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이 고대하는 것

<로마서 8:19-22>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원고갈, 멸종, 오염, 기후변화, 과소비와 같은 문제들은 오늘날 너무나 심각해서 ‘환경 위기’, 혹은 ‘생태 위기’와 같은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1972년 로마에 모인 한 씽크탱크 그룹이 <성장 한계>(The Limits to Growth)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보고서의 요지는 어떤 정책 변화가 없다면 지구는 가까운 미래에 세계 인구의 필요를 공급할 수 없을 것이란 경고였습니다. 

이 보고서가 나온 지 50년이 지난 지금, 전반적으로 여름은 더 더워지고, 비는 더 무거워지고, 가뭄은 더 길어지고, 곤충들은 더 적어지고, 공기는 더 나빠지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점차적으로 일어나고 있기에 변화는 레이더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어떤 지역은 50년 전보다 상황이 더 나아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강은 더 깨끗해졌고, 버스는 검은 연기를 덜 내뿜고, 대부분의 유리는 재활용됩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편리한 삶을 보장하는 대부분의 상품 생산과 원자재 생산이 다른 지역들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 파괴로 가장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는 곳에서 기후 변화는 극심한 가뭄과 홍수, 토양오염, 물부족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코비드-19 판데믹을 겪으며 인류는 한 지역의 문제가 그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임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더이상 우리는 이 생태 위기를 나와 관계없는 문제로 여길 수 없게 되었고, ‘뉴 노멀’(New Normal)이란 말이 암시하듯,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란 말이 많이 회자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은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개발”을 의미합니다.

‘ESG 경영’이라는 말도 듣게 됩니다. 얼마전 한국의 한 목사님이 유럽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는데, 강의 제목에 ‘ESG 경영’이란 말이 들어가 있어 처음엔 뭔가 했습니다. ESG (Environmental-Social-Governance). 간단히 말하면, 오늘날 기업이든 국가든 지속가능하려면 친환경적이어야 하고, 사회적 책임을 고려해야 하고, 투명하게 경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기업조차도 이제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고려가 없이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린 택소노미’란 말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유럽연합 EU 내에서 경제활동을 하고자 할 때 어떤 환경적 기준을 충족해야 친환경/녹색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를 담은 분류체계를 말합니다. 원자력 발전과 가스 발전이 이 녹색분류체계에 포함될 수 있는지를 두고 국가적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이것이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는 사안이라 해도, 서구의 잘 사는 나라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런 흐름들이 가난한 나라들이 볼 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리고,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질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환경 문제에 대한 고려 속에 어떤 사람들은 기술 발전을 통한 새로운 수익 모델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지속성이 높은 에코상품을 개발하기도 하고, 쓰레기를 재가공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들이 성공을 거두려면 일단 그 상품이 팔려야 합니다. 그리고 팔리려면 가격 면에서나 유용성 면에서 장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보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리사이클링은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지만, 리사이클링 자체에 에너지가 많이 소비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상품을 새로 만드는 데 소요되는 것보다 사실상 더 많은 에너지가 소요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재활용상품의 경우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리바운드 효과도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절감 램프가 출시되면 그것이 곧바로 에너지 절약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램프 스위치를 더 자주 켜고 필요 이상으로 불을 오래 밝혀놓는 일이 많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는 이것입니다. 오늘의 환경 위기, 생태 위기는 환경-친화적 상품과 서비스를 더 많이, 더 잘 판매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태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경제적 관점에서, 특히나 성장에 초점이 맞춰진 오늘의 자본주의적 틀 속에서 찾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더 근본적인 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계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관점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생태 위기의 뿌리에는 인간중심주의, 지구를 인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 존재하는 모든 것들, 심지어 사람까지도 유용성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며 대하는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깔려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독교는 이 부분에 제동을 걸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오히려 그런 세계관을 정당화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모든 시대의 사상은 그 시대의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개신교회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문제적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움직임 속에서 생겨난 교회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하면서 모든 사람이 차별없이 하나님의 진리에 이를 수 있도록 복음의 정신을 되살렸다는 점에 개신교회의 기여가 있을 것입니다. 반면, 그 성경해석이나 신학이 근대적 사고의 틀 속에서 개인주의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성격을 띠고 전개된 측면이 있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식물들과 동물들의 창조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에게 생겨난 문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 결과로 다른 피조물들에게 생겨난 문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자유케 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나타남으로 말미암은 다른 모든 피조물의 구원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의 계시로부터 우리는 세계가 원래부터 여기 저절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성경의 계시로부터 우리는 이 세계가 곧 하나님은 아니며, 창조된 것과 창조한 이가 엄연히 구별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 속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며, 이 세계를 초월해 계신 분입니다. 이 세계는 그분의 발등상, 하나님이 관여하시며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성경의 계시로부터 우리는 이 세계가 본래 하나님에 의해 선하게 창조되었음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모습은 죄의 영향력 아래 손상되고 부패한 모습이지 태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셨던 바로 그 모습은 아닙니다.

성경의 계시로부터 또한 우리는 세계가 인간의 거처로 주어졌으며, 이곳에 함께 존재하는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에게 특별한 역할이 부여되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땅과 바다와 하늘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 여기서 ‘정복하라’(subdue)는 말이 ‘마음대로 지배하고 이용하라’는 뜻으로 오해되고 악용된 사례가 있지만, 사실 이 명령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인간이 수행해야 할 사명의 맥락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정복하라’는 이 말씀은 ‘땅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라’,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따라 대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사명이 그분의 창조세계를 경작하고 지키는 것임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경작한다’는 것은 수고하여 생명을 꽃피우고 열매맺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지킨다’는 것은 생명을 돌보고 유지하고 잘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정원을 가꾸고 돌볼 정원사로 하나님은 인간을 여기 두신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로부터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남자를 창조하실 뿐 아니라 또한 여자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또한 다른 각종 동물들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이 고립적인 존재로 혼자 살기보다 자신과 다른 존재와 관계맺으며 함께 살길 바라셨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2:19)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히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명시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에서 그것의 자리와 역할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로부터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중에 처음부터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것을 욕심내어 취했을 때, 그 결과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것,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를 가리는 것, 잘못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 땅에서의 일이 그저 먹고살기 위한 고된 수고로 전락하는 것, 하나님이 거니시던 동산에서 쫓겨나는 것 등으로 나타났음을 알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사건 자체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서 일어났지만 그 사이의 관계에 하나님의 말씀이 엮여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과, 인간의 타락은 자신과 주변세계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배제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인간만이 아니라 주변세계 역시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직전의 극도로 타락한 세상의 모습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6:12)

이처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경작하고 지키고 이름붙이는’ 일과 관계가 있고, 그 일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대할 때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일들이며, 바로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세상에 두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오직 그 외관만을 볼 뿐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이름만을 부여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정하신 창조질서 속에서 이 피조세계의 생명을 다시 꽃피우고 회복시킬 사명이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창조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인간의 구원 역시 창조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과 연합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창조세계의 온전한 회복도 예수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나타남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인간에 구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온 창조세계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시대나 지금 이 시대나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목적에 맞게 존재하며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처럼 허무한 데 굴복하며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합니다.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이것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에 의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는 피조물을 하나님이 (희망 가운데/in hope) 그렇게 두셨다는 뜻입니다. 어떤 희망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통해)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런 자유에 이르길 바라는 희망입니다. 창조세계의 구원과 회복이 인간의 구원과 회복, 즉 하나님의 자녀들의 나타남과 맞물려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은 희망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얘기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상황과 연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 속에는 이미 그들의 구원을 보증하는 성령이 계십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세상에 있고 고난 속에 탄식하고 있으며 소망 중에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허무한 데 굴복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과 유사합니다. 이 창조세계 속에는 이미 그것의 구원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 세계는 썩어짐에 종살이 하는 고통 속에서 탄식하고 있고 소망 중에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허무함과 썩어짐, 절망과 무의미, 파괴와 손상으로부터 해방을 경험해야 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닙니다. 온 창조세계가 그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 이루어지길 하나님은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온 창조세계가 이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하고 있다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자유’가 그저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의 일부임에는 틀림없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의 존재론적 자유, 즉 하나님과의 관계, 또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각각이 자기 존재를 독특하게 형성할 수 있는 자유, 쉽게 말해 하나님 안에서 진정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를 말할 것입니다. 이 세계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며 그분 안에서 내 존재와 삶이 새롭게 구성되며 펼쳐지는 경험이 없이 인간은 참으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저 이 세계 내 존재, 혹은 나 자신의 본성에 종속되어 살아갈 뿐입니다.

11월 26일 토요일에 교회에서 음식바자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보흐니체 정신병원 환우들에게 성탄선물을 전달하기 위한 연례자선음식바자회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일회용품 쓰레기와 음식 쓰레기를 줄일 수 있는 방식으로 행사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무겁고 설거지도 해야 하는 유리와 금속 용기를 사용하도록 하고 음식도 원하는 만큼만 판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하려 합니다. 선물용 상품권도 발행/판매하여 이 뜻깊은 행사에 외부의 지인들도 초대하기 좋게 하려 합니다. 논의 과정에서 약간의 의견 차이가 없진 않았지만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주신 집사님들과 장로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을 제안한 이유는 사실 그리 거창하지 않습니다. 매년 행사를 진행하면서 버려지는 음식들과 일회용품 쓰레기들을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일회용이다보니 사람들이 더 쉽게 버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일회용기를 사용하지 않고 유리접시나 금속그릇을 사용하면 설거지가 필요하고, 그럼 또 물소비와 수질오염을 가중시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환경친화적인 것인지 숫자적으로 계산하긴 쉽지 않습니다.

다만,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이전처럼 계속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며 무엇을 행해야 할지 고민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며칠 전 제 아내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번 음식바자회를 친환경적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한 후, 뭐 하나 사용하고 버리는 일에 더 신경쓰게 된다고.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한번에 다 바꿀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서든 우리는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보완하며 조금씩 확대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쉽게 버려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만들어놓은 좁은 틀 속에 억지로 가두어서도 안 됩니다. 온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잘 보고 대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