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19년 11월 3일)
- 요한복음 14장 1-7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19.11.03 연합예배 설교 - 손신일 목사님.docx
1 일본의 다도(茶道)는 체코에서도 잘 알려져 있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茶道란, 차를 통해서 사람을 대접하는 예절을 가리키며, 차를 끓이고 마시는 동작에 아름다움을 구하는 동시에, 대접하는 자와 대접받는 자 사이의 정신적인 교류를 도모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영어로는 tea ceremony 라 번역됩니다만, 茶道는 한문으로 차의 길을 뜻하는데, 한자의 道는 여러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道路로써의 길이 있고, 사람이 따라야 할 길로써의 道德이란 뜻도 지니며, 중국철학에서의 道는 우주만물의 근원적인 규범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무술이나 예술에서 그 길을 탐구해 나간다는 뜻에서, 茶道나 柔道라는 말이 쓰이게 됩니다. 道라 함은, 단지 예능이나 운동에 그치지 않고, 그 용어 속에 정신적인 수련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해서 탐구함으로써, 진리라 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려는 의욕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茶道나 柔道의 道에는 종교적인 요소를 볼 수 있겠습니다. 차는 맛있게 마시고 즐기면 그만이지 않냐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만, 茶道는 거기에서 정신적인 뜻을 찾아내고, 종교적이라 할 수 있는 의식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2 일본 고래의 종교를 神道(Shinto)라 부릅니다만, 한문으로 神의 道라 씁니다. 여기서 쓰이는 道도 종교적인 개념으로써의 道입니다. 神道라는 말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神을 숭배하는 예절이나 의식이며, 사람이 神과 관계하기 위해서 취해야 할 길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종교를 일본에서는 그리스도교(基督敎)라고 부릅니다. 영어의 Christianity의 번역입니다. 일본어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는 뜻이 됩니다. Church는 敎會, 가르침의 모임이라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개신교가 들어왔을 때, Christianity를 그리스도敎와 그리스도道의 어느 쪽으로 번역하느냐 하는 의논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道로 정착하고 교회도 道會로 번역되었다면, 일본에서의 복음의 전개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을 지 모릅니다. 가르침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道를 구하는 일에 보다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면,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는지요? 믿음은 가르침이라기보다는 道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은 그대로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敎보다는 그리스도道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교회가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함께 걸으려고 할 때에, 보다 주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지요? 가르침은 심판을 내포하지만, 함께 걸음은 용서를 전제하고 있을 테니까요.
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거처를 준비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준비되어 있는 거처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준비하시고 우리를 영접해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그 거처가 구체적으로 어떤 거처인지 알지 못합니다만, 거기가 우리의 구원의 자리이며 영원한 거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에 사로잡힌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 속에 있는 흔들리지 않는 거처가 되겠습니다. 그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는 거처가 마련되어 있기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언젠가 그 거처에 영접받는 때가 옵니다.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 길이야말로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있는 우리의 영원한 거처에 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4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게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길을 헤맬 일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곳에서도 스마트폰이 있으면 나비게이션 앱이 어디든지 안내해 줍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가야할 곳, 나의 영원한 거처를 스마트폰으로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길을 잘못 알고 헤매기만 합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하나님의 집은 공간도 시간도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찾으려고 해도 계속 헤맬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길을 찾아 나섭니다. 옛사람들이 갔던 길이 옳은 길인 것 같아도, 내가 가니 아니었다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 길은 이전에 누군가가 다닌 길일 지 모르지만, 내게는 전혀 새로운 길이 됩니다. 내가 따라야 할 길이 주님께서 가신 길이라고 해도, 나는 그 길을 알 수 있는 것인지요? 길을 알았다고 해도, 과연 그 길을 따를 수 있는지요? 주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아버지 하나님께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길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길인 동시에 진리이며 생명이라 하십니다. 이 길이 인도하는 하나님의 집에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사람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고, 진리로 다다르는 길을 찾습니다만, 진리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되겠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가 진리를 알고 생명에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는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길이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예수께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길이시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고 예수와 함께 걸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 집에 우리를 위한 거처를 마련해 주십니다. 마련하시고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아버지 집에서의 거처를 결코 잃지 않습니다. 마음의 근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길을 헤매는 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이 주와 함께 걷는 길이 되는 것이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되는 것입니다.
6 믿음은 종종 길로 비유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은 그리스도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은 눈에 보이는 길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 길이 되는 것이며, 그 길은 또한 예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茶道에 예절이 있듯이, 그리스도의 길에도 예절이 수반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길의 예절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예배의 형태가 있다 하더라도, 모든 예배는 그리스도의 길의 예절로 이해해도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체코 교회에서는 체코의 예배 예절이 길러져서 지금의 예배의 형태가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같은 것이고, 각기 특징을 가진 예배의 예절이 있습니다. 예절이라는 형태만으로는 길이 되기 어렵습니다만, 거기에 그리스도의 영이 불어온다면, 그리스도의 길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배의 예절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우리 꼬빌리시교회의 연합예배도, 어떤 의미에서 특수한 예절을 가진 예배의 형태일 지 모릅니다. 그래도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길을 구하고, 함께 걸어가는 마음을 품는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아버지 집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연합예배를 통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함께 모시는 우리 꼬빌리시교회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