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되게 예배하자

2023-24 송구영신예배 설교문

 

<요한복음 4:19-26>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말을 믿으라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새해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요한복음 4장 23절의 말씀을 올해 우리 공동체 주제말씀으로 받습니다. 2024년은 우리 공동체 어린이부터 청소년, 청년, 어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참되게 예배하기 위해서는 ‘예배’가 무엇이고,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올해는 그것을 배워 나가고 노력해가는 한 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예배를 뜻하는 히브리어 ‘샤하’와 ‘아바드’는 ‘그 앞에 엎드리다’,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의 며느리감을 찾으러 떠난 길에서 일이 순적하게 된 것을 보고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샤하)”합니다.

이처럼 예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인식하고 고백하며 그에 합당한 감사와 경배를 그분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7장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보내어 말하게 하십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아바드) 것이니라”.

이처럼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에 매여 있던 속박에서 해방하여 그분의 백성 삼으신 것을 기억하고 오직 그분만을 신실하게 섬기는 일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배를 뜻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와 ‘라트류오’ 역시 ‘경배하다’, ‘받들어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제안합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님은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여기 ‘경배하고’와 ‘섬기라’에 사용된 두 단어가 바로 히브리어 ‘샤하’와 ‘아바드’에 대응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와 ‘라트류오’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배하다’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역시 ‘프로스퀴네오’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경배’와 ‘섬김’이라는 두 요소를 포함합니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이라 하기도 하고 service라 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이집트 파라오의 손에서 구원하여 자기 백성 삼으신 이스라엘을 향해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이 그것을 명하고 있습니다(출20).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여기에도 ‘샤하’(절하다)와 ‘아바드’(섬기다)가 등장합니다.

광야 사십 년을 지나 가나안 땅 진입을 앞두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다시금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이것은 이제 들어갈 그 땅의 부족들이 경배하며 섬기는 신들에 미혹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섬길 것을 당부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스라엘 백성은 점점 우상숭배에 빠져들었고,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점점 속 빈 의식으로 전락해갔습니다. 특정한 날에는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하면서도, 일상의 삶 속에서는 은밀히 다른 신들을 섬기곤 했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그들은 점점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진심이 담기지 않은 반복적인 종교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모욕감을 느끼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죄를 크게 두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긴 죄, 그리고 힘없는 이웃을 돌보지 않고 압제한 죄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죄는 결국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예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생활을 겪고 돌아온 유다 백성을 향해 선지자들은 다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것을 촉구합니다. 겸손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받으실 제사가 될 수 있다고 그들은 역설합니다. 심지어 그가 이방인일지라도 참되게 예배하는 자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리라 선언합니다(사56)

그리고 마침내 메시아가 오셔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1-24)

여기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와 행동이 장소나 사람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장소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을 바로 그 장소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배를 ‘어디서’ 드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누구에게’ 드리느냐임을 말씀하십니다: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예배의 장소가 예루살렘이든 그리심산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이든, 이제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또한 예배하는 이가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인종이든, 그 또한 이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사람들 가운데로 오셔서 그들의 성전이 되시고(요2:21), 누구든지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14:6). 또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롬8:27;고후3:17).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리라 하십니다. In spirit, ‘영으로’ 혹은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몸으로 행하는 외적 행위가 무익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배 중에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 속에 들어와 거하시는 성령 안에서 예배 중에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류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짐승을 잡아 죽이며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과의 아무런 영적인 교류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나와 있어도 줄곧 딴 생각만 하다가 다시 혼자 예배당 문을 나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헛된 예배, 내 마음과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죽은 예배가 될 것입니다.

한편 ‘진리로’(in truth)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어디서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예배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가 갖는 문제와 한계를 지적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는 채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예배하기보다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상상을 통해 빚어낸 어떤 만들어진 신에게 바치는 예배는 결코 참된 예배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바르게 알려주실 분이 오셨고,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적 관점에서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영적인 교감과 상호작용을 수반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결코 일방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공유되는 것이며, 상호작용이고 주고받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섬김 이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섬김이 없었다면 예배는 결코 이루어질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우리는 감사하며 경배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시고 우리는 기쁨으로 응답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고 순종합니다. 이 모두가 참된 예배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속한 교단(예장통합)에서 발행한 예배예식서는 예배에 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신 사실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응답의 행위이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 이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어 그분께 감사와 찬양, 경배와 섬김을 통해 올려드리는 응답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예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합당한)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2)

여기 ‘예배’로 번역된 헬라어는 ‘라트레이아’,  이것은 ‘섬기다’라는 의미의 동사 ‘라트류오’에서 나온 말로서, 공적인 섬김의 일로서의 예배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와 경배로 응답하는 일이면서, 또한 그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일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섬김의 일들이기도 합니다.

정교회에서는 이 삶으로서의 예배를 “Liturgy after liturgy”라 부르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는 주일에 교회에 모여 드리는 의식으로서의 예배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중에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행하는 모든 섬김의 일들 또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삶으로서의 예배(라트레이아)가 참되게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당 안에서의 의식으로서의 예배가 참되게 드려질 때 교회당 밖에서의 삶으로서의 예배도 참되게 드려질 것입니다. 또한, 주중의 삶 속에서의 섬김의 예배가 참되게 드려질 때 주일의 모임 속에서의 경배의 예배도 참되게 드려질 것입니다.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이 예배가 참되게 드려질 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르게 서고, 이어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르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모든 복은 이 바르게 회복된 관계성으로부터 흘러나올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설 때 그 결과로서 주어지는 복이 ‘샬롬’이라고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예배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예배란 우리의 모든 인격을 하나님께 순종케 하는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의 의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그의 진리로써 우리의 생각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그의 아름다우심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정결케 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며, 그의 원하시는 뜻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배에서 하나로 모아지게 되며,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덜 이기적인 감정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가 이렇게 중요하니, 예배 잘 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2024년 새 해에는 우리 모두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배움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저부터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기 위해 공부하고 기도하고 준비할 것입니다. 

찬양대와 찬양팀이 결성되었고, 내년에는 더 많은 분들이 예배봉사자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분들의 경배와 섬김이 참으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되고, 또 성도를 유익하게 할 만한 것이 되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저와 함께 배우고 기도하고 준비하는 노력을 기울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성도님들 모두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2024년 한 해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