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교회

<사도행전 5:1-14>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 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초기 예루살렘교회에 발생한 한 가슴아픈 사건을 전해줍니다. 교회의 일원이었던 한 부부가 하루 사이에 모두 죽었습니다. 다른 교우들이 그들의 시신을 메어가 장사지냈습니다. 그 어떤 교회도 이런 일을 겪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자기 소유의 땅을 팔아 사도들 앞에 헌금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판 값을 다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 중 얼마를 감추고 일부만 가져왔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자발적인 유무상통의 공동체였습니다. 4장 32절에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말씀합니다. 역사상 등장했던 공산주의 사회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한 가지 큰 차이점은 이러한 공동체적 나눔의 실천이 의무적으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일 것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3-35).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가 관대한 물질의 나눔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한 일들이었습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가져와야만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중 일부만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4절에서 베드로는 이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팔기 전에도 그 땅은 당신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요?”(공동번역)

그렇다면 아나니아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속임’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일을 간파합니다. “아나니야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

아나니아의 잘못은 가져와야 할 것을 덜 가져왔다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땅 판 값의 일부만 가져온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 중 얼마를 감추고 일부만 가져와서는 그것이 전부라고 속인 것이 문제입니다.

그의 아내 삽비라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그녀가 들어왔을 때 베드로는 그녀에게 재차 묻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그녀는 대답합니다: “예 이것뿐입니다!” 그 거짓말과 함께 그녀도 죽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때라도 솔직히 고백했다면 그녀는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그렇게 행한 것일까요? 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벌여서 저런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당한 것일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들이 왜 그렇게 했을 것 같습니까? 사람들 앞에 자기를 드러내려는 마음, 교회 안에서 돋보이고 싶은 유혹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 바로 앞에 구브로 출생 레위 지파 ‘요셉’에 대한 소개가 간략히 나옵니다. 우리가 ‘바나바’란 이름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바나바’란 이름은 사도들이 그에게 지어준 새 이름이라 합니다.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 ‘격려(encouragement)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사도들이 그를 그렇게 부른 이유는 그의 행실 속에서 그와 같은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4:37)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 자기 소유를 팔아 기꺼이 헌금으로 내놓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칭찬과 존경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나도 저렇게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소위 ‘신앙심 좋은 사람’으로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얼마든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목사님이 혹시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그런 생각은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헌금을 내고도 화를 당하는 것을 보니,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겠다… 그런 생각도 안 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려는 마음, 내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마음은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 우리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 은혜로 받은 것을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또 하나님의 일에 내어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그 앞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많이 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결단을 따라 즐겨 내는 것이란 뜻입니다.

무서운 말일 수도 있고 감사한 말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드리는 예물 속에 담긴 마음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드린 동전 두 개가 다른 모든 사람이 드린 것보다 많다고 하셨는데, 이는 그녀가 드린 그것이 하나님께 어떤 마음으로 드린 것이었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눅21:1-4).

헌금뿐 아니라 구제와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말씀하십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1-4)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헌금을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8:3) 하였다는 내용이 성경에 나오는데, 이는 그들이 받은 은혜 가운데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말이지,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권면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베드로전서의 이 말씀이 헌신과 봉사에 대한 보다 건전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4:11).

저와 여러분의 헌신과 봉사가 하나님이 기뻐받으실 만한 것이 되길 바랍니다. 사람의 인정을 바라며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하십시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받은 은혜 안에서 마음에 정한 대로 즐겁게 하십시오. 힘에 지나도록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꼭 죽음까지 당해야 했을까? 어릴 때 교회 가기 전에 엄마가 헌금을 주면 가는 길에 상점 근처를 지날 때마다 유혹이 듭니다. 50원짜리 뽑기의 유혹. 제가 그 유혹에 넘어간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좀 떼먹고 거짓말 했다고 다 죽어야 한다면, 지금 여기 없을 사람 분명 있을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혹은 오늘의 우리보다 더 못된 사람들이어서 죽었다기보다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본보기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 속에 성장해가던 예루살렘교회에 닥친 첫번째 내부적 위기였습니다. 교인의 헌금과 봉사가 성령을 속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상황,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가보다 사람들 앞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느냐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상황, 비록 그것이 한두 사람의 문제였다해도,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용인된다면 교회는 어떤 모습이 되어갈까요? 하나님의 집,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가 그 교회다움을 잃을 수 있는 위기의 상황 속에 그들은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시체를 메어가 장사한 사람들은 그 교회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젊은이’라는 표현이 명확히 사용된 사례는 많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메어갔다 하지 않고,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였다”(6)고 명확히 밝힌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그들이 더 힘센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후에 교회의 지도자로 설 그들이 그날의 사건을 그렇게 피부로 느끼며 배우고 체험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 일로 인해 거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 앞에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리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하나님 체험이 인간에게 불러일으키는 정서를 “두려움과 매혹”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매혹시키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속이는 일을 용납지 않은 예루살렘교회는 계속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로 설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고, 믿는 사람들은 더욱 마음이 하나가 되어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 합니다. 이것은 공의회 종교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하지 말라고 금지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된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인간적 위협을 더욱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13절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이것이 무슨 말일까? 거기 모인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그 믿는 자들의 모임에 함께 했지만, 그 외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 모임에 끼어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전에 사도들이 당했던 것과 같은 핍박을 받을까 두려워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될까봐 두려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전에 신자인 체하던 사람들과 망설이던 사람들이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 일로 인해 신자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길 꺼리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는 자들의 모임을 “백성이 칭송했다” 합니다. 이유는, 교회 안에서 그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교회 밖에서 그들이 세상을 섬기는 모습이 바르고 선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교회의 교회다움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다른 모임들과 구별되는 차이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존재할 때, 교회는 모두가 들어오고싶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증거하고 있는 교회는 그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참으로 사모하는 사람들, 즉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복음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전에 ‘산 위에 있는 동네’(마5:13-16)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이 제시하는 틀 속에서 자신의 우월성과 유용성을 선전하며 그 틀 속에 계속 있기 원하는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틀 속에 자신을 위치짓고, 그 틀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며, 그 틀 속에서 자신의 이질성과 독특함을 드러내고, 그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원하는 사람들이 방해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교회는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인식하고 그 나라에 들어오기 원하는 마음을 품은 모든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문턱이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세상의 기준에 의해 차별받거나 배척되거나 방해받지 않고 들어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의 틀 속에서 교회를 통한 수지타산만을 따지는 사람들에겐 ‘문턱이 높은 교회’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들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 보았을 때 별로 매력이 없고 득될 것도 없으며 그저 불편해 보이기만 하는 교회라면 성공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턱이 없는 교회’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교회, 그러나 누구나 들어오고 싶지는 않은 교회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교회는 교회다운 실천에 초점을 맞춰야지 사람 수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쉽게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교회가 교회다움을 스스로 포기하는 우를 범할 때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그들이 들어와 경험하는 것이 어찌 복음일 수 있겠습니까? 선교학자 브라이언 스톤의 말처럼, 교회는 세상을 위해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존재할 때, 사람들은 거기서 복음을 인식하고 주님께 나아오는 모습을 봅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사람들이 교회로 오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가 그들에게 충분히 편안한 환경이 아니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그들이 복음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도는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16,22)

성령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삶으로 복음을 참되게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령을 속이는 자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성령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주의 복음 참되게 증거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