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Ondřej Kolář

<고린도전서15:19-28>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아래에 때까지 반드시 노릇 하시리니 26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셨다 하였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형제 자매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들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고린도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어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이 죽음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부인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몇 몇 사람들이 부활을 단지 이생의 삶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우리는 지금 죽음에서 벗어나 있으며 여기 이생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 – 그러므로 죽음은 이제 우리와 상관이 없다 뭐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생각에 반대하면서 우리가 아직 최종 목적지에 와 있는 것이 아님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또는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력과 힘들이 여전히 난무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여전히 파괴하고 있으며, 여전히 우리를 억압하고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생에 살면서 우리가 이미 낙원에 살고 있고 그래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 열거되어 있는 폭력과 억압과 아픔 등을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부활절 때 갑자기 어딘가로부터 나타나 우리 가운데 잠복해 있던 은밀한 적으로부터 두려움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은밀한 적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 적은 이제 은밀하지 않고 우리는 그 적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게 되었으며, 우리들 중의 몇 몇 사람들은 직접 그 적을 경험하기도 했고 또는 그 적이 우리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똑똑히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아직 그 적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적은 1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서방세계는 오랫동안 죽음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밀쳐 두고자 하였습니다. 전쟁들과 자연재해들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러한 노력 덕택에 죽음을 맞닥뜨리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죽음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죽음을 피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우리의 소망이 이 세상의 삶을 초월한 곳에 있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우리 중 어느 누구의 시선도 그곳에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주님을 따라 죽음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절 기간 또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는 기간뿐만 아니라 평온한 기간 등 그 어떤 때라도 우리가 의지해야만 하는 견고한 토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 입니까? 저는 최근에 종종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또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생계에 위협을 받았거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었거나, 다음 발걸음을 옮기기에 너무 지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용기를 북돋워 줄 수 있을까? 당장 거처가 필요한 사람들이 거의 매 주 저에게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소망은 이러한 삶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세상에 빚진 우리들에게 한 가지 뜻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 말씀의 뜻을 다른 뜻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단지 바울의 이 말씀을 약간 보충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소망이 단지 죽음 후의 소망 뿐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소망이 더이상 손에 쥔 것이 없는 사람에게, 당장 내일 무엇으로 살지 알지 못하는 가족에게 어떻게 소망이 될지 반드시 물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고통을 씻어주실 것이라는 소망은 지금 당장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큰 위로를 주지 못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전체 편지 중 이 부분에서 그의 주의를 개인적인 한 사람의 종말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세상의 종말에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종말의 관점은 우리의 현재 삶에 다른 색깔을 부여하고 다른 빛깔과 맞닥뜨리게 합니다. 바울은 한 사람을 인하여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부활도 그처럼 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에서 부활이 단지 시간의 종말 어느 한 지점에서 있게 될 사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먼 곳, 그 어떤 한 지점에서 있게 될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활의 사건을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어떤 큰 에너지나 큰 물결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불경건과 이기심과 폭력의 역사 시작점에 서 있는 것처럼 반대로 예수님께서 부활의 역사 즉, 생명의 역사 시작점에 서 계신 것입니다.

부활절 아침 후에, 세상은 우리에게 늘상 있었던 세상처럼 나타나더라도 전에 있었던 그런 세상이 이미 아닙니다. 우리는 최후의 승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겸손하시고 온유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예수님께서 때가 되매 세상의 모든 권세를 파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또한 우리의 마지막이 생명이요 죽음이 아닌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설 수 있는지 어느 편에 서야 할 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단지 이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죽음에 얽매여 있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물론 이 싸움은 그리스도의 싸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싸움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관자처럼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 직분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싸움이 그리스도께 속한 싸움인 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 큰 자유함을 줍니다. 즉, 우리는 그 싸움의 결과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우리의 구원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흐름과 우리의 삶이 우리의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을지라도 – 많은 경우 우리의 삶이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 하나님의 승리 안에 있는 소망을 힘입고 우리는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이 자유함이 우리에게 우리의 이웃을 돌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 줍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그 곳에서 하나님 역사의 동역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역사의 동역자들인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힘있는 자들이 연약한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며 불의와 타협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가 사망임을 말합니다. 사망은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이자 가장 큰 원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높아진 많은 악한 것들과 싸워 이기는 성과를 거두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죽음은 우리 앞에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노력들을 산산히 부숴뜨리는 큰 벽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끊임없이 연장되고 있고, 새로운 약들과 백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장기이식들이 행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의학적 진보는계속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제한되고 연약한 존재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될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이는 온 세상이 하나님과 단순히 합쳐질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세상은 세상으로, 그리고 사람은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곳은 한 군데도 없을 것이고 부활의 아침의 빛이 비추이지 않을 어두운 곳은 단 한 군 데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형성된 생명의 기운이 온 세상으로 스며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케 될 것이며 그 생명의 기운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의 시야를 넓히며, 우리의 상상력을 깨워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권능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때론 절며 걸을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마다 부활권능을 덧입고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번역: 김영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