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 설교 – 2018. 04. 01

7. Marie by chtěla toto společenství s Ježíšem s otevřenou náručí přijmout.
마리아는 예수님을 양팔을 벌려 영접하길 원했습니다.
Touží svého Mistra obejmout, mít ho konečně u sebe a pro sebe, nenechat si ho zas někým vzít a odnést.
그녀의 선생님을 꼭 안고 그녀 곁에 두기를 원했습니다. 더이상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뺏아가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Avšak Ježíš hned dává najevo, že si ho nemůžeme osvojit a přivlastnit.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것으로 삼거나 소유할 수 없는 분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Nedotýkej se mě! To zní tvrdě a pro Ježíše tak netypicky: pusť mě, nech mě jít, nedrž mě a nezdržuj mě.
나를 만지지 말라! 예수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나를 놓아달라. 나를 가게 해 달라. 나를 잡지말고 나의 길을 막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통상 하지 않으셨던 말씀입니다.
Když se Ježíš později zjeví svému učedníku Tomášovi, dokonce ho přímo k dotyku vyzve: vlož svou ruku do rány v mém boku.
예수님께서 나중에 그의 제자였던 도마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에게는 예수님을 만져보라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바닥에 넣어 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Proč tedy Ježíš najednou uhýbá a stahuje se? Nebylo nakonec Ježíšovo zjevení jen krásný sen, který se ale musí brzy rozplynout, protože ho nejde chytit, uschovat a zadržet?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갑자기 마리아에게서 피하시고 물러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지키고 붙잡을 수 없다면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결국 한순간 사라질 아름다운 꿈이 아닙니까?

8. Vysvětlení slyšíme vzápětí: Dosud jsem nevystoupil k Otci. Ale jdi k mým bratřím a pověz jim, že vystupuji k Otci svému i Otci vašemu a k Bohu svému i Bohu vašemu, dodává Ježíš.
이에 대한 설명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To je ta radostná zvěst, kterou má Marie nést dál – a kterou máme zvěstovat i my.
그리고 이것이 마리아와 우리가 전해야할 기쁜 소식입니다.
Ježíšovo poslání ještě nebylo dovedeno do konce.
예수님의 사명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Cosi důležitého jej ještě čeká – ale už ne zde na zemi, proto se tu nemůže zdržet.
아직 중요한 것이 예수님께 남아 있습니다. 그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 이 세상에서 머뭇거리실 수 없었습니다.
Přichází za svým Otcem. Ale také tento jeho odchod je pro nás a kvůli nám.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러한 떠남은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한 떠남입니다.
Neuniká před námi. Jde pro nás připravit místo u Otce.
우리를 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가 계신 곳에 우리를 위해 거할 곳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Od této chvíle je jeho Otec plně i našim Otcem, jeho Bůh i naším Bohem.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 예수님의 하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순간입니다.
Tím je stvrzeno naše synovství.
바로 이 순간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집니다.
Odteď už jsme definitivně Božími dětmi.
이 순간 이 후로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Propast mezi nebem a zemí je zacelena.
하늘과 땅의 틈이 메워졌습니다.
Vše, co nás dělilo od Boha, je v Ježíši Kristu odstraněno.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았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Odteď už všichni smíme svobodně volat: Abba, Otče – tak jako oslovoval svého Otce Ježíš.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 그 순간부터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르시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9. Ježíš odchází ke svému nebeskému Otci, aby před něj přinesl naše lidství.
예수님은 당신의 하늘 아버지로부터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성을 가져오시기 위해 하늘 아버지께 가십니다.
Nechce se těšit ze své soukromé blaženosti. Chce, aby to, co přijal od Boha on, jsme přijali také my.
예수님은 당신 혼자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길 원치 않으시고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Po velikonocích s Ježíšem máme vše společné, protože se s námi o vše rozdělil.
예수님의 부활 이후 우리는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기 때문입니다.
A tak jestliže byl vzkříšen on, máme také my povstat a žít. Kristus je živ – a já s ním. Není živ bez nás, ale pro nás, kvůli nám.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면 우리 또한 부활해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으면 나도 그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없이 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우리 때문에 사신 것입니다.

10. Velikonoční ráno tedy svítí i pro nás.
그러므로 이제 부활의 아침이 우리를 위해서도 밝아옵니다.
Tato jistota nás nese a podepírá i tehdy, když – stejně jako Marie Magdalská – nerozumíme tomu, co nás potkává.
이 확신은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주고 지탱해 줍니다.
Bývá to docela často a bolí nás to.
우리는 자주 부활을 깨닫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아픔을 가져다 줍니다.
Nemusíme ale všemu rozumět. A nemusíme – a ani nemůžeme – plně porozumět tomu, co je to vzkříšení z mrtvých.
우리가 부활에 대해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에서의 부활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Stačí nám Kristovo ujištění, že máme podíl na jeho synovství, a tak máme podíl i na jeho vítězství nad smrtí.
다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죽음을 이기는 몫을 갖게 되었습니다.
Jistota, že jsme Boží děti, je pevnější než vše, co mohou oči vidět a rozum pochopit.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합니다.
A tuto jistotu smíme slavit také kolem Kristova stolu, který pro nás – své bratry a sestry, děti jednoho Otce – připravil. Amen.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한 아버지의 자녀들, 우리와 우리의 형제자매님들을 위해 준비된 성만찬 식탁에서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