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1월 27일)
- 디모데전서 1장 12-17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오래 참는 사랑 - 딤전1,12-17.docx
<디모데전서 1장 12-17절>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참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말할 때,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이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13:4)
사랑은 ‘참는’ 일, 그것도 ‘오래 참는’ 일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한 사랑도 이 ‘오래 참는 사랑’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 인생에 일어난 변화를 예수님의 그 ‘오래 참는 사랑’과 연관해서 말합니다.
먼저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데, 무엇에 대해 감사합니까?
그를 충성되이 여겨 복음의 직분을 맡기신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특별히 감사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은 그 직분 맡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그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합니다.
예수를 비방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며 폭행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사람이 예수 복음 전하는 자로 변모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도리어 긍휼을 입었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기에게, 하나님께 내침받아도 할 말 없는 자기에게,
하나님이 도리어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긍휼’로 번역된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김’의 의미로만 보기엔 아쉬움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는 ‘엘레오스’인데, 이것은 히브리어 ‘헤세드’의 번역어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자기 백성을 향한 그분의 변함없는 인애와 자비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끝까지 ‘인애’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세우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인애’하신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헤세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사랑의 대부분은 아마도 ‘그러므로의 사랑’일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헤세드,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입었다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렇게 긍휼을 베푸신 이유에 대해 바울은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하나는, 과거 그의 잘못은 그가 뭘 몰라서 한 짓이었음을 하나님이 감안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무지 때문이었음을 하나님이 정상참작 하신 것 같다는 얘깁니다.
과거에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해 옳은 일이라 믿었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이르러 주의 은혜가 임하자 모든 것이 달리 보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믿어지게 되었고,
그 하나님 사랑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게 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헤세드’의 사랑을 베푸신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합니다.
본문 16절 말씀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처럼 오래 참는 사랑을 나타내신 것은
후에 예수를 믿고 변화될 사람들을 위한 좋은 샘플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자기에게도 하나님이 그리 오래 참으시며 구원하신 것을 보며,
하나님이 다른 죄인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알려주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역사가 그 오래 참는 사랑을 통해 얼마든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나중 믿은 우리들에게도 알려주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은 복음으로 받지만,
하나님이 다른 죄인에게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싫어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재앙을 면한 것을 보며 싫어하고 분노했던 요나의 모습이
어쩌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4:2)
하나님의 인애(헤세드)가 저 원수 백성들에게까지 적용되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대답하지 않고 성읍 바깥에 초막을 짓고 앉아 성읍이 망하길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에게 그분의 마음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요나가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박넝쿨을 예비하여 한동안 그에게 기쁨을 주시더니,
얼마후 벌레를 예비하사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므로 그를 고통스럽게 하십니다.
이에 불평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4:9-11)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누리게 하신 것들에 대해 내가 아끼는 마음을 갖고,
그것을 잃게 되면 속상한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듯이,
하나님도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을 아끼시고,
좌우를 분변치 못하고 죄악 가운데 사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돌이켜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오래 참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에겐 무지 가운데 죄를 범하던 시간들이 있었고,
어쩌면 그 이후로도 잘못된 열심으로 다른 이를 괴롭게 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걸 아심에도 우리를 내치거나, 이제 끝이다 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릴 끝까지 찾아오셔서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오래 참으시는 이유를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에 근거해서 사도 바울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딤후2:24-26)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다른 성도들에게도 서로 오래 참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3:12)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살전5:14)
오래 참는다는 건 힘든 일이지만, 우리의 인내는 소망을 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야고보서 5장 7-8절에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누군가는 묻고 싶을 지 모릅니다.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가? … 이런 순간에도 참으란 말인가?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룟 유다를 앞세워 예수를 잡으러 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 예수님 말씀에 상황을 감지한 제자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귀를 떨어뜨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
“이것까지 참으라” (눅22:51)
그리고 그 다친 사람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
그렇게 저항하지 않고 잡히신 예수님은 며칠 후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고통 속에 죽어가며 그분은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오래 참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성경의 교훈을 따라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 권면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1절에 말씀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참음의 상황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며 참는 상황’과, ‘죄가 있어 형벌을 받으며 참는 상황’입니다.
전자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지만, 후자는 칭찬받지 못할 일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고 참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일에 본을 보이시고 우리에게 따라오라 하신다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 중에 우리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함께하심을 생각함으로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고난 중에 우리는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함으로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이 이 일에 어떻게 본을 보이셨는가 말씀합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2-23)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의 위험성은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가 죄에 얽혀들어가기 쉬워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죄가 또다른 죄를 불러오는 이 죄의 연쇄작용을 끊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프라하 구시가 베들레헴채플 2층 전시관에 가면 안쪽에 그림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사제가 콘스탄츠 공의회 재판정에 서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제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것은 얀 후스 사제의 시선입니다.
그의 시선은 당대의 권력자들인 왕이나 추기경들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쯤 고개를 들어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변호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오직 철회할 것만을 요구받는 상황에서,
그는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에게 굴복하는 일을 거부하고,
눈을 들어 영원하신 왕,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자기를 의탁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 마음에 하나님 사랑이 있는 사람은 이처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 권면합니다.
디모데후서 6장 11-12절에 말씀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이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 피해야 할 것들을 말하였습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과의 쓸데없는 변론을 피하라…
돈을 사랑하여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사용하려는 탐욕을 피하라…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사람이 따르며 취해야 할 것들을 말합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오래 참는다’는 것은 거짓과 불의를 옳다 인정하며 따라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속한 진리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서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딤전1:5)을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실천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선한 양심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진실하게 세우고,
거짓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기쁨으로 순종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악에 악으로 맞서는 싸움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싸움입니다.
내 앞에 한 사람을 대적하며 물리치는 싸움이 아니라,
그와 내 속에 끼어드는 거짓과 불의를 대적하며 물리치는 싸움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 힘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영생을 취하며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선한 싸움’이라 부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선한 싸움’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발원하는 그 ‘오래 참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
우리는 이 ‘선한 싸움’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오래 참는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래 참는 사랑을 나타내셨고,
그 사랑이 결국 우리의 구원이 되었음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에 우리도 오래 참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결국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인내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도 사랑 안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인내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셔서,
우리가 서로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당신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 오래 참는 사랑을 우리에게도 부어 주옵소서. 고난 중에도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인내하고, 어떤 상황에도 사랑 안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인내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