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가복음 2:18-3:6>

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마도 그날은 금식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금식은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절제 가운데 기도와 참회를 행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매년 속죄일에 금식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가랴서(8:19)에 따르면,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속죄일 하루만이 아니라 일 년에 네 번 금식일을 지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 외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 즉 월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였다 합니다(눅18:12).

그런 금식일에 ‘사람들’, 아마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마9:14) 예수께 와서 묻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그 때는 금식하며 슬퍼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혼인잔치에 온 손님들처럼 즐거워하며 기쁨을 누릴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혼인식을 앞둔 신랑에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그 혼인잔치 손님들에 비유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도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9-30)

그렇다면 신부는 누구이며 혼인식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신부는 교회입니다(엡5:25-27). 예수 믿는 성도들입니다(계19:7-8). 바로 우리들입니다. 계시록에 따르면, 혼인식은 세상끝,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닥쳐올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날’이라는 말이 원어에 복수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것은 모든 시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무언가로 인해 예수님을 빼앗기는 날들 전체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날에는 그들도 금식할 것이라 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께서 금식의 효용성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그날에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금식하게 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께서 거기 그들과 함께 계신 그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다른 종교인들의 그것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잔치 중에 슬퍼하며 금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 그분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세리였던 레위를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로 부르신 일과, 이후 레위가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에서 벌인 잔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막2:15) 이처럼 당시 유대사회 속에서 정죄받고 무시받고 배척받던 사람들과 예수께서 기꺼이 한 식탁에 앉아 잡수신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과 환대의 표현이자 지금이 곧 구원의 때요 기쁨의 때임을 나타내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이며 그가 왜 오셨는지, 그 시대를 읽지 못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모습을 보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2:16)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11:19) 같은 상황에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입니다.

본래 금식은 하나님께 내 목소리를 닿게 하고자 스스로 절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일입니다. 이사야 58장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서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6-9)

금식은 단순히 내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얻어내려고 밥 안 먹고 시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정직히 돌아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또 다른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에서 진정한 참회와 회개를 실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일이 바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던 것에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를 내세우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비유 말씀 속에서 한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눅18:11)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이 바리새인이 아니라 그 옆에서 가슴을 치며 기도하던 세리였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인들의 가르침과 대립하며 충돌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 바리새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율법을 무시하거나 거스르는 내용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당시 종교인들에 의해 왜곡되고 오용되고 있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고 본래의 뿌리(radix)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래디컬한(radical)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막1:22,27) 여기 ‘새 교훈’이라는 말에 쓰인 ‘새롭다’는 뜻의 ‘카이네’라는 단어는 단순히 시간적으로 나중에 온 것(네오스)이라는 의미를 넘어 이전의 것들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카이노스)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새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하지만 또한 새 것은 사람들이 곧바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특징짓는 이 두 요소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음의 두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21-22)

옷이 낡았습니다. 구멍이 보입니다. 그러면 생각할 수 있는 손쉬운 해결책은 촘촘한 새 천을 잘라다가 낡은 옷에 대어 붙이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새 교훈’으로서의 복음은 유대교 율법주의라는 옛 틀 속에 결코 갇힐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옛 틀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새 것을 일부 갖다 붙이는 식으로는 문제 해결은 커녕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런 식으로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전에 만들어진 내 생각의 틀, 내 삶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게 필요하다 생각되는 부분만 취사선택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인의 삶에 변화가 없고 성장이 없고 불편함과 괴로움만 있다면, 그 원인이 이것이 아닐까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두 번째 비유에 답이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서는 새 부대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부대’라는 말은 물이나 술 등을 담기 위해 만든 큰 자루를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로 염소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 포도주를 보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죽 부대는 오래 사용하면 딱딱해지고 신축성이 떨어집니다. 이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게 되면 포도주가 발효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가스의 팽창을 이기지 못하고 부대가 터져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와 부대 둘 다 버릴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식과도 같은 이 사실을 들어 중요한 영적 진리를 전달하십니다.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겨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오심이 가져올 새로움도 기존의 낡은 틀이 아닌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틀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본문에서 ‘새 포도주’라는 말 앞에 붙은 ‘새’와 ‘새 부대’라는 말 앞에 붙은 ‘새’가 다른 단어라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의 ‘새’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헬라어 ‘네오스’에서 온 말이고, ‘새 부대’의 ‘새’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카이노스’에서 온 말입니다.

그렇다면 ‘새 포도주’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을 통해 전해지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교훈으로서의 복음을 포함해서,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구원의 역사들, 은혜와 진리, 새 생명, 새 영, 새 마음 등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새롭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이라 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잠재된 생명력과 운동력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이미 딱딱하게 굳어진 기존의 낡은 틀 속에는 결코 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을 담을 만한 본질적으로 새로운(카이노스) 틀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존재가 본질적으로 새로워진 ‘새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존재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속성 자체가 한 순간에 완벽히 변화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긴 여정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 가면서 우리의 인격과 삶 역시 점차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을 때 바로 우리에게 생겨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관계성의 변화, 그리고 존재 방식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모습으로 존재하던 내가 이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는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완벽한 인간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음 안에서 예수님과 연합할 때 우리 속에 성령이 들어오십니다. 이 성령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계속해서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새롭게 변화되어가는 새 마음, 새 심령, 오직 그것만이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새롭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을 계속해서 담아낼 수 있는 새 부대일 것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여기 이삭을 잘랐다는 말은 그것을 꺾어 손으로 비비어 먹었다는 뜻입니다(눅6:1)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합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신명기에 보면,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가 낫으로 이삭을 베는 일은 율법이 금하고 있었지만, 손으로 그 이삭을 따는 것은 율법이 허용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신23:2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의 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이 바로 그 일을 안식일에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추수나 타작의 일을 일체 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출34:21). 

예수님은 과거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며 몇 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허기졌을 때 행했던 일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날은 성소의 떡상에 진설했던 더운 떡을 물리는 날, 곧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날에 그는 제사장에게 요청하여 율법에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진설병을 자기도 먹고 자기 동료들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로 인해 다윗과 그의 동료들을 벌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쉼을 주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하신 날입니다(출20:8-11). 신명기에 보면, 안식일에는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은 물론이고, 자기 집의 모든 가축과 손님에게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할 것을 명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에게도 안식의 복이 주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명령하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도 전에 이집트 땅에서 종으로 있었던 것을 기억하라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바리새인들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이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자유케 하는 은혜로운 말씀이 아니라 사람을 억압하는 무거운 짐이 돼 있었던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처해 있던 식민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세의 영향력 아래서 자신들의 민족적, 신앙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당시 바리새인들은 무엇보다 안식일을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백성들이 실제 삶 속에서 이것을 실천하게 하기 위해 세세한 규율과 지침을 만들어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래 제정 취지를 다시금 분명히 천명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위가 그분에게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인자(단7:14), 즉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그분에게 주어진 주권과 권위로 안식일의 본래 취지와 의미를 다시 바로잡으시겠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거기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어의 문법구조는 그것이 후천적으로 생긴 장애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그 손이 오른손, 즉 일하는 손이었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주위를 둘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모두가 말문이 막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탄식하십니다.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십니다. 이어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 말씀하십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의 주장은 이것이었을 겁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낫게 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소. 다만 그 일을 안식일에 행하는 것은 옳지 않소. 그 사람이 생명이 위급한 상황도 아니니 말이요.”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선을 행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과 같다, 지금 생명을 구할 수 있는데 구하지 않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다”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설령 그것이 안식일이라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심으로써 그가 다른 엿새 동안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그날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통해 나머지 날들을 복되게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네 손을 내밀라!” 말씀하십니다.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일, 곧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엿새 동안 세상 속에서 하던 일들을 쉬는 날이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행하실 온전한 회복의 일을 소망하며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을 해야 하는 날입니다.

본래 유대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지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다음 날인 주일을 지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을 ‘주의 날’로 정하여 모였고,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간의 교제를 나누고, 또 안식을 누립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의 취지에 맞게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 각자가 오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 새 부대를 준비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