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의 구주 예수님

<요한복음 8:2-12>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를 가운데 세우고 그들은 예수께 말합니다: “모세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함이었다 합니다. 그것은 교묘한 덫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 하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른 자로 인식될 것이고, 이것은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게 하고 있다는 의심을 더 확증해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따라 그 여자를 돌로 치라 말한다면 그것은 당시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로마 정권을 거스르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법에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는 규정이 없었고, 당시 로마 정권은 식민지 유다 백성에게 자체적인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는 몇 가지 비정상적인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 여인의 혐의를 입증할 증인들을 그들은 예수께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사람의 죄에 대해 처벌하고자 할 때, 특히 사형에 처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그 사건을 확정하게 하였습니다(신17:6; 19:15). 그러나 그처럼 적절한 판결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답변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치 모세의 율법이 간음한 ‘여자’에게만 사형을 요구하고 있는 듯 말하면서 현장에 함께 있던 그녀의 상대 남자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관련된 남자와 여자 둘 다를 사형에 처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리고 신명기 22장 22절에,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당시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남성 가장의 소유물 개념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간음은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속한 것을 탐하고 해하는 잘못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 다른 어떤 법보다 약자보호법의 성격이 강했던 모세의 율법의 경우 관련 규정이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남자는 빼고 여자만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심은 땅에 쓰신 내용이 무엇일까에 쏠립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에 대해 정보를 주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땅에 쓰신 내용이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상황에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는 행동 자체가 말을 대신한 하나의 의사표현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질문을 받은 상황에서 몸을 굽혀 땅을 바라본다는 것은 시선을 질문한 이에게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뜻이고, 말로 분명한 답을 주는 대신 땅에 알 수 없는 말을 끄적이고 있다는 것은 질문에 답을 할 의사가 없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주석에 따르면, 실제로 예수님 당시 그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그러한 행동은 그 일에 관여할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는 제스처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사안을 다루는 방식에는 적절치 못한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그 지혜를 구하고자 질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을 공격하는 도구로 그 여인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간파하지 못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 순간 예수님의 분노 게이지가 상당히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끄적이며 예수님은 그 화를 누르고, 그 간접적인 의사표현을 통해 그들이 스스로 포기하고 떠날 시간을 벌어주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답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기들이 그 여인보다 도덕적으로 월등하다는 우월의식, 또한 예수님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며(straighten up)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stoop down) 손가락으로 땅에 쓰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법적인 질문에 답하는 대신 그보다 더 포괄적인 ‘죄’라는 범주 속에서 그 문제를 다루십니다. 여기 ‘죄 없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아나마르테토스’는 부정의 접두사 ‘ἀν’과 ‘죄를 짓다’라는 뜻의 ‘하마르타노’의 합성어입니다. 과녁을 빗겨가는 화살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벗어나는 행위를 표현하는 말이 ‘죄’(하마르티아)이고, 따라서 이 죄라는 개념은 명백히 드러난 법 위반을 넘어 사람이 마음으로 범하는 잘못, 즉 다른 사람 눈에는 가려졌지만 하나님 눈에는 다 보이는 잘못까지도 포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이처럼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간음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7-28)

여기서 예수님은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를 범하는 명백한 법 위반을 넘어 그가 마음과 눈으로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간음 죄를 짓는 일이라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한 여자가 다른 여자의 남편을 탐하는 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남자에게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신 것은 모세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 예수님 시대에도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그 잘못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남자들 중에는 다른 여자와 살 생각으로 특별한 사유없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내보내는 경우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이런 행위가 간음에 관한 율법 위반은 교묘히 피하면서 마음과 눈으로 간음 죄를 짓는 일임을 또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31-32).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것은 다른 사람이 범한 잘못에 대해 정죄하고 처벌하려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다른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7:3,5)

간음한 여인을 고발하고 있는 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과연 밝은 눈으로 그 여인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그녀가 간음하다 잡혔다는 그들의 주장 외에 그녀가 어쩌다 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른 그 어떤 사실도 그들에 의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은폐하고 있는 다른 진실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지 않습니까?

죄인에 대한 처벌이 불필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실로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각한 문제입니다. 누군가 죄를 지을 때 그것은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눈에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간음한 여인의 죄보다 예수께서 더 심각하게 보신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타인을 공격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는 뿌리깊은 교만의 죄입니다. 바로 그 죄가 후에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내몰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한 말씀을 던지시고 예수께서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끄적이시는 동안, 거기 있던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차례로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죄 없다 말할 수 있는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몸을 굽혔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시고, 다시 또 몸을 굽혔다가 다시 또 몸을 일으키십니다. 그분이 몸을 굽히신 시간은 참으시는 시간이고 기다리시는 시간입니다. 한편 그분이 몸을 일으키시는 시간은 직시하시는 시간이고 말씀하시는 시간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께서 몸을 굽히고 계신 시간을 답답해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계속해서 주님을 닥달할지 모릅니다. “저 죄인을 보세요! 저 인간에게 어떤 벌이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보십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어떤 사람일까요? 시편 130편 3절에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주께서 몸을 굽히시는 시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돌이킬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시는 시간이 아닐까요? 누군가를 향해 던지려고 들었던 돌을 스스로 내려놓고 그 정죄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날 수 있도록 주어진 기회의 시간이 아닐까요? 그러나 마지막 때 마침내 주께서 그분의 몸을 일으키실 때 사람들이 그 입에서 듣게 될 말은 공의로운 심판의 말일 것입니다.

이윽고 그곳에는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여기 ‘정죄하다’로 번역한 단어는 ‘카타크리노’입니다. 이 말은 ‘심판하다’, ‘판단하다’의 의미를 갖는 ‘크리노’라는 동사 앞에 ‘~에 대하여’라는 뜻의 접두어 ‘κατὰ’가 붙은 합성어로서, ‘비난하다’(condemn), ‘정죄하다’, ‘선고하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혐의로 고발당한 누군가에 대해 형을 확정하고 비난이나 처벌을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녀를 간음범으로 고발하고 그녀에게 어떤 처벌이 가해져야 할지 예수께 의견을 물었던 사람들은 결국 그녀에 대한 정죄의 절차를 진행시키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녀를 정죄한 자가 없음을 예수님은 먼저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신 후 그분 또한 그녀를 정죄하지 않는다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녀가 행한 일이 죄가 아니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일과 그 죄에 대한 최종 선고를 예수께서 뒤로 미루셨다는 뜻입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칠 수 있다면 죄 지은 그녀를 돌로 칠 수 있는 이는 예수님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말씀하시며 그녀의 죄를 덮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기 때문이며, 바로 그 일을 위해 그분은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녀가 그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다 해서 그녀의 삶이 더 이상 죄 짓지 않는 완벽한 모습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녀가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혀 살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열려진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의 삶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였을 것입니다. 죄인의 자리에 우리와 함께 서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이전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은혜는 그러나 구원의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아직 주님의 최종 선고, 그분의 마지막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19:30). 주인에게 만 달란트라는 거액을 탕감 받는 은혜를 입고도 자기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무자비하게 대하는 종을 후에 하늘 아버지께서 어떻게 대하실 것인지에 대해 예수님은 또한 경고하셨습니다(마18:23-35).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능력이 있고(히9:14), 참되게 믿고 사랑하는 자는 심판 날에 두려움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줄 믿습니다(요일4:17-18).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던 요한복음의 다른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 역시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사고방식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 또 하나님의 사고방식에서 얼마나 크게 벗어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틀 속에 예수님을 가두고 죄 지은 한 여인을 이용하여 그분을 공격하려 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 모두가 죄에 속박된 동일한 인간들임을 상기시키시고 정죄와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그 옛 질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 곧 영생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의 아들에게서 우리가 빛을 보고 그 생명의 빛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죄인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진리의 빛을 보고 그 생명의 빛을 따라 구원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