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8년 1월 14일)
- 베드로전서 4장 7-11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 베드로전서 4장 7-11절.docx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베드로전서 4장 7-11절>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베드로전서는 주후 65년경에 쓰여졌습니다. 소아시아 북쪽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는 로마에서 시작된 기독교 박해가 소아시아 지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주한 고난 앞에서, 혹은 다가올 시련 앞에서 염려하거나 흔들릴 수 있는 신자들을 믿음 위에 굳건히 세우려는 목적으로 이 편지가 쓰여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쓰여진 내용이 오늘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물론 지금 우리는 그처럼 신앙으로 인한 박해의 환경 속에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삶 속에 순간순간 끼어드는 어려운 상황들 앞에서 염려하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합니다. 희망찬 덕담과 포부 속에서 늘 새해를 시작하지만, 하루하루 살다보면 어느 순간 염려와 근심이, 미움과 불평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난과 문제가 피해가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결국 어떻게 끝나리라는 걸 알고 있고, 바로 거기에 입각해 오늘을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권면은 오늘 우리의 삶을 위한 지혜가 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여기서 “만물의 마지막”이란 이 세상의 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합니다. 베드로의 시대나 오늘 이 시대나 우리는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님은 “내가 속히 오리라” 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날이 도적같이 이르리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주적 종말이든, 개인적 죽음이든, 마지막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바꿀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당시 신자들에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이 메시지는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사악한 자들의 악한 삶의 방식들이 결국 심판받을 그 날, 자신들의 눈에서 눈물이 씻겨지고 고난의 상처가 영광의 흔적이 될 그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물의 마지막,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믿는 신자는 오늘의 삶을 바르고 담대히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을 것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를 자기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 할 것이며, 그로 인해 겪게 되는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려 할 것입니다. 이 만물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사는 신자들에게 이어서 네 가지 구체적인 권면이 주어집니다.
첫째로, ‘깨어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7절 하반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라는 말은, 말짱한 정신, 즉 무언가에 홀리거나 정신을 빼앗기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근신하여”라는 것은, 맑은 정신과 절제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기 실패의 경험을 통해 조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잡히시기 전 예수님은 기도하러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지만 제자들은 깨어 있을 수 없었고, 결국 수제자인 베드로조차 시련의 때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맙니다. 신자들이 기도에 뿌리를 두지 않고 있을 때, 극한 고난과 유혹에 직면하게 되면 얼마나 연약해질 수 있는가를 그는 여실히 경험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쁜 일들 속에서 내 삶이 그냥 아무렇게나 휩쓸려가지 않도록, 내 영혼과 마음을 홀리는 많은 것들 속에서 내가 쓸데없는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나를 힘들게 하는 여러 상황들 속에서 내가 옳은 길 대신 편한 길을 택하지 않도록, 안팎에서 들리는 여러 소리들 가운데 내가 내 뜻을 하나님 뜻이라 우기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똑똑한 사람들조차, 정말 중요한 순간에 어이없는 선택을 하는지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기에 기도만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첩경입니다. 기도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확신할 수 있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성령 안에서 주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근신하여 기도하라”
기도생활을 위해서는 자기 절제가 필요합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 작년보다 좀 더 기도에 힘쓰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어려운 일 있을 때만 기도하셨던 분들은 이제 평소에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식사기도만 하셨던 분들은 이제 기도시간을 짧게라도 떼어 놓을 수 있길 바랍니다.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자녀들의 환한 얼굴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 순간에, 짦게라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어렵고, 나쁜 감정이 나를 사로잡을 때는, 속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반복해서 기도하시면, 그것이 우리 속에 새로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갑자기 누군가가 생각나거든, 그 순간 잠시라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이 세상 어느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접하거든, 그 순간 잠시라도 그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아주 작은 일 같아도, 먼저 내 안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위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서로 사랑하라’ 말씀합니다.
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열성적으로, 지속적으로, 의지적으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랑을 어느 한 쪽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함께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고난의 상황은 믿음이 연약한 형제자매들이 실족하게 되는 일을 발생시킬 수 있지만, 거기에 예수님 사랑이 역사할 때, 그것은 분열이 아닌 성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것은 죄를 무시하거나 수수방관하거나 숨기는 것이 ‘사랑’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 ‘죄를 덮는다’ 할 때, ‘덮는다’는 말은 소나 양의 희생의 피가 제사 드리는 자의 죄를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희생을 통해 만인의 죄를 덮어준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사랑으로 누군가의 죄를 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 버려 나의 죄를 덮으시며 용서하신 것을 생각하며, 나도 내 형제자매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아일랜드 출신 기독교 사상가 C. S. 루이스는 ‘용서에 관하여’ 라는 짧은 글에서, 기독교적 의미의 ‘용서’에 관해 중요한 것을 말해줍니다.
먼저 그는 ‘용서’와 ‘양해’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용서와 양해는 전혀 다릅니다. 용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 너는 이런 일을 했다. 하지만 네 사과를 받아들인다. 나는 이 일에 대해 네게 앙심을 품지 않을 것이고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양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쩔 수 없었다는 것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걸 알겠다. 정말 네 잘못이 아니었구나.”
이어서 그는 참으로 기독교적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와 양해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자신들을 속이거나 괴롭힌 누군가를 용서하라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속임수나 괴롭힘 자체가 없었다고 설득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용서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그 사람은 가장 중요한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정확히 바로 그것을 용서해야 합니다… 정말로 양해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는 일을 양해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자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정함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할 수 없는 부분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나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 없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그 받은 사랑 안에서 다른 이의 잘못을 덮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대접하라’ 말씀합니다.
9절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
베드로 시대에 교회는 소수집단을 형성했고, 이방 사회에서 백안시되는 형편이었습니다.그러므로 성도들끼리 서로 돕고 대접하는 일이 꼭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해외에서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감기 때문에 좀 고생을 했는데, 이를 안 집사님 한 분이 좋은 약을 갖다 주셔서 제가 회복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해외에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어려운 이들에 대해, 그 힘듦을 이미 겪어봐 아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서로 돕고 대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시대 교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여행객들을 위한 숙박시설이나 길가 식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중에 있는 전도자들이나 교사들은 머물 장소를 얻기 위해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시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 대접의 행위와 더불어 그리스도인들간의 만남과 교제과 예배의 장이 되곤 하였습니다.
체코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가 때때로 주어지곤 합니다. 그 일을 기쁘게 할 때도 있지만 힘들게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남을 대접하는 일과 관련해 사람들 사이에 생각의 차이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힘에 지나도록 최선을 다해 하는 대접이 ‘좋은’ 대접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어떤 분들은 상대방이 부담 느끼지 않을 정도의 대접이 ‘좋은’ 대접이라 생각합니다. 모두 일리 있는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이 생각의 차이 속에서 기대 수준의 차이가 발생하고, 거기서 오해나 원망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지요?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못따라 간단 뜻입니다. 많은 경우 사랑은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흘러 내려갑니다. 하지만 그 자식이 커서 부모가 되면 다시 그 자식에게 큰 사랑을 나타내곤 합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내리섬김’ 혹은 ‘내리대접’이란 표현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섬기거나 대접한 후에 바로 그만큼의 보답을 그 당사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지 모릅니다. 내가 그에게 행한 섬김과 대접이 혹시나 언젠가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 그와 같은 일을 행하는 데 작은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
본문에 ‘대접하라’는 말을 NIV 영어성경은 “Offer hospitality”로 표현합니다. ‘환대를 제공하라’는 뜻입니다.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이 말한 것처럼, 환대는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롭고 친밀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대접한다’는 것은 사교적인 ‘접대’와는 다릅니다. 사교적인 접대는 초점이 초대하는 주인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잘 차려진 음식, 주인의 계획대로 차질없이 흘러가는 일정, 그런 것들이 좋은 접대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와 달리 대접은 초대받는 손님에게 초점이 맞춰집니다. 일차적인 관심은 손님의 필요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요청되는 것은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대접은 어질러진 집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메뉴라곤 밥에 국밖에 없는 식탁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인과 손님이 함께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진솔한 환대의 실천을 서로 원망 없이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넷째로, ‘서로 봉사하라’ 말씀합니다.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은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성령을 통해 각 사람에게 주어진 재능과 능력을 말합니다.각 사람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영적인 은사를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행함, 영분별, 방언, 통역 등의 은사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외에도 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다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 공동체에 속한 각 사람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청지기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좋은 것을 잘 갈고닦아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를 구분하는 기준은 ‘충성됨’에 있습니다. 선한 청지기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림없이 주인이 맡긴 일에 충성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나누는 일이기에 여기에는 자기 자랑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나눌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에 여기서는 서로간의 비교도 무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고전12:22)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아무 의미와 기능 없이 존재하는 지체는 아무도 없습니다.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각자의 은사들로 서로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오늘 2018년 교회봉사자 임명식이 있었습니다. 매년 있는 연례행사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은사가 무엇이며, 그것을 내게 주신 그분의 뜻이 무엇일까 다시금 생각해보며, 올 한 해도 이 봉사의 여정을 ‘하나님 앞에서’ 걸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 이 봉사와 관련해 중요한 권면이 11절에 나옵니다.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특별히 교회에서, 말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 예를 들면 목사나 선교사나 교사가 되겠지요. 그들은 책임있게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 말이나 마구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잘 살펴, 신중하고 책임있고 무게있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재능과 역할로 섬기는 분들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 합니다.
봉사는 내 안에 재능을 사용하는 일이지만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봉사하다가 힘에 부칠 때도 있겠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 힘을 주실 것입니다. 또 자기가 봉사한다고 해도, 모두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이므로, 겸손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봉사는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섬김과 희생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입니다.
왜 그렇게 봉사하십니까? 예수님 때문이지요! 어떻게 그렇게 봉사하십니까?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 봉사할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분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이며, 성도가 그분 앞에서 행한 일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꼬빌리시 한인공동체 18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공동체가 체코와 일본, 그 외 여러 민족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이곳에서 한 몸을 이루고 이제까지 올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시다! 만물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주의 뜻을 좇아 살려했던 이곳 꼬빌리시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그 일을 이어갈 사명을 안고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깨어 기도하라, 서로 사랑하라, 서로 대접하라, 서로 봉사하라!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하라!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2018년 한해 교회와 세상 속에서 복된 사명의 길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