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들

<사도행전 1:3-14>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목요일은 교회절기 중 하나인 ‘주님의 승천일’이었습니다. 부활주일로부터 40일째 되는 목요일을 교회는 ‘주님의 승천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중요하게 여기는 축일인데, 개신교회에서는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승천’이란 하늘로 올려짐을 말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의 33년 생애를 마치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본래 계시던 성부 하나님 곁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의 사역이 끝났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이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며, 그 일은 성령의 권능을 받은 그의 증인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눅24:47;행1:8).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곁으로 되돌아가시지만, 그분의 사역은 ‘증인들을 통해 지상에서’, ‘성령을 통해 하늘로부터’ 계속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의 지상 사역과 천상 사역을 구분짓는 분기점이 된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 편에서 볼 때, 주님의 승천은 ‘부재’와 ‘공백’의 상황을 의미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옆에 계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하늘로 올라져 사라지시는 상황이었습니다. 놀라움과 더불어 허탈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 그들이 소망했던 일의 중심에 있으셔야 할 예수님이 홀연히 그들 곁을 떠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일시적 부재’, ‘일시적 공백’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후에 일어날 성령강림사건은 새로운 채워짐, 새로운 주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에겐 그 부재의 시간, 공백의 상황이 필요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약속된 성령은 예수님의 승천과 동시에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열흘의 시간을 그들은 그렇게 비어진 채로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 그들에게 이 부재의 시간, 공백의 상황이 필요했을까? 주님이 승천하시던 날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셨던 대화가 그 이유를 암시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잘못짚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자신들이 소망하는 바를 예수님을 통해 이루려는 것, 여전히 그들은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칼빈이 주석하듯, 그들의 질문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회복하다’라는 동사는 그들이 정치적이고 영토를 지닌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명사는 그들이 하나의 민족적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때’라는 부사구는 그 나라가 즉각적으로 설립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라는 멍에에서 해방되어 옛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을 예수님 안에서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고 있던 수치와 고통을 생각할 때, 그들이 이러한 소망을 품었다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입니다.문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이루어가시려는 ‘하나님의 나라’와 제법 차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7-8)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때(카이로스)가 언제이며 그 때까지 지상에서 경과되는 시간(크로노스)이 얼마일지는 성부 하나님의 소관이며 우리가 알 바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하고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성령의 권능을 받아 세상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권능’이란 단어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암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권능은 세상 나라들의 권능과는 다릅니다. 성령에 대한 언급이 그 권능의 본질을 규정해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구현되는 그분의 통치입니다. 그것은 군인들이 아니라 증인들에 의해, 전쟁의 선포가 아니라 평화의 복음을 통해, 군사적 폭력이나 정치적 술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 점진적으로 확장되어가는 나라입니다.

이 증인들의 사역은 현재 그들이 머물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것이며, 이후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까지 뻗어나갈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민족성 안에 머물지 않고 모든 인종과 민족과 언어와 계층과 성별과 세대를 초월하는 포괄적 성격을 띨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가 완성될 때, 구속받은 무수한 큰 무리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계7:9) 이끌려 나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까지 40일간 제자들 가운데 더 계시며 가르치셨던 주제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였다고 합니다(1:3). 이것을 가르치실 때 세상 나라들과 구별되는 이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예수님은 계속 그것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았을 뿐이죠. 자신들이 꿈꾸고 소망하는 것에만 고착되어 그와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주님께 충분히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그 날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그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24:49),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임하시며 주님께서 이처럼 계속 ‘성령’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소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능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됩니다.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일의 시작, 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일의 성취가 어떻게 우리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바로 ‘성령’을 통해서라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소망을 따라 내 힘과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주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시고 권능으로 친히 우리를 이끌어가시며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이 소망하는 일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려는 생각의 틀 속에 여전히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주님의 승천은 그들의 계획이 좌절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이 소망하는 일의 중심에 있으셔야 할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보는 가운데 올려져 가셨습니다. 구름이 그를 가리어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제자들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더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아마도 그들은 천사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해서 주님을 되돌아오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세상 끝에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은 주님의 증인들을 통한 선교의 시간입니다.

일시적 부재, 일시적 공백의 상태에 그들은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새로운 소망을 향해 마음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새로운 지평 위에 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승천과 함께 제자들은 일시적 부재, 일시적 공백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또한 새로운 소망을 향해 마음이 열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소망하던 바를 이루어주리라 기대했던 예수님이 그들 눈 앞에서 사라지자 비로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또한 성령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틀 속에서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일로부터 성령강림일까지 그 열흘의 시간 동안 그들이 집중하여 한 일이 무엇인지가 오늘 본문 뒷부분에 나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한 곳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와 여인들, 예수님의 모친과 아우들을 비롯해 약 12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합니다. 모여서 그들은 무엇을 했나요? 예, 기도했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더불어’라는 말은 ‘호모티마돈’의 번역인데, 한마음, 한목적, 한충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을 묘사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던 내용에 합의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성령을 기다리는 마음! 약속된 그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주님의 일에 동참하길 간구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오로지…힘쓰니라’로 번역된 동사 ‘프로스카르테레오’는 하는 일에 부지런하다, 끈질기다는 뜻입니다. 열흘의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입니다. 놀면서 보내는 열흘은 금방 갈 수 있지만 기도하면서 보내는 열흘은 믿음과 끈기를 요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연합되고 끈기 있게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에 대한 주님의 명령과 약속을 함께 붙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 아내와 함께 Let’s talk 영어성경교제모임에 참여하러 내려갔습니다. 그날 모임 인도를 맡은 꼴라즈 목사님 혼자 앉아 계셨습니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저희 세 사람 뿐이었습니다.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이 모임이 지속되는 것이 맞을까,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체코교우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습니다. 시나브로 열 명 가까이 모였습니다. 찬송을 함께 불렀습니다. 꼴라즈 목사님의 몇 안 되는 영어찬양 레퍼토리 중 하나, “It’s me”라는 곡이었습니다. 다른 곡도 좀 하지, 맨날 이 곡인가, 속으로 좀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노래 가사 한 줄이 제 마음을 쳤습니다:

It’s Me, It’s Me, O Lord, Standing In The Need Of Prayer : 나에요 나 주님, 기도가 필요한 채로 나 여기 서 있어요.

참으로 그것이 그 순간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기도가 필요한 채로 거기 서 있던 사람은 다름아닌 저였습니다. 나는 왜 이 모임에 더 많은 사람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을까? 우리 교회에 관해 내가 꿈꾸고 소망하는 어떤 모습에 내가 고착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마치 그 일을 내가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그날의 모임은 참 투박했습니다. 프로그램이 그렇다는 것을 미리 안다면 올 사람 몇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투박하고 단조로운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날보다 꽉 채워진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주님의 임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소수의 인원이 모였지만, 겉으로 볼 땐 별 매력없는 투박한 모임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주님의 승천이 제자들 속에 일시적 좌절과 부재와 공백의 상황을 창조했지만, 그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은 그들을 더욱 충만하게 채우시고, 더 친밀한 주님의 임재를 허락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때때로 우리 인생에 그런 좌절과 부재와 공백의 상황이 찾아올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기도하는 일 아닐까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가장 좋은 것, 바로 성령을 구하는 일일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0-23)

이제 우리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이 땅에 세워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를 생각합니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임재로 충만히 채워질 때, 이 성령의 권능을 입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통해 이 세상 만물이 그리스도의 임재로 충만히 채워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는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삶은 약속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욕망과 소망의 틀을 벗어나 주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를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