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3년 4월 7일)
- 누가복음 23장 33-49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십자가 사랑 - 눅23,33-49.docx
<누가복음 23:33-49>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성금요일예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 년 전 예루살렘 근교의 한 처형장에서 십자가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날 처형된 죄수는 총 세 명이었는데, 그 중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란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를 심문했던 유다총독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는데, 그 죄수는 이를 부인하지 않았고, 이에 빌라도는 유대인 대제사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패에 그렇게 써넣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형집행은 여러모로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그 죄수는 로마법에 의해 정치범으로 처형되었지만, 그 재판을 담당했던 사람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고, 그럼에도 그 죄수는 그를 고소하고 거짓증언하는 목소리들에 대해 아무 항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십자가형에 내어준 이유는 성난 군중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자, 관리들은 비웃었고, 군인들은 희롱했으며, 옆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그를 비방했습니다. 이전에 수많은 이적들을 행했던 저 사람이 혹시나 십자가에서 내려와 스스로를 구원하는 건 아닐까, 적잖은 사람이 혹시나 하며 주시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육시, 즉 낮 열두시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습니다. 그것이 세 시간 가량 계속되었고, 제구시, 즉 오후 세시에 그 죄수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천년 전 그 금요일에 있었던 일을 어떤 이는 이 정도로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이것이 그 사건의 모든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제가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들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옆에 달린 두 죄수 중 하나는 예수를 비방했지만, 다른 하나는 그 비방하는 이를 꾸짖으며 예수께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합니다.
복음서 기자 누가는 또한 예수께서 숨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전합니다. 그것은 의탁의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거기 있던 이방인 백부장, 즉 로마군대의 장교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예수를 아는 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다 합니다. 그 일은 공공연히 일어난 일이었고, 이를 목격한 증인들이 많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인인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믿습니다. 그 예수 십자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까? 당시 이스라엘 관리들과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백성들의 무지와 악함 때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유대총독 빌라도의 비겁함과 무책임 때문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생명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리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그 표징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 표징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갈5:6). ‘사랑’으로 구원받았기에 ‘사랑’을 행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은 이미 이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이 두 말씀은 사실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뜻은 우리 각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행하는 길에서 겪게 되는 고난과 박해를 기꺼이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보여주듯,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일, 즉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우리가 지고 따라야 할 십자가는 그런 순종의 십자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에 담긴 두번째 의미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아픔이나 오해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자기를 위해’ 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남을 위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분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 모든 죄인들을 위한 십자가였던 것처럼, 우리가 지고 따라야 할 십자가도 나 자신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위해 대신 십자가 지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랑의 길에서 우리 각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감내해야 할 섬김과 희생, 내 이웃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나 자신이 그들을 위해 져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랑의 실천과 관련해 요즘 저는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구약성경의 율법서와 예언서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를 한 마디로 말하라면 이것이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의 의미를 전에 여러분에게 풀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에게 대접을 잘 받으려면 남을 잘 대접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 상황 속에 있는 나에게 누군가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 하는 그것을 그 사람에게 해주어라!” 이런 뜻이라 했습니다.
곱씹어볼수록 심오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내가 해주기 원하는 것을 그 사람에게 해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그에게 다 해주라는 뜻도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내 입장이 아닌 그 사람 입장(상황)에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그 사람을 위한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이게 좋은 거니 받아들이시오’ 하는 태도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그 사람 입장에 서서, 내가 그 상황에 있다면 무엇이 내게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일일까 생각해보고, 바로 그것을 그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 사람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닌 그 사람을 위한 최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이라고해서 그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더 잘 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언제나 그를 위한 최선은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상대방 마음에 드는 일을 하여 그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지금 당장은 그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그 사람 상황에 있다 가정했을 때 정말 최선이라 생각되는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참된 이웃 사랑의 실천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말씀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 말씀의 또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그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실 때 그것이 참된 사랑의 길이라는 걸 이해하며 환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발걸음이 왕궁으로 향하길 바랬고, 그들이 처해 있던 당장의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해주길 원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까지도 그분이 거기서 다시 내려오기를 기대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들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고, 우리의 자리에 서서 그분이 보실 때 우리에게 최선이라 생각하신 그 일을 사랑으로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그 사람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나름 최선이라 여겨지는 일을 믿음으로 행한다 해도, 거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겸손함과 개방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복음서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 한 이방 여인이 와서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그녀를 거기서 쫓아내달라 요청하자 그에야 하신다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분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시고, 심지어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자비로우신 예수님이 왜 이 때는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학자들마다 해석상의 이견이 존재하는데, 어떤 학자는 예수님이 이방인 선교를 반대하셔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일은 후에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질 일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반응하신 것이라 해석합니다. 어쨌든, 제가 보다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 상황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모멸감에 그대로 떠날 만도 한데, 여인은 이렇게 대답하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때로부터 그녀의 딸이 나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인의 믿음이 참 놀랍죠. 하지만 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말을 듣고 그분이 기존에 갖고 계시던 생각과 태도를 ‘수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말이죠! 그 의외의 상황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새로이 깨닫고 순종하셨다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방 선교에 관한 내용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우리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나름 그에게 최선이라 여겨지는 일을 행하였으나, 그 생각과 행동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새로이 빛을 비춰주실 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나 자신을 바꾸어가는 것, 이 또한 이웃 사랑의 실천일 것입니다.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빵을 떼어 나눠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이것이 그저 정기적으로 성찬식을 행하란 뜻일까요? 그분이 우리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서로 실천하며 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죄 많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고 사랑의 선순환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분 자신을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천 년 전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 진실하게 그분의 자비를 구하는 한 죄수에게 기꺼이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맡겨진 사명 다 이루시고 아버지 손에 자기 영혼을 의탁하며 그분은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위해 지신 십자가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누구라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며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