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21년 1월 3일)
- 시편 90:1-9
- 설교자: 손신일 목사
- 21.01.03 한국어 대역.docx
<시편 90편 1-12절>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상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2021년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2020년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로 흘러간 해였습니다만, 올해도 당분간은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것 같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새해를 맞이하는 일은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일본에서는 새해 인사를 “아께마시떼 오메데또우”라 하는데, 이는 “해가 열려서(시작해서) 축하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기쁘고 축하하기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축하한다는 것일까요?
이때까지 무사히 지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은혜롭고 경사스로운 일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서양에서 양력을 도입하기 전에, 일본에서는 음력(태음태양력)을 쓰고 있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지금도 음력 설날을 축하하는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음력에서 나이를 세는 방법은 새해 설날에 한 살을 더한다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이함과 동시에, 한 살 더 나이가 들게 됩니다.
무사히 나이를 더할 수 있었다는 기쁨이 “아께마시떼 오메데또우”라는 인사가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집단으로 생일을 축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더하는 일은 또한 늙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고된 일이기도 합니다.
해마다 확실히 몸이 약해지고, 머리 회전도 젊을 때보다 못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하였습니다만,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현실이 실감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나이가 든다는 일에는 기쁨과 함께 외로움과 슬픔도 수반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시편90편의 말씀에서는, 인생은 고통이 넘치고 덧없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0절)
인생은 무상(無常)하고 무정(無情)하며, 수고와 슬픔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3-5절)
하나님 앞에 사람의 죄는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사람은 하나님의 분노 아래 놓여 있다고 합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세월 가운데, 마지막에는 티끌로 돌아가게 되는 인생의 덧없을 한탄하듯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 세상의 덧없을 표현할 때,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불교 용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일본 고전문학 중에, “헤이께 이야기(平家物語)”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사무라이 정치가 시작할 무렵, 平氏와 源氏 두 사무라이 가문이 세력 다툼을 벌이면서, 한 때는 영화를 누렸던 平家가 멸망해 가는 모습을 그린 문학작품입니다만, 그 첫 구절이 일본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알려져 있습니다.
“기온정사(祇園精舍)의 종소리,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울림을 내며,
사라쌍수(沙蘿雙樹)의 꽃 색, 성자필쇄(盛者泌衰)의 이치를 나타내네”
불교 전통 안에서 세상의 덧없음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 일본 문화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덧없음을 가르치는 것은 불교나 일본문화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세상에 공통된 일이며, 오늘 시편 말씀과도 상통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가운데서, 어제의 상식이 오늘은 안 통한다는 세상의 무상함을 우리가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는 일이 강조되는 데 대해서, 성경은 諸行無常이 주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넘어서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주제가 됩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도, 1-2절에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하나님은 아무리 천지가 변해가더라도 영원히 하나님이 되시는 분, 영원한 주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 안에서는 인생의 십 배 이상의 천년이라는 세월도, 하루 밤과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그 주님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도 세계도 한 때 지나가고 사라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하나님과 덧없는 세상이 대비되는 것입니다.
그 대비 안에서, 죄에 물든 인생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놓여 지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영원과 인생의 덧없음이 대비되며 실감될 때,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외하며, 우러러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의 덧없음은, ‘나’ 라는 존재의 죄 많음을 깨닫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심의 덧없음, 유혹에 빠지는 나약함, 선(善)의 불확실함… 사람 세상이 무상(無常)인 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사람은 항상 죄 속에 머물게 됩니다.
죄는 덧없음에 깃드는 것이며, 세상의 덧없음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으로서, 덧없는 존재인 우리 앞에 서시게 됩니다.
두려워 공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하나님을 경외할수록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보다 더 알게 된다는 것은, 믿음의 역설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덧없음을 깊이 알게 됨에 따라, 자신의 죄 많음도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편 저자는 청원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 날 계수함”이란 무엇을 뜻하나는 것인지요?
Time is money 와 같은 효율주의적인 가르침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마음”과 나란히 언급되어 있기에, 덧없는 세상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지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지혜란, 중세시대의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의 가르침처럼 자신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존재임을 잊지 말라, 그리하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회귀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덧없는 세상의 유혹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만 마음에 두라는 지혜입니다.
성경에서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 합니다.
자기자신의 날을 계수하는 지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바탕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며, 이 분에게 천년은 하루와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의 시간 속에서는 우리 인생의 날수가 얼마나 긴 지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주어진 시간, 지나가는 무상(無常)의 시간을,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일, 그 분의 십자가의 은혜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됨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비록 덧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 은혜 가운데 “우리의 날 계수함”의 지혜란, 주어진 나날을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는 일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 날,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오기까지, 덧없는 인생들의 세상에 진노를 나타내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면서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는 자비하시고 인자하신 영원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면서, 새 날,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새해를 축하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