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자리에 앉으라

<누가복음 14장 7-11절>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 시대의 저녁 정찬 풍습에 의하면 손님들 앞에 낮은 식탁을 두고 U자 형태로 의자들을 배열하였습니다. 손님들은 왼쪽 팔꿈치로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었고 지위에 따라 좌석이 배정되었습니다. U자 형태의 중앙이 가장 상석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석에서 멀어질수록 그 사람의 지위도 낮았습니다.

어느 잔치 자리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네게 와서 ‘이 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무안해하면서 끝자리로 내려 앉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일종의 처세술 같은 느낌을 줍니다. 무안당하지 않으려면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 말씀 속에 담긴 의미는 훨씬 더 심층적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드러내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날 일들을 자주 이 ‘혼인 잔치’에 비유하여 말씀해주시곤 하였습니다.

 

약 이천 년 전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던 그 때로부터 그분이 다시 오실 그 때까지의 시간을 ‘말세’라고 부르는데, 오늘의 우리 역시 이 말세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 ‘말세’의 시간은 하나님 나라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손님들이 그 잔치 자리로 하나 둘 모여들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이미 이 땅에 존재하지만 아직 확실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그 나라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잔치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면 그들 모두를 초청하신 분이 오셔서 자리를 정돈함으로 잔치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 잔치에 초대받고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오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온 사람들이 초대한 주인 입장에서는 기특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잔치 자리로 나아온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지금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사람은 후에 주님과 함께 앉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며 낮은 자리로 밀려나리라는 것입니다. 반면, 지금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하는 사람은 후에 주님과 함께 앉은 사람들 앞에서 도리어 영광을 얻으며 상석으로 올려지리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얼마나 근사한 자리에 앉아 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청하신 주님 앞에서 최종적으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를 최종적으로 어느 자리에 앉혀 주시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10절에서 모든 청함받은 사람들에게 권면하십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여기서 ‘끝자리에 앉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일반적으로 겸손은 좋은 윤리적 미덕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겸손한 모습의 사람은 다른 이들의 호의나 존경을 얻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로 겸손을 가장하는 사람이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겸손한 체 하며 은근히 자신의 인격과 신앙을 자랑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늘 윗자리를 사양하고 끝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은 분명 겸손한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반드시 겸손한 사람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적 삶’이 일반적인 ‘윤리적 삶’과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일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속마음을 사람들은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믿음, 다시 말해, 기독교적 의미의 겸손은 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뜻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의 이 초월적 관점은 또한 ‘꾸며낸 겸손’을 간파하며 꾸짖습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겸손한 체하거나 천사를 숭배하는 자들에게 속아서 여러분이 받을 상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들은 보이는 것에만 정신을 팔고 세속적인 생각으로 헛된 교만에 부풀어 있습니다.”

참된 겸손은 다른 이에게 유익을 끼치지만, 꾸며낸 겸손은 다른 이가 받을 권리와 유익마저도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런 ‘꾸며낸 겸손’은 실상 ‘헛된 교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의미의 겸손, 즉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실제 모습 그대로 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걸 뜻합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실제보다 비하하거나 실제보다 과장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그게 보이는데 자기 눈에만 그게 안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의 실천과 관련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행위가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하나님이 우리 각각을 바라보시는 바로 그 모습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참으로 우리는 진정한 겸손을 행하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런 맥락에서, 앞에 했던 질문을 다시 합니다. ‘끝자리에 앉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선생’ 행세 하지 말고 서로 ‘형제’가 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과 유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교만과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기만 하고 본인들은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3장 2절에서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바로 이 예배당 앞벽에 부착돼 있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선생은 한분 ‘그리스도’시고, 우리 모두는 그분께 배우는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단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새겨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동등성’입니다. 우리의 선생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합니다.

다른 하나는 ‘연결성’입니다. 우리의 구속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한 피를 나눈 한 형제자매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많은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를 다른 누군가의 ‘형제’가 아닌 ‘선생’으로 인식할 때 발생합니다.  나는 가르치는 자고, 저 사람은 내게서 배워야 하는 자라고 생각할 때,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는 그리스도께 내가 귀를 기울이지 못할 때, 나는 변화시키는 존재고, 저 사람은 나를 통해 변화되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할 때,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그리스도께 내가 순종하지 못할 때, 나와 그는 어느 누구도 배우거나 변화되지 못하고 공동체는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교육학자이자 신학자 파커 팔머 박사는 그의 책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말합니다.

“겸손은 우리로 ‘타자’에게 주목하게 하는 덕목이다… 겸손은 타자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타자에게 순종하게 만든다.”

여기서 ‘타자’란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론 그 사람을 통해 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의미의 ‘겸손’이 없을 때, 우리는 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다른 누군가를 정죄하기 쉽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이러한 의미의 ‘겸손’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중히 여기며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끝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선생’ 행세 하지 않고 서로 ‘형제’가 되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함께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끊임없이 배워야 하며 계속해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목회자나 선교사나 중직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전에 선교단체나 교회에서 많이 배우고 훈련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선생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심을 다시금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내 작고 연약한 형제와 자매를 통해 나를 가르치실 수 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하십시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0,15-16)   

이곳 체코의 형제자매들은 저를 ‘Bratr farář’라고 부릅니다. ‘목사 형제’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호칭이 참 좋습니다. 친근감도 느껴지고 부담감도 덜 해 좋습니다. 딱 내가 서 있는 그 자리를 말해주는 것 같아 좋습니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누구든, 우리 모두는 연약함과 고귀함을 둘 다 지니고 있는 한 형제자매입니다.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대한다는 것은, 그와 나에 관한 그 어떤 사실들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죄인들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눈으로 나와 내 형제를 바라보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지극히 작은 형제 하나와 동일시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둘째로, ‘끝자리에 앉으라’는 말씀은 ‘귀빈’ 행세 하지 말고 ‘종’이 되라는 뜻입니다.
잔치의 윗자리는 주인의 오른쪽 자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 자리는 잔치 때 특별한 대접을 받는 귀빈석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처럼 좋은 자리에 앉아 특별한 대접 받기를 원합니다. 며칠 전에 딸아이가 속한 합창단이 출전하는 국제대회가 프라하에서 있었는데, 그날 저녁 시상식이 열리는 행사장에 제가 아이를 데려다주게 되었습니다. 딸아이는 동료들과 함께 아래층에 앉고, 저는 한 층 위로 올라가 앉을 곳을 찾았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첫 줄은 거의 차 있었지만, 둘째 줄부터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 둘째 줄 중간쯤, 앞에 사람이 앉지 않아 무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행사시작이 늦어졌고, 거의 30분 가량을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점점 자리를 채워나가더니, 제가 앉아 있던 줄에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이어 들어와 제 왼쪽 옆자리까지 사람이 앉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제 앞자리에는 그 오른쪽에 앉은 남자의 짐이 놓여있어서 사람들이 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용케도 저의 시야는 확보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제가 있던 줄로 사람 하나가 더 들어왔고, 저는 그녀가 제 오른쪽에 가서 앉도록 도움을 주려는데, 그때 제 왼쪽 옆자리의 젊은 여성이 저를 향해 말했습니다. “Excuse me! Can you change your seat for my friend?” 그것은 정말 천진난만한 어투였습니다. 자신이 지금 그 옆에 남자에게 얼마나 엄청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은 듯한 그 말투… 여러분이 저였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제가 그 즉시 “Of course!” 하며 오른쪽 옆자리로 옮겨갔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저의 인격을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것입니다. 관건은 ‘제 엉덩이가 먼저 움직이느냐, 제 입술이 먼저 움직이느냐’였는데, 결과적으론 제 엉덩이가 먼저 움직여졌지만, ‘그 즉시’는 아니었습니다.  약 2초 내지 3초 동안 정말 수많은 생각이 제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먼저 와 기다린 30분, 동영상을 찍어오라고 아내로부터 받은 미션, 그렇다면 이건 내가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가 아니냐는 내 속의 외침…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가 목사이고 그리스도인인데 이걸 가지고 저 여인과 얼굴을 붉혀서야 될 일이냐는 생각, 그렇게 하고 나면 이 자리에 계속 앉아있다 해도 내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느냐는 현실적인 판단…

 

결국 그렇게 저는 잠시 후 아무 말 없이 오른쪽 자리로 옮겨 갔고, 이후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한참을 제 앞에 키 큰 남자의 뒤통수를 쳐다보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그렇게 하길 잘 했다는 생각과 함께, “목사인 나는 앞으로 좋은 자리에 앉으려는 마음은 접고 사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미 앉아 있는 좋은 자리를 포기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그 이미 가진 좋은 것을 잃지 않으려는 욕망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뿌리치기 힘든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위 ‘기득권’이라 부릅니다. 

불행히도, 이 기득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그리스도인들 속에서도 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내가 그 동안 이만큼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썼으니, 이만한 대접은 받을 자격이 있다 생각하는 걸까요?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다보니, 23년간 목회했던 교회에서 조금 일찍 은퇴하며 남기셨다는 한 존경받는 목사님의 짤막한 은퇴사가 다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이니이다 할찌니라”

이렇게 누가복음 17장 9-10절을 인용하시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셨습니다. 

“무익한 종은 물러갑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따라 끝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의 귀빈 행세 하며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 교회에 온 지 오래되었다고, 내가 남보다 봉사를 더 많이 했다고, 더 좋은 자리에서 특별한 대접 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끝자리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에서 가까운 자리입니다. 잔치가 시작되기 전까지 기꺼이 그 자리에 앉기를 자처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주인의 종들입니다! 종들은 바로 그 끝자리에서 잔치 자리의 다른 손님들을 섬기고, 또한 초청받았으나 아직 오지 않은 이들을 섬깁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 15절 이하에 나오는 ‘큰 잔치 비유’를 보면, 잔치할 시각 바로 직전까지도 주인은 그 바깥의 사람들에게 자기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오도록 초청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라도 더 잔치에 들어오길 바라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 종이라면, 그 잔치 시각 전까지 한가롭게 안쪽의 귀빈석에 앉아만 있을 순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청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셨던 일을 이어가는 사명입니다. 바로 이것이 잔치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우리가 끝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종은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감투가 아니라 쟁기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 교회 직분을 탐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분들이 주님의 멍에를 메고 교회의 짐을 함께 지려는 마음으로 직분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해서, 주님께 생색을 내거나 바로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벌써 이 땅에서부터 ‘귀빈’ 의식을 갖고 살려하면 교만해지고 자꾸 불평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 충성스런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다간 이들에게 그 때 주님은 감당할 수 없는 영예를 안겨 주실 것입니다. “벗이여 올라 앉으라” 이렇게 그 종을 ‘친구’라 부르시고,  끝자리에서 윗자리로,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친히 옮겨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분이 오시면 자리가 정돈되고 잔치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끝자리에서 ‘형제’의 마음, ‘종’의 모습으로 겸손히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다가, 주님 오시는 그날 ‘벗이여 올라 앉으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