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3년 10월 15일)
- 마가복음 7장 1-23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 막7,1-23.docx
<마가복음 7:1-23>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왔습니다. 갈릴리로부터 들려온 소문을 듣고 예수를 직접 관찰하여 모함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건수를 하나 잡았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빵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조상적부터 내려온 전통을 따라 당시 바리새인들과 대다수 유대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일, 시장에서 돌아와 몸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일을 부정한 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비위생적이라는 의미를 넘어 종교적 의미에서 부정한 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예수께 따져 묻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모세의 율법에 기초한 유대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현실 세계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나눠집니다. 거룩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입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며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것들만이 거룩합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속된 것입니다. 거룩의 반대가 ‘죄 많은’ 것이 아니고 ‘속된’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된 것’이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사물들의 일반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속된’ 것은 다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세분화됩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태는 정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온갖 종류의 불결한 것들이 이를 부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죽음’과 같이 아예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어 결코 정결해질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보통 부정한 것이나 부정하게 된 것은 적절한 의식을 통해 다시 정상적인 정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죄나 질병 같은 여러 비정상적인 것들이 거룩한 것을 속되게 하고 정결한 것을 부정하게 했습니다. 역으로, 부정한 것을 정하게 하고 속된 것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희생 제사의 피가 갖는 주요 기능이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짐승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의 구분, 유출병이나 나병 같은 부정한 질병에 관한 규례 등 레위기에 기록된 많은 법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한 가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거룩한 것이 부정한 것에 접촉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이 구분을 가르치고 유지하는 것, 그래서 일반 백성이 정결 상태에 머물 수 있게 하고, 혹시나 부정하게 되었을 때 속히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이 정결한 백성 안에 계속 거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정결 규례는 이러한 세계관적 기초 위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모세의 율법에 직접 언급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랍비들이 만들어 반포했던 지침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구전되면서 권위와 구속력을 갖는 전통이 되었고, 여기에 각 시대별 필요가 반영된 구체적인 실천지침들이 계속적으로 추가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 이 정결 규례가 안식일 규례와 더불어 바리새인들에 의해 강조된 것은 이방세력의 압제 아래 있던 민족적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시적으로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정결 규례에 대해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 그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은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그 일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기에 어느덧 제자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상황적으로 손을 씻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수 있습니다. 늘 씻을 물을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계속 여러 곳을 이동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의 경우 매번 결례를 행하고 식사를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따져 묻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라 부르십니다. 가면 쓰고 무대에 서는 연극 배우와 같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란 뜻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깨끗함을 강조하는 그들이지만 실상 그 속은 더럽다는 것을 꿰뚫어보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현재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해 말씀하십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 말하지만 실상 너희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 예배는 정기적으로 드리지만 실상 그 예배는 사람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속 빈 관습일 뿐이다!
기원전 8세기 이사야 시대 유다의 왕과 백성은 당면한 앗시리아 군대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주변국 이집트를 의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음에도, 그것을 굳게 붙들고 순종하기보다 자기 마음이 이끄는 대로 더 쉽고 확실해 보이는 길을 따라 은밀히 행하였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의 이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영적인 눈이 감겨 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합니다. 너무나 오래 지속되어온 형식적인 종교생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마음,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 말하지만 실제 삶 속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습관적인 외식이 그 영적 인식 능력의 파탄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종교인들의 모습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본래 그 장로들의 전통은 성경에 기록된 율법만으로는 방대하고 복잡한 인생 제반사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계명을 삶 속에서 보다 잘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역전과 왜곡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계명이 그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계명 속에 담긴 그분의 마음과 뜻으로부터 이탈하여 악용되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례 하나를 언급하십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3) 하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출21:17) 하였건만,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고르반’(히:코르반)이란 말은 ‘하나님께 바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어떤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신앙적인 행동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의무를 하나님께 대신했다는 변명의 뜻으로 악용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물건에 대해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에 일부 사람들은 부모 공경의 계명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전통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걸까?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속에 담긴 그분의 마음과 뜻을 깨닫지 못한 채 막연한 의무감 속에서 그 계명들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이 시대 교회의 문제는 실천의 부족, 말씀을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데 있다고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사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깨달음이 없는 피상적인 신앙생활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천을 강조한 것으로만 보자면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을 따라갈 자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백성들에게 요구했던 실천, 그리고 그들이 자기-의를 드러내려고 했던 실천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속에 담긴 그분의 마음과 뜻을 깨닫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없었기에 그 실천들은 사람을 자유케 하는 실천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을 괴롭게 하는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를 일전에 비유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담배를 지나치게 많이 피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그러다 큰 일 난다고 좀 자제하라 말하곤 했지만, 그는 담배 많이 핀다고 다 일찍 죽는 거 아니라며 무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슴에 답답함을 느껴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폐에 얼룩이 두 군데 있군요. 암일 수도 있으니 다음달에 꼭 다시 오셔야겠습니다.” 그 후로 그 사람은 담배를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전에는 흡연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것이고 이제는 그걸 ‘깨달은’ 것이죠. 그게 다른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팔에 뱀이 한 마리 기어오르고 있는 채로 들어와서는 “여러분, 내 팔에서 꿈틀거리는 뱀이 보이시죠? 이게 물리면 삼십초 이내에 죽는다는 독사랍니다. 이놈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되죠. 그 상황에서 누가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정말 그 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이미 그 뱀은 그의 팔 위에 있지 않을 겁니다. 정말 깨달았다면 내가 그걸 내 팔에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통해 이미 내게서 떨어져 나갔겠죠.
이렇듯 지식과 깨달음, 아는 것과 깨닫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게 문제라 하지만, 실제 문제는 성경을 지식으로만 알고 깨닫지 못한 데 있다 할 것입니다. 깨닫고 깨어날 때까지 아마도 우리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근거로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깨달은 상태에서는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서는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성도님들과 인사를 나눌 때 가끔씩 듣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말을 좀 부정적으로 보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겠지…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설교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만났을 때 우리에게 실제 체험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걸 꼭 ‘은혜 받았다’는 말로 표현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렇게라도 표현하게 되는 무언가가 분명 있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그 날 접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는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체험이 그의 마음에 어떤 감동과 도전, 혹은 자유를 준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진정 하나님 말씀 속에 담긴 그분의 마음과 뜻을 깨닫는 체험이었다면 그에 따른 실천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담배를 끊어라, 팔에서 뱀을 떼어내라, 나쁜 것을 멀리 해라…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깨달음과 함께 뱀은 이미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경험이 적어도 한번은 있는 분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의 경험은 여러분의 삶에 이미 어떤 변화를 초래했을 것입니다. 그게 없다면 깨달은 게 아니겠죠. 그러나 한번의 깨달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의 여정 속에서 계속해서 부지런히 그분의 말씀을 깨달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대답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따르던 무리를 다시 불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툭 던지시고 다시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다 합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깨달았을까요? 여러분은 이 말씀을 깨달았습니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들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라는 말 아냐? 그렇죠. 문자적 의미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뭘까요? 그걸 알아야 이 말씀을 깨달은 거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까지 모두에게 바로 다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얘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가 그 비유의 속뜻을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하시고, 그 말씀의 속뜻을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십니다.
본문에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오죠.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 그리고 제자. 여기서 ‘제자’는 누구입니까? 한 번 더 질문한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말씀 속에 담긴 더 깊은 뜻을 듣고 깨닫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 그리하여 그분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기 성경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만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여기 적힌 내용은 그저 막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 이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고 깨닫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 걸음 더 주님께 나아갈 것이고 주님은 그에게 진리를 계시하실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이 소수의 사람들이 바로 예수께서 산상수훈 첫머리(마5:3)에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하신 바로 그 사람들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심령이 가난한 자로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 먹음으로 인해 부정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식물과 같이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들은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가기 때문에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요인은 오히려 사람 속에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을 기초로 만들어진 장로들의 전통이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결합하여 사람을 더럽게 하고 있는 현실이 이 예수님 말씀이 사실임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무엇인지 본문에 12가지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시간관계상 비슷한 것끼리 묶어 간략히 살펴보자면, ‘음란’, ‘간음’, ‘음탕’은 모두 “간음하지 말라”는 제 7계명과 관련되는 죄악입니다. ‘살인’, ‘악독’,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은 모두 사람을 향한 파괴적 언어와 행동을 가리키는 말들로 “살인하지 말라”는 제 6계명과 관련되는 죄악입니다. 도둑질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 8계명, ‘속임’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제 9계명, 그리고 ‘탐욕’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제 10계명과 관련되는 죄악입니다.
이 계명들을 인간이 어떻게 다 지킬 수 있겠느냐고 말하기 전에 이 계명들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해 먼저 깨닫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괴롭히기 위해 주신 계명들이 아닙니다. 사랑하셔서 주신 계명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율법은 약자 보호법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해하지 못하도록 막는 법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해자도 될 수 있고 피해자도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이 ‘사랑’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온 율법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랑을 온전히 실천할 능력이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다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셨건만, 보십시오, 전쟁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언제나 전쟁의 명분은 ‘우리’ 밖에서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그들’을 차단하고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이 우리를 더럽게 한 결과가 전쟁이라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총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 살인이 아닙니다. 흘기는 눈과 찌르는 말로도 사람이 죽습니다. 살인이 또다른 살인을 낳고, 거짓이 또다른 거짓을 낳습니다. 그러나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을 우리 속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문제이기에 이 죄와 죽음의 길에서 사람이 구원을 얻는 길은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 뿐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안에서 바로 그 일을 행하실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겔36:25-26)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거룩한 것이 부정한 것에 접촉하는 일을 차단하여 하나님이 정결한 백성 안에 계속 거하시게 하려는 율법의 목적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이는 순전히 거룩하신 이가 순전히 불결한 것인 죽음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었음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의 세계관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가 부정한 세상과 인류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바울의 말을 빌려 다시 표현하자면, 거룩하신 그분이 부정하게 되심으로 부정한 우리는 그분의 피를 통해 정결하게 되고 그분의 거룩함을 나누도록 구별되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부정한 십자가에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상실했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계시되는 이 거룩한 사랑의 능력이 그를 믿는 사람들 속에 변화를 창조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갑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을 쏟아내던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정결하게 하는 생명의 샘을 창조합니다. 정죄하며 죽이는 길이 아닌 사랑하며 살리는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12-13)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제자 베드로는 이처럼 깨달음을 통한 마음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그는 한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에 율법이 부정하다 규정하는 짐승들이 잔뜩 들어 있는데 그걸 잡아 먹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 하지 말라”(행10:15) 이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고 마침내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4-35)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날마다 더욱 깨달아가는 이의 삶 속에 나타나는 특징은 ‘사랑’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사랑의 길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나를 소중히 여기듯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며 이웃을 포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완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을 핑계로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거나 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이유로 그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을 내 입맛에 맞게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내 마음으로부터 나온 악한 생각이 나를 주관하려 할 때,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 앞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억지로라도 나를 멈춰 세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그분의 마음과 뜻을 날마다 더욱 깨달아가는 일을 통해 우리가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아 더럽게 할 것입니다. 사랑은 깨달음이 낳은 실천이며 진리로 자유케 된 결과입니다. 사랑은 이웃을 위해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또한 이웃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나온 악한 생각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거룩한 계명 앞에 나를 멈춰 세우는 일, 그것은 작지만 위대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 기억될 거룩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우리 속에 있지만 정결하게 하는 샘이 또한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 샘으로 나아갑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의 길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