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2년 12월 11일)
- 빌립보서 4장 4-7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빌4,4-7.docx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천 년 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끝에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어떻게 기다립니까? 주의 은혜 안에서 주께 받은 사명 충성되이 감당하며 기다립니다. 주인이 반드시 돌아와 결산할 것을 믿었던 달란트 비유 속의 착하고 충성된 종들처럼, 그리스도인은 끝을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 종말의 빛 속에서 오늘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날에 내가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이것이 오늘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상황은 여러모로 좋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중에 감옥에 갇힌 상황이었고, 빌립보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사람들과 성도들간의 갈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의 분위기는 침울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소망의 어조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바울은 종말의 빛 속에서 현재를 바라보며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이란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1장 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1장 10절: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그리고 2장 16절: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날’이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을 말함이 분명합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바울은 약속된 그날을 바라보며 현재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도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3:20) 그리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1:27),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2:5).
이처럼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주님의 마음, 주님의 길을 따라 오늘을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다음 몇 가지를 권면합니다. 이 권면을 잘 듣고 실천하며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첫째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합니다. 기뻐하라! 기쁨을 명령하는 것이 말이 되나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기뻐하란 말인가? 심지어 바울은 한술 더 떠서 ‘항상 기뻐하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나?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얘기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기쁨의 요인이 그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상황이라면,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돼야 기뻐할 수 있지 생각한다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기쁘지 않은데 억지로 기뻐하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요인이 바뀌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권면 앞에 ‘주 안에서’란 말이 붙어 있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쁨의 다함없는 원천입니다. 그러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그럴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십니까? 맛있는 것을 먹을 때, 기쁘지요. 저도 먹는 기쁨 참 좋아합니다. 마음에 맞는 친구와 만나 얘기 나눌 때, 기쁘지요. 계획하고 노력한 일이 결실을 거두었을 때도 우리는 기쁩니다. 분명 이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셔서 누리게 하시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고차원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상황이 좋지 않을 때에도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을 때, 우리는 그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실천할 때, 비록 그 길에 고난과 역경이 따른다 해도, 그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힘든 막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 그러나 그렇게 번 돈으로 가족들 먹일 고기 한 봉지 사들고 집으로 향하는 가장의 마음에는 기쁨이 차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의 요인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생각하며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그만큼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그만큼 모르기 때문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의 의미를 더 많이 이해하고 그로 인한 기쁨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길 바랍니다.
전세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는 찬양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8세기에 만들어진 이 아이리쉬 켈틱 찬양을 저도 참 좋아합니다.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 주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 밤이나 낮이나 주님 생각 / 잘 때나 깰 때 함께하소서 // 지혜의 주여 말씀으로서 / 언제나 내 안에 계십소서 / 주는 내 아버지 나는 아들 / 주 안에 내가 늘 살고지고 // 세상의 영광 눈 앞에 없네 / 언제나 주님은 나의 기업 / 주님만 내 맘에 계시오니 / 영원한 주님 참 귀하여라 // 영원한 주님 내 승리의 주 / 하늘의 기쁨을 주옵소서 /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 만유의 주여 소망 되소서 //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 중에 마지막은 이런 내용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0-12)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 칠십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
예수님은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누리셨던 기쁨을 제자인 우리도 예수님 사랑 안에서 누리며 살길 바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9-11)
여기서 계명이란 주님이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 때 예수님이 누리셨던 그 기쁨을 우리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알고 누리고 있었던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상황 속에서도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바울의 이 말은 그의 기쁨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책 <영광의 무게>에서,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등을 두드려 주시는 곳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후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얻게 될 최고의 영광과 기쁨은 주님의 칭찬과 인정, 즉 그분이 나를 ‘알아주시는’ 것이라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둘째로 바울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관대할 것을 권면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여기 ‘관용’으로 번역된 헬라어 “토 에피에이케스’는 영적인 인내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거짓이나 불의와 타협하라는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손해나 역경을 당해도 쉽게 동요되거나 넘어지지 않는 인내심, 당연한 권리 주장 대신에 상대방을 용납하고 포용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관대함을 성도들에게만이 아니라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의 변형구절로 이해합니다. 바울은 선악간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와 오는 것을 믿는 이상 모든 핍박을 인내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일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예수님이 용서에 관해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리고 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기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빛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이 이야기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물론 이 말씀은 그 앞에 나오는 내용과 균형을 이룹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5-18)
누가복음에는 소위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있어 주인이 그를 불러 하던 일 정리하고 그만두라 말합니다. 그러자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다가 얼마 빚졌는지 묻고 기름 백 말이라 하면 오십 말로, 밀 백 석이라 하면 팔십 석으로 자기가 임의로 빚을 줄여주고 갚게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잘 하였다며 칭찬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 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맞습니다. 사람들 중에서 그런 주인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 속에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9)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가깝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임박했다는 의미로도 쓰이고 공간적으로 근거리에 있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 설 그 때를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 가까이에 계십니다. 당신이 처한 상황과 당신이 느끼는 마음을 그분이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니 그 주님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바울은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을 것을 권면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를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염려에 대한 해결책은 기도와 간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기도’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슈케’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간구’로 번역된 ‘데에세이’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을 뜻합니다. ‘감사’는 이 기도와 간구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모든 것을 선하게 이루어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상황이 바뀌기도 하지만, 기도를 통해 바뀌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 마음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내게 주어진 상황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단번에 모두 이해하며 살지 못합니다. 왜 몸이 아플까요? 왜 일이 잘 안됐을까요? 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계속 우리를 괴롭히고 있을까요? 어쩌면 하나님은 그 상황을 통해 뭔가를 계획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떤 일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는 주구장창 그 문제가 사라지기만을 간구합니다.
바울은 기도 중에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신비한 일을 말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 대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 평강, 평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스스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온전함 속에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임하는 그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합니다. 여기서 ‘지킨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호위한다’는 의미의 군사용어입니다. 로마 군대의 수비대가 보초를 서는 광경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믿는 자의 마음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모든 염려와 낙심, 잘못된 걸음으로부터 성도들을 지켜 보호해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동안 성도들은 이 땅에 홀로 버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 가까이로 다가오셔서 당신의 평화를 내려주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인도하십니다.
시편 145편 17-18절에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모든 사람을 향해 관대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주께서 가까우심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3) 주님께 이 말을 듣고 그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