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변화시키는 사랑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사람은 바뀌는가? 사람은 변화될 수 있는가?

사람, 안 바뀝니다. 목사님 이건 제가 성경말씀 다음으로 확실히 믿는 진리입니다… 누군가가 바뀌길 기대하느니 차라리 나를 바꾸는 게 낫습니다…

일전에 어떤 분이 제게 해주신 말입니다.

예전에 그랬던 사람은 지금도 그러고 앞으로도 그러기 쉽다는 얘기지요.

아마 이 말에 공감하시는 분 많을 줄 압니다. 저 역시 일정 부분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제가 백 프로 동의하긴 어렵겠습니다.

제가 목사라서 그렇다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절대 바뀌지 않는다 생각했다면 저는 목회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바뀔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 그러길 소망하며 지금도 이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여전히 부족한 모습이 많지만, 저는 전보다 제가 좋게 변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교만한 말로 들리지 않길 바랍니다.

만약 제게 어떤 좋은 모습이 보인다면,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제 안에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저는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의 좋은 변화들을 겪으신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 모습이 부족하다 하여, 내게 일어난 좋은 일들까지 폄하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비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잘 안 바뀐다”는 말의 의미를 이런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그 일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나에게는 누군가를 변화시킬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의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이 결코 변화될 수 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얼마든 우리 안에 좋은 변화를 일으키실 수 있다.

그날 이런 대화를 재미있게 주고받는 중에 제 머리에 떠오른 성경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삭개오 이야기였습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한 사람 안에 좋은 변화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인상깊게 보여줍니다.

그 변화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대하신 방식, 즉 ‘사랑’이 담긴 그분의 말과 행동에서 말미암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죄인을 변화시키는 사랑’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요?

 

첫째로, 그 사랑은 기대하며 바라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마을에 들어오시니 삭개오가 그분을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그 곳에 이른 예수님은 잠시 걸음을 멈추시고 눈을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분 가까이로 그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속에는 그 사람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말을 걸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도, 그럴 만한 자격이 가장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 말입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삭개오는 동족의 혈세를 빨아 자기 배를 불려온 돈 많은 세리장…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우리 역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삭개오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삭개오가 그간 어찌 살아왔는지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 관한 더 중요한 사실에 집중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키작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보려고 미리 달려가 나무 위에 올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그 간절하게 기다리는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말미암은 일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삭개오에 관한 다른 모든 사실들보다, 그 역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구원받아야 할 잃어버린 양이라는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죄인을 변화시키는 사랑은 이처럼 ‘기대하며 바라보는 사랑’이 아닐까요?

여기서 ‘기대한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에게서 뭔가 선한 것을 기대한다기보다는,

그 사람 안에서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기대하며 그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참 사랑은 기대 속에서 상대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대 속에서 상대를 자유케 합니다.

나의 기억, 나의 틀 속에 그를 가두지 않고 하나님의 가능성에 그를 내어 맡깁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그렇게 기대하며 바라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뭔가 좋은 일을 시작하셨음을 감지하셨던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 잠간의 만남에서 그치지 않고 그와 좀 더 시간을 갖길 원한다 하십니다.

그러고보면 사랑은 상대방에게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냐,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나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 방해하는 장애물은 바로 내 안에 존재합니다.

누군가를 얽어매고, 또 누군가에게 벽을 세웠던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사랑은 나를 자유케 하고, 나로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 우리는 내 옆에 한 사람을 기대하며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내가 이루어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내 사랑의 시선이 가닿은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입니다.

 

둘째로, 죄인을 변화시키는 사랑은 신뢰하며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유하겠다 하시자,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이 영접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이 말 속에 담긴 뉘앙스는 이런 게 아닐까요?

저 삭개오 같은 사람과 어울려 그 집에 들어가다니 저 예수란 사람 다시 봐야겠네…

세상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 혹은 인간적으로 참 별로다 싶은 사람들…

그들을 배려하고 돕는 일을 열심히 잘 하는 사람도

자신이 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는 건 못견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 수군거림 속에서도 삭개오의 집에 함께 들어가심으로써,

기꺼이 그와 같은 부류로 취급됨을 감수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 하든 아버지와 그의 관계는 변하지 않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 그리 하심으로써 같은 믿음을 삭개오 안에 심어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요?

하나님은 참으로 신뢰할 만한 분이시며,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거기 우릴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처럼 그의 집에 함께 들어가심으로써 알려주려 하셨던 게 아닐까요?

 

요한복음 8장에, 음행중에 잡혀온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녀를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할 것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말 없이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기 시작하십니다.

뭘 쓰셨을까? 그것이 우리의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누구도 정확한 답은 알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별 내용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조금은 능청스럽게… 다만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을 뿐이었는지도…

그들이 재차 삼차 대답을 요구하자 이에 일어나 한 마디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셨다 합니다.

여기까지 읽으니, 비로소 반복되는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몸을 굽혀

모두가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한 여자를 앞에 두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나는 저와 달라 생각하고 있는 그곳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땅바닥에 내쳐진 여인를 향해 몸을 굽히셨습니다.

더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그 생의 밑바닥에서 그녀가 손을 뻗어 붙들 수 있는 최후의 끈이 되어주기 위해서였을까요?

누구든 이 작은 생명을 해하려 한다면 내가 가만 있지 않겠다는 소리없는 엄포였을까요?

아니면 오직 그녀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비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전략적 움직임이었을까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 오직 예수님만이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죄의 속박에서, 사람을 향한 움직임의 뻣뻣함에서…

여기서도 우리는, 기꺼이 그녀와 같은 부류로 취급됨을 감수하겠다는, 그분의 사랑의 의지를 봅니다.

결국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어른에서부터 젊은이까지 다 그 자리를 떠납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그녀가 자유케 되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그녀가 그 죄의 삶에서 떠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그녀를 정죄함으로 이루려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몸을 굽히셨고 그녀 가까이에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그러한 죄인들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한 사람의 소행과 책임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는 더 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죄의 상태’에 놓여 있고, 따라서 이 세상은 마치 죄의 사슬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곳과 같습니다(Sin).

거기 속한 사람들은 그 죄의 영향력 아래서 서로의 인간성을 파괴하며 살아갑니다(Sinning).

불행히도 그 안에 얽혀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밖으로부터만 가능하며, 그 일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합니다.

이 구원의 체험이 우리를 죄의 길에서 해방하여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죄 짓는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 짓는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 영원히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구원이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겐 우리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 고난당하는 사람,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을 신실하게 대함으로써,

우릴 홀로 버려두지 않는 분을 믿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진실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을 불러일으킵니다.

본문 8절에서 삭개오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전혀 변하리라 기대치 않았던 사람에게 일어난 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는 그분이 자기같은 죄인과 함께하시고자 사람들의 조롱과 냉소를 감수하시는 모습을 보며,

이제는 그 자신이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차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여 보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그의 호칭이 ‘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봅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는 것,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는 것,

모두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려는 일들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 속에서 우러난 자발적인 회개와 결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마리아라는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뭇고 자기 머리털로 닦습니다.

그걸 본 제자 가룟 유다가 말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일이 중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에 사랑이 빠지면 어떻게 될까요?

한 사람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이 빠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결국 자기만족, 자기위안, 자기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겠습니까?

가룟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머리론 잘 알고 있었지만,

마리아 안에서 지금 어떤 사랑이 역사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무지했고 또한 무시했습니다.

그것이 단지 값비싼 향유를 한 순간에 공기중으로 날려버린 허망한 일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그분의 장례를 위한 의미있는 행동이었다 하십니다.

오직 그 마음에 사랑이 역사하고 있던 마리마만이 그 순간 가장 탁월하고 의미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생각합시다.

죄 없으신 그분이 나와 같은 죄인의 자리에 함께 서시고,

내가 받아야 할 죄값을 먼저 그리고 대신 치르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죄인인 나와 상종하지 않으시고 나보다 의로운 사람과만 상대하셨다면,

오늘 나는 그분을 두려워하기는 할지 몰라도, 사랑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강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십자가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 그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릅니다.

나같은 죄인에게도 찾아오셔서 나와 똑같은 부류의 사람 되길 마다하지 않으신 그분은 이제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삶 속에서 그분을 향한 나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만이 죄인을 변화시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기대했다가 실망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을 신뢰했다가 배신감을 맛본 경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깨닫습니다. 우리가 진정 기대하고 신뢰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 하나님 안에서 이제 우리는 다시 사랑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며 내 옆에 한 사람을 향해

‘기대하며 바라보는 사랑,’ ‘신뢰하며 함께하는 사랑’을 진솔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나타내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 늘 마음에 새기며 내 앞에 한 사람에게 그 사랑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