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8년 5월 27일)
- 사도행전 16장 6-10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잠시 멈추게 하실 때 - 사도행전 16장 6-10절.docx
처음엔 어떻게든 거기서 나가려고 별 짓을 다 하게 되더라구요. 빠진 손잡이를 홈에 대고 연신 돌려보질 않나, 자물쇠 자체를 뜯어낼 궁리를 하질 않나, 결국 이도저도 안 되니 몇 차례 문을 두드려보다 지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정말 어이없고 황당했습니다. 반대쪽에서 누군가가 손잡이를 살짝만 돌려줘도 그냥 열리는 문인데, 이제 두 살 밖에 안 된 저희 딸 한울이도 손쉽게 해줄 수 있는 일인데,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자기 구원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현실을 인식하고 일단 상황을 인정하고 나니, 그 다음에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내가 이렇게 못나가게 됐는데, 밖에 일은 괜찮을까? 지금의 그 상황이 어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따져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맡은 역할을 못했으니 무책임한 사람 소리를 듣게 되겠지? 내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설마 아주 없지는 않겠지? 나중에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설명하면 이해는 해줄까? 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이해는 무슨… 괜한 핑게댄다 생각하진 않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처음 느낌 만큼, 엄청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러고나니, 이제 마음이 좀 차분해지면서, 두 다리를 뻗고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뭐하지? 한 시간이 될 지, 두세 시간이 될 지 알 수 없는, 그 무료한 기다림의 시간, 정말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그 생산성 제로의 공간에 변기와 단둘이 남겨지고 나니, 비로소 본질적인 질문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이 왜 지금 나를 여기에 가두어 놓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분이 작정하고 하신 일이라고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이 ‘기도’였습니다. 기도하라 하시는 거구나! 왜냐하면, 그야말로 거기서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도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무슨 기도를 해야 하나? 나를 여기서 꺼내 달라고? 이유가 있어 나를 가두신 분에게 꺼내달라고 기도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싶었습니다. 그냥 “하나님 제가 여기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는, 그냥 그분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저에게 해주신 특별한 말씀이 있었을 것이다, 내심 기대하셨을지 모르지만,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좀 기대하긴 했었는데, 끝까지 특별한 건 없더라구요. 물론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전혀 안 올라왔던 건 아니지만, 다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점차 그런 게 다 부질없게 느껴지고, 그냥 하나님 한분만 크고 중요하게 다가왔습니다. 말하자면, 그때 저는 다른 때보다 좀더 집중된 태도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른 것들에 방해받지 않고 잠시 그분과 단둘이 시간을 보냈던 셈입니다. 지나고나서 생각하니, 바로 그것이 그때 하나님이 제게 원하셨던 일 같습니다. 그게 답니다. 생각보다 일찍 가족들이 돌아왔고, 저는 저희 큰 딸에 의해 풀려났습니다. 한 시간여만에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후 제게 달라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나고 생각하니, 차이가 좀 느껴지긴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이 제 마음에 미치는 영향력이 작아졌다고 표현하면 적절할까요? 제 속에서 하나님이 커지니, 다른 것들로 인해 염려하거나 흔들리는 모습은 작아지고, 그 무엇보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기만을 구하게 되더군요.
이처럼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추게 하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의 좋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가던 걸음을 멈추고 가만 있을 수밖에 없게 하시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힘들어지기 쉽습니다. 가뜩이나 바쁜데, 이거 아니라도 힘든 게 많은데, 한시가 급한데, 왜 지금 이런 일이? 그때 우리 마음이 힘들어지는 이유는 내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로 인해 심각한 문제나 안 좋은 결과를 낳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이 어느 순간 우리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신다면, 그건 그때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 하나님을 찾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그때 우리가 하나님이 바라시는대로 그분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 마음이 다시금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다면, 이후 우리의 삶의 걸음은 이전과는 분명 많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드로아의 땅끝에 멈추어 선 바울이 그날 밤 거기서 경험한 일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아마 저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그 상황에서 질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지금 여기에 멈춰서게 하신 것일까? 그리고 아마 저처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 기도하라 하시는 거구나! 그리고 그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날 밤 보았다는 환상은 아마 그 기도의 연장선에서 주어진 것일 겁니다. 그것은 한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요청하는 환상이었습니다. 유럽 대륙으로 건너와서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달라 요청하는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전하셨을까? 천사를 보내 “마게도냐로 넘어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그 당사자의 얼굴과 입을 통해 그 요청을 직접 듣게 만드셨을까? 확실한 건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드로아에서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면서 바울은, 그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무슨 동기로 하고 있는지 다시 정직히 돌아보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그는, 바나바와 다투고나서 그렇게 따로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할 어떤 가시적인 결과를 내어놓아야 할 것 같은 일종의 자존심에 의한 부담감을 은연중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는 애쓰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부자유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드로아에서 기도하는 중에 어쩌면 그는 다시 깨닫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통해 보여지는 가시적인 성과가 아니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 복음 전파 사역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 드로아에서 그 마음이 회복되었기에 바울은 그 환상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이고 즉각 순종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하나님께서 잠시 멈추게 하신 그 자리에서 바울은 무엇이 동기가 되어 어디로 가야할지,
다시 하나님의 분명한 싸인을 받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