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18년 4월 1일)
- 요한복음 20장 11-18절
- 설교자: 온드제이 꼴라쉬 목사
- 연합예배 설교 20180401 - 요한복음20, 11-18.docx
2. Představme si sami sebe na Mariině místě. Co by se nám asi honilo hlavou, kdybychom uviděli prázdný Ježíšův hrob?
마리아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봤다면 우리의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떠 올랐을까요?
Něco se stalo, něco není tak, jak má být.
무엇인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일어났구나.
Jenže co jiného se mohlo stát, než že Ježíšovo tělo někdo vzal?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가져갔구나. 이런 생각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Někdo jeho tělo odnesl – kdoví proč a kdoví kam. Tak Ježíši nedají pokoj ani po smrti, říká si Marie.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구나 – 누가 어디로 가져갔을까. 예수님은 죽어서도 쉴 수 없으신 분이신가, 마리아가 홀로 생각합니다.
Ani po strašlivých mukách na kříži nenajde klidné a důstojné spočinutí, opět nemá, kam by hlavu složil.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끔찍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뒤에도 다시 머리 둘 곳조차 없는, 평안한 안식을 누리실 수 없는, 그런 분이신가.
Nejen, že Ježíš již není mezi živými, ale dokonce teď ani není možné pobýt u jeho hrobu a připomínat si jeho život.
예수님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들 속에 계시지 않는데 지금은 무덤 속에 조차도 계실 수 없는 분이신가 그 분의 무덤 곁에서 그 분의 삶을 추억하는 것조차 허락될 수 없는 것인가.
Marie hledí do tváře tajemství, které ale vůbec nevyvolává radost a naději, jaká by se na velikonoční neděli slušela.
마리아는 부활의 아침의 기쁨과 소망을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Jen dál rozjitřuje už tak bolavou ránu v duši a vyvolává pocit bezmoci.
마음 속에는 고통스런 상처로 가득하고 무기력감만 느낄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3. Marie přišla, viděla – a přece neuvěřila. Právě zrak, nejdůležitější orgán člověka, teď selhává.
마리아는 와서 보았지만 믿지않았습니다. 본다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보았지만 믿지않았습니다.
Marie vidí, a přece nevidí, co vidět má.
마리아는 보았지만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To, co je důležité, je pro oči neviditelné. A to, co je viditelné, může také klamat, vést mimo, dokonce někdy k pravému opaku toho, co je míněno.
눈에 중요한 것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것은 기만하거나 왜곡하거나 심지어 본연의 참된 것을 정 반대로 보게 할 수도 있습니다.
Prázdný hrob sám není důkazem vzkříšení – ani pro Marii, ani pro nás, ani pro historiky.
빈 무덤은 마리아에게, 우리에게, 역사학자들에게 부활의 증거가 아닙니다.
Nikdo neuvěří jen na základě prázdného Ježíšova hrobu. Ten je pouze znamením, které ale sami neumíme rozluštit.
예수님의 빈 무덤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빈 무덤은 단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활에 대한 단서일 뿐입니다.
4. Z pláče Marii proberou až dva andělé, kteří se náhle zjevují tam, kde Ježíš ležel.
마리아가 울고있는 중에 두 천사가 예수님께서 누워계셨던 곳에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Jenže ani toto další znamení nestačí. Ani jejich otázku Marie nepochopí.
그러나 천사들의 나타남도 부활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들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Proč pláčeš? To znamená: nemáš důvod plakat, máš naopak důvod k radosti, hrob tvého mistra je rozbit, protože už přestal být hrobem.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 질문은 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뻐하라. 너의 선생님의 무덤이 열린 것은 그가 더이상 무덤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Marie se ale nenechá vyvést ze svého zoufání a opakuje stále dokola – někam ho vzali, ukradli ho, proč to udělali, proč ho nevrátí zpátky, k čemu jim to bylo.
그러나 마리아는 절망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데려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곳으로 왜 되돌려 주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불평만 반복했습니다.
Ani samotní Boží poslové ji nemohou utišit. Marie nadále nechápe.
하나님의 사자들도 마리아를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여전히 부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5. Až pak dochází k setkání, které rozhodne.
이제 결정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Zpočátku ale opět hrozí, že povede jen k dalšímu nedorozumění.
그러나 이러한 만남 역시 처음에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Objevuje se Ježíš sám – jenže Marie ho nepoznává.
예수님께서 직접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Do třetice a naposledy Marie nechápe.
빈무덤 천사에 이어 세번째로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Snad je to zahradník, snad je to dokonce právě ten člověk, který Ježíše odnesl.
혹시 동산지기 아닐까, 혹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간 사람이 아닐까.
Opět se jí vynořuje tatáž myšlenka, s monotónní úporností. Odnesli ho – nebo snad ty sám jsi ho odnesl – pak jen řekni, kam, já už pro něj dojdu a přinesu ho zpět, naléhá Marie.
이러한 한 가지로 치우친 생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습니다. 혹시 당신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간 그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어디로 가져갔는지 나에게 말해주세요. 제가 거기로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다시 무덤으로 가져오겠습니다. 마리아는 애원했습니다.
6. Ježíš sám musí učinit rozhodující krok. Oslovuje Marii jménem.
예수님께서 손수 나서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Tímto oslovením proráží temnotu neporozumění, a proráží i temnotu velkého pátku a všeho truchlení po tom, co kdysi bylo, ale už není.
예수님께서 이름을 부르심으로 무지의 어둠을 깨뜨리십니다. 성금요일의 어둠을 깨뜨리십니다. 큰 슬픔의 어둠을 깨뜨리십니다.
Ježíš se dává sám poznat. Neukazuje ale při tom na sebe.
예수님은 당신이 예수님인 것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Zjevuje se tak, že hned zároveň buduje vztah a zve k sobě. Otevírá společenství.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즉시 당신과 관계성을 맺게 하시고 당신에게로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셨습니다.
A tak Marie vstává ze svého nářku a poznává, co se vůbec přihodilo.
그제서야 마리아는 슬픔으로부터 일어나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깨달았습니다.
Už není ochromena, jen ohromena. Již chápe a oslovuje svého mistra. Obrací se k Ježíši a zároveň i obrací směr svého žití. Ježíšovo oslovení člověka proměňuje.
마리아는 이제 더이상 부활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 할 뿐입니다. 그녀의 선생님에 대해 이해하고 그녀의 선생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 자신을 예수님께 향하게 하고 그녀의 삶의 방향이 예수님께 향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함은 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