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

<누가복음 5장 3-11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우리가 잘 아는 시 중에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는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 갈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아무 의미없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어떻게 누군가에게 의미있고 아름다운 꽃으로 새롭게 인식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의 빛깔과 향기에 걸맞는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부르십니다. 우리 각각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시며, 꽃처럼 아름답고 의미있는 인생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뿐 아니라, 참으로 복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몸소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따라오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마치 우연처럼 시몬의 인생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또한 마치 우연처럼 우리 각자의 인생에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길로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삶으로 부르시는가?

첫째로, 나를 의지하는 삶에서 말씀에 의지하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본문의 배경은 게네사렛 호숫가입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중에 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것은 시몬의 배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배에서 말씀을 전하시니, 시몬은 꼼짝없이 그 말씀을 다 들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시몬은 그날 말씀을 들을 기분이 영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전날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얼른 그물 손질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좀 쉬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낙심과 피로의 순간에 시몬을 그 자리에 붙잡아 두셨습니다. 시몬이 말씀을 듣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이윽고 시몬을 주목하며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 웬 뜬금없는 말씀입니까? 어부로 잔뼈가 굵은 그에게 목수 출신 예수님이 조업 명령을 내립니다. 시몬은 황당하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무리들의 시선이 다 자신을 향합니다. 곤혹스럽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자기 경험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굳이 물고기를 잡겠다는 생각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저 순종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을 때,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에 주목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적용하기를,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엄청난 성과를 거두리라 기대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본문을 끝까지 읽어보면, 그 많은 물고기들은 예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보여주는 표지 역할만을 할 뿐입니다. 잠시 뒤 그것들은 예수님에게도, 시몬을 비롯한 어부들에게도 별로 중요치 않게 취급됩니다. 그들이 버려두고 간 물고기들이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 물고기들로 시몬을 부자로 만들어 줄 의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시몬이 그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하는 삶을 경험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으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면 엄청난 고기를 잡으리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만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약속은 없고 명령만 있었습니다. 따라서 시몬은 그야말로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삶이 언제나 이처럼 곧바로 누구나 바랄 만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의지하는 삶은 고난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말씀에 의지하는 삶은 시류를 거스르는 외롭고 좁은 길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말씀에 의지하는 삶은 당장의 불편과 손해, 그리고 희생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 자신이 아닌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주님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믿은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마치 우연처럼 시몬의 배에 오르셨던 예수님은 역시나 우연과도 같이 우리 인생의 배에도 오르십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 누군가의 인생의 배에 오르실 때는 시몬의 경우처럼 그가 낙심과 피로를 경험하고 있을 때입니다. 바로 그 때가 나 자신을 의지하던 삶에서 말씀을 의지하는 삶으로 우리 인생이 전환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경험과 지혜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경험과 지혜를 의지한 결과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었습니다. 다 각각 자기 지혜로, 자기 경험과 욕망의 틀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고,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올 메시아를 기다렸으나, 막상 그 메시아가 와서 참 하나님 나라 구원의 길을 전하자 그들 대부분이 이를 배척하며 하나님 뜻에 역행하였습니다. 

신학자 한스 큉은 당시 로마제국의 압제 하에서 구원의 날을 기다리던 유대인들 속에서 예수님이 홀로 걸어가셨던 하나님 나라의 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것은 적을 멸망시키는 대신 사랑하는, 보복하는 대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는, 힘으로 제압하는 대신 기꺼이 고난받는, 미움과 복수를 찬양하는 대신 화평케 하는 자를 축복하는 길이었다.”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사랑과 용서의 삶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와 동일한 삶으로 모든 사람을 초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생각처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내 원수에게 힘으로 복수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역사하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심으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기독교 복음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구원의 길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처음 믿은 순간 뿐 아니라, 이후 주님을 따르는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체험해 갑니다. 본문의 사건 이후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는 결단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 호언잠담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닭 울기 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고, 이후 면목없음에 다시 물고기 잡는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어느 날,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이어 그가 그렇게 했을 때, 또다시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주님이 찾아오셨음을 직감하고, 또다시 물고기와 배를 버려두고 주님께로 헤엄쳐 갑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깨닫습니다. 나 자신을 의지할 때 그 결과는 참담하지만, 말씀에 의지해 순종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안 것은 이 날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그는 요한의 제자였던 자기 형제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처음 만납니다. 이로 보건대, 베드로는 비록 못배운 어부였을지는 몰라도,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그의 고향집에는 중한 열병을 앓고 있던 그의 장모가 있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시몬의 장모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 일을 계기로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언가를 얻고자 그분을 찾기 시작합니다. 한편 베드로는 다시 생업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물고기를 잡아 가족을 부양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업의 터전에 이날 다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히자, 시몬은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결국 두 배가 물고기로 가득차 잠길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시몬 베드로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립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의 이 갑작스런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좇아다닐 때는 언제고, 이제는 왜 자기를 떠나달라 요청하는 것입니까? 왜 갑자기 그는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제까지 베드로는 에수님에게서 무언가를 얻길 기대하며 그분을 좇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장모의 열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 자기 인생 최대의 물고기를 잡아 올렸습니다. 예수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의 기대를 놀랍게 충족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갑자기 그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이분은 내가 내 유익을 위해 적당히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인식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자신과 예수님 사이의 무한한 차이를 직감합니다. 그분은 그의 속마음까지도 꿰뚫어보실 것 같은 분입니다. 그분 앞에서 시몬은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한없이 속물 같은 자기에게 예수님이 왜 찾아오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신이기에, 그저 자기를 떠나달라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처음에는 어떤 유익을 바라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내가 구한 그것을 예수님을 통해 얻는 체험들을 통해 믿음이 점점 자라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계속 그 상태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저 내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고 신뢰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나 자신을 보다 정확히 보게 되고, 그렇게 나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알게 될 때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로부터 내 인생의 방향이 바르게 설정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말씀합니다.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리로다”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내 생존을 걱정하는 삶에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 구절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은 곧 예수님처럼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고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잡힌 물고기는 더 이상 그들의 관심이 아닙니다. 이제 그들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사람 살리는 일입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걱정하던 삶에서 이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삶으로 옮겨갑니다.

여러분, 물고기 낚는 어부와 사람 낚는 어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물고기 낚는 어부는 나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들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사람 낚는 어부는 다른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나의 생존을 무릅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 곧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12:24-26)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이 꼭 목회자나 선교사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지 예수님의 충만한 생명 안에서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일에 헌신된 모든 이들이 바로 사람 낚는 어부들입니다. 물고기 낚는 어부와 사람 낚는 어부의 차이는 그의 직업이나 직책의 차이가 아니라, 그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대상의 차이입니다. 목회자 중에도 자신과 가족의 생존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면, 평신도 중에도 자신의 생존이나 성공보다 복음으로 사람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의사로서 자신의 생존과 편안함보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구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다가 젊은 나이에 주님 품으로 돌아간 안수현이라는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청년 의사는 자기 것을 아끼지 않고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필요하다면 자기 시간을 내주었습니다. 누군가 필요하다면 찬양 테이프와 신앙서적을 선물했습니다. 그가 메고 다니던 검은 가방 속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책과 음반이 쏟아져 나와 필요한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의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피도 나누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한 헌혈이 30회가 넘었습니다. 적십자에서 주는 헌혈유공장 은장을 받았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2003년 군의관으로 입대한 청년의사는 2006년 1월,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서른 셋, 예수님과 같은 나이에, 예수님의 흔적을 좇아 달려가던 그 청년은 문득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내 생존만을 걱정하는 삶에서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에는 나 자신을 의지하여 살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적당히 이용하며 살았을 수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생존만을 걱정하며 살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후로는”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여 살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그리고 생명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살기를,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전에 익숙하던 삶의 자리를 과감히 박차고, 이전에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던 본문의 제자들처럼, 주님의 이 부르심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응답하며 복된 하나님 나라 삶의 길을 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