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장 7-12절>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예수님의 제자 중에 요한은 유독 ‘사랑’을 강조한 사도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복음서와 서신서에 ‘사랑’이라는 말이 무수히 반복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았던 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아주 특별한 사랑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미 ‘사랑’에 관한 여러 관념들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각자 무언가를 연상합니다. 청춘남녀라면 연인간의 설레고 기분좋은 감정의 흐름을 떠올리기 쉽고, 친구간의 우정이나, 가족간의 사랑을 먼저 연상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아빠가 되어 보니, 특히 아이가 아플 때, “아, 내가 이 녀석을 사랑하고 있구나” 새삼 느끼곤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이와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그래서 이 ‘사랑’을 아예 다른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아가페’입니다.  제가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본문의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함입니다.

7절에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말하는데, 그 뜻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방식의 사랑을 서로 실천하자”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그 아가페 사랑을 어렵지만 서로 노력하자”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고 싶고 할 만하다 생각되는 사랑만 실천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서로 노력하자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가페 사랑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7절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이 부분을 NIV 영어성경은 “Love comes from God”으로 번역합니다.  그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사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발원하여 흘러나오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본문 9절과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대에게 선처를 베푸는 것도 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우리 대신 고난과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항복하며 나아오는 이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은 많이 어렵지는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직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기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아가페 사랑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사랑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하고 있지만, 어느 시대에나 그 사랑을 먼저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하나님 사랑이 사람들 속에 급진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사랑을 행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을 일컬어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낳은 사람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나누어가진 사람들’, ‘그 속에 하나님 사랑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새겨볼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 사랑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과 같다는 뜻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본 적이 없어도 그들은 그 받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반면,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사랑이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 하나, 혹은 하나님의 여러 활동 중 하나 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본질 자체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활동이 사랑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용서하거나 축복하실 때만이 아니라 징계하거나 교훈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하신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7세기 말에 활동했던 기독교 사상가 니느웨의 이사악이라는 분은,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라는 불꽃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믿어지는 사람은 자기 앞에 놓인 어떤 일이라도 신뢰하는 마음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심판 날에 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처럼 언제나 담대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사도 요한은 11절에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제 우리는 여기 나오는 ‘사랑’이란 단어를 아가페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 사랑을 우리도 서로에게 행하고자 노력하자는 권면입니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럴 만한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어주는 사랑도, 나의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내 이웃의 곤궁에 나를 얽어매는 사랑도, 적대감 속에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용서하며 다가가는 사랑도, 모두 우리 힘만으론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성령이 일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은 우리 속에 하나님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시고,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어떤 이는 질문할지 모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본문 19-21절에 나옵니다. 

첫째, 우리가 먼저 주님께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는 건 진실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받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특징짓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다른 것이 부족해도 이것이 있으면 그래도 교회다움이 있는 교회입니다.  반면, 다른 것이 많아도 이것이 없으면 교회다움이 없는 교회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각자 정치적 입장도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정치색을 가지고 모이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사랑 때문에 생겨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아가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서라면, 교회는 타협을 불허하는 급진성을 띠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실천은 이념이나 정치나 종교의 벽에 막혀서도 안 되고, 국가나 민족이나 계층의 경계에 갇혀서도 안 됩니다.

이차대전 중에 프랑스 떼제 공동체는 곤궁에 처한 유대인들에게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이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곤궁에 처한 독일군 포로들에게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 모두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미움과 분리와 차별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이처럼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사랑의 실천은 매우 급진적인 정치적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 먼저 자기 안에 미움과 차별의 벽을 부수고 이웃을 향해 편견 없이 용서와 섬김의 팔을 뻗는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평화의 길을 내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 아가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만약 우리가 이런 사랑의 실천을 그리스도인 신앙 수준의 끝단계로 여긴다면, 아마 우리는 죽을 때까지도 이 사랑을 실천할 엄두도 못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신 예수님의 의도와 다릅니다. 이미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사명을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매순간에 아주 단순히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먼저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 사랑을 늘 묵상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 사랑을 교회와 세상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