있지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 그들은 이길 수 없고, 그 지혜롭지 못함으로 인해 결국 치욕을 당할 것이다! 비록 그 길이 고난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 참된 지혜이고 능력임을 선지자는 아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이 확신에 찬 담대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자기 속에 들어와 마음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 살아 역사하고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사방에서 엄습하는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거꾸러지지 않고, 맡겨진 사명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내 마음 아시지요? 내 중심을 보고 계시지요? 저 많이 힘들지만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의 편이심을 마침내 나타내 주옵소서! 이런 고백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 의롭게 행동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비방하고 배척했던 사람들도 어쩌면 자신들의 행동이 의롭다는 생각 속에서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기-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테스트를 받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종’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시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좀 더 유리한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좀 더 가까이 있다는 것,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적이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좀 더 이해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의 편에 서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좀 더 높다는 점일 것입니다.
결정적인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앞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 예례미야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도 찬양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오늘 신약의 본문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길에서 그가 겪고 있는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누군가는 질문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의로운 길을 편하게 갈 수는 없는 것인가? 고난 없이 복음을 전할 수는 없는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선하다면 의인이 거기서 고난받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불의한 현실 속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마 여러분 모두 잘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대세를 거슬러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고난을 예고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그 길에 고난이 없을 수 없겠죠.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베드로전서 2장 20-21절에도 말씀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이제 그리스도인이 겪을 고난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을 다시 보셔야 할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0-12)
오늘 고린도후서의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겪는 상황을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일로 묘사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난의 목적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목적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한 고난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역사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역사하는 곳에서 생명을 주는 예수의 복음이 증거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은 고난의 길일 수 있지만 또한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길이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비결이자, 그 생명의 복음이 세상에 증거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모임이 있어 스웨덴을 다녀왔습니다. 스톡홀름에 임마누엘교회가 있는데, 우리 교회처럼 다민족이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어떤 여자분의 동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려 600곡이 넘는 찬송을 쓴 스웨덴의 작사가 리나 샌델(Lina Sandell)의 동상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는 찬송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의 작사가가 이분이라는 것을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리나 샌델의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습니다. 신앙의 가정에서 리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도 시련은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스물여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가는 중에 사고로 아버지가 물에 빠져 돌아가시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 일은 리나에게 많은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통해 리나는 우리 인생에 닥친 고통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더 깊게 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녀가 만든 찬양의 가사들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주는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고해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고부터 삶은 쉬워진다” 심리학자 스캇 팩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삶이 쉽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으로 보냄받은 그리스도인의 삶도 쉬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삶이 그처럼 고되고 어려운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기를 기대한다면 그 삶을 잘 살 수 있는 비결을 결코 터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 살 수 있는 비결은 더 쉽고 편한 길을 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기를 선택하는데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합니다. 감당할 수 있는 새 힘을 공급받습니다. 새로운 지평 위에 서게 되고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신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그 외 모든 관계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마골밋사빕’, 사방으로 두려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방으로 에워싸이는 상황에도 위는 뚫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믿음으로 예수의 길을 따라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 사람 편에 서서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나 혼자 겪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기억합시다! 우리 앞에 살다 간 믿음의 선조들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자매들도 그 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시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